EP.174 다시 나타난 마물
냄새가 난다.
약품처리가 된 사진이 내뿜는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앨범과 액자를 처리한 박사가 들어오자 방긋 웃으며 물었다.
“끝났어?”
박사가 들뜬 표정으로 대답한다.
“응. 끝났어.”
“기분은 어때?”
“그냥... 시원섭섭하다?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 애착이 갔던 물건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내 기분이 나쁠까 황급히 말을 더 붙이는 박사였다.
손을 씻고 나온 그녀가 내 옆에 붙더니 코를 킁킁거린다.
“냄새난다. 창문 더 열까?”
“괜찮아. 금방 빠지겠지.”
“골프채는 내일 골동품 업자한테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할게.”
나는 내 다리에 올라간 박사의 다리를 살살 주물렀다.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지 말고, 누나가 알아서 해도 돼.”
“그래도 말하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해.”
샐쭉하게 웃은 박사가 내 손을 잡으려고 할 때,
쿠르릉!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는 창문을 조금만 남겨놓고 닫았다.
그 상태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듣던 그녀가 기지개를 켠 뒤 고개를 돌린다.
“네가 있으니까 비오는 날도 좋다... 커피 마실래?”
“주면 좋지.”
“따뜻한 거? 아니면 차가운 거?”
“따뜻한 거.”
“알았어요.”
박사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나는 TV로 귀를 기울일 만한 뉴스가 있나 찾아보았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간간히 나오던 마물 이야기가 아예 없었다.
이젠 완전히 일상적인 뉴스뿐.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방증이었다.
다 이 마왕님께서 봐주는 덕분 아니겠는가. 인간들은 자비로운 내게 고마워해야한다.
채널을 돌리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어느 샌가 커피를 다 내린 박사가 내게 머그컵을 내민다.
“다 됐어.”
컵을 받아든 나는 커피를 홀짝였다.
맛이 깊다. 원두를 많이 갈아 넣었구나.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마셨던 밍밍한 커피보다 훨씬 낫다.
옛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자, 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박사를 빤히 주시하던 나는, 생각해두었던 용건을 꺼내야겠다 싶었다.
“내일부턴 디바이스 만들까?”
“내일부터? 알았어.”
“그리고 만들 때 하나 제약을 걸고 싶어.”
“제약? 무슨 제약?”
“우리가 아이테르를 통제할 수 있게 하자.”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우리가 승낙해야만 디바이스가 작동하도록 만들자는 거야.”
박사가 입에 손을 가져갔다.
민감한 말에 경악하던 그녀는, 이내 침착한 얼굴을 하더니 날 설득하려고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건 자유를 제한하는 일인데... 지금까지 문제는 없었잖아. 세화나 유리아도 꼭 필요할 때만 변신했고.”
“실비아 씨나 아델은 엄청 강해. 아이테르 자체의 용량도 세화와 유리아의 것보다 훨씬 많고... 자유자재로 충전과 사용이 가능하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 두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의심하고 있어. 지구인이 아니니까 전에 어떠한 일을 하고 살아왔는지 조사가 불가능하잖아. 아델은 신성력이라는 힘을 사용하고, 마물을 정화할 수 있는 힘을 가져서 괜찮다고 쳐도 실비아 씨가 문제야.”
“뭐가 문젠데?”
“속내를 읽기가 힘들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박사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내 말을 부정한다.
“나랑 대화할 땐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그리고 실비아는 아이테르의 적합자야.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누나도 알잖아. 선한 쪽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놈들이 미국을 전복하려 했던 거. 인간들 속내는 그 누구도 모르는 거야.”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정 걱정된다면 이렇게 할래? 일단 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몰래 심어놓고, 상황을 지켜본 다음 제거할지 말지 결정하는 거야. 어때? 두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면 장치를 제거하자.”
“음...”
깊은 고민을 하던 박사는 한 발 물러서기로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지금 날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
허나 마기로 타락시키지 않았기에 켕기는 일은 하기 싫어했다.
지금도 내 뜻에 따라주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아직 박사는 내 가치관에 동화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
다음 날부터, 우린 디바이스 제작에 착수했다.
내 미래과학 이해도 덕분에 제작방법 정도는 금방 배웠고, 박사와 함께 나란히 앉아 순탄하게 디바이스의 골조를 만들었다.
첫 사흘 동안은 일만 해서 제작 속도가 무척 빨랐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느려졌다.
박사가 요가를 배우겠다며 아침부터 점심까지 학원을 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가임기가 찾아와서 시도 때도 없이 내게 관계를 요구했다.
성욕이 어찌나 왕성한지 하기 전부터 젖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흘째인 오늘도 마찬가지. 요가를 다녀온 박사는 디바이스를 만들다 말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로 한 판 하자는 눈빛을 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나는 현미경을 벗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하고 싶어?”
“응...”
“집에 돌아가서 하자. 우리 지금 일하고 있잖아.”
부끄러워하던 박사의 표정이 일변했다.
“난 내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네 부탁을 들어줬어.”
디바이스를 통제할 수 있는 버튼을 제작한 걸 말함이었다.
어제도 써먹은 말이면서 오늘도 써먹다니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폴리머스 전용 용접기를 내려놓은 내가 말했다.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자자고? 우리가 뭐 거래로 이러는 관계야?”
내 언성이 높아지자 박사가 찔끔했다.
하지만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해했다면 미안해. 근데 너도 약속했잖아. 가임기 때 많이 해주겠다고. 난임이니까 같이 노력하자며.”
“가임기가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리고 내가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뻗는 것도 아니고... 새벽까지 누나랑 하잖아. 어제도 연구실에서 세 번 정도 했고, 돌아가서는 더 많이 했지.”
“불안하니까 그렇지... 나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고, 시간도 없으니까...”
의자를 좌우로 돌리면서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박사.
난 박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팔을 뻗어 그녀의 뒷목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그녀가 진정이 되는 것 같자, 내가 온화한 투로 물었다.
“누나, 오늘 병원에서 배란유도제 처방 받았지?”
“응... 오늘부터 나흘 간 복용해야 돼.”
“배란주사도 맞았어?”
“주사는 모레부터 맞으래.”
“누나가 전에 노력했는데도 임신을 못한 이유는 이런 걸 해볼 생각을 못해서야. 다 잘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장담할게.”
박사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응... 밀어붙여서 미안해...”
“이리와.”
양팔을 넓게 벌리니, 박사가 의자에서 점프하듯 내게 안겨온다.
원래라면 디바이스를 만들고 있는 장소이니만큼 조심조심 움직일 텐데, 냅다 달려드는 걸 보니 참 많이도 떨어졌다 싶다.
그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던 내가 말했다.
“오늘 못 본 영화나 보고 들어갈까?”
“난 좋아...”
“그럼 예매...”
삐익-! 삐익-!
말을 하는 타이밍에 맞춰 터지는 경보.
화들짝 놀란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상황판 중앙에 있는 모니터에 [주의] 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떴다.
그리고 기계음이 섞인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블리언 에너지가 탐지되었습니다.]
[이블리언 에너지가 탐지되었습니다.]
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예전이었다면 경보가 울린 즉시 대비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랜 평화로 인해 퍼진 박사는 일순 냉정해지지 못했다.
말없이 의자를 밀어 상황판으로 간 나는 포탈이 열릴 예상위치를 살폈다.
“아르헨티나네.”
“아르헨티나? 한국과 대척점에 있는 나라잖아...!”
“금방 갈 수 있는데 웬 호들갑이야? 진정하고 아르헨티나에 깔아놓은 포탈들 상태나 확인해봐.”
“아, 알았어. 잠깐만...”
머리를 털어내고 정신을 차린 박사가 키보드를 따닥거렸다.
포탈의 상태를 점검해본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어. 이블리언 게이지는 어때? 어느 등급 마물이야?”
“54퍼센트에서 멈췄어. C등급이야.”
“그럼 비스트 슬레이어가 필요하겠네. 유리아한테 연락할게.”
박사야, 세화는 왜 쏙 빼놓니. 속이 다 보인다 보여.
그냥 용기를 내서 물어보지 그래? 지금 관계는 어떠하냐고.
물론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아니긴 하지.
무선 통신기를 귀에 끼운 박사는 곧바로 유리아의 디바이스와 연결했다.
-박사님, 말씀하세요.
카랑카랑한 유리아의 목소리.
박사가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묻는다.
“경고음은 들었지?”
-네, 디바이스에서 정보를 봤어요. C등급, 위치는 아르헨티나... 맞죠?
“맞아. 지금 갈 수 있어?”
-당장 출발할게요.
“우리도...”
무언가를 말하려던 박사는,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C등급이니까 혼자서 충분할 거야.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을게.”
-알겠어요.
통신을 종료한 박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날 쳐다보았다.
“지혁아, 우리도 가야 하지 않을까...?”
“됐어. C등급이잖아. 54퍼센트면 그 중에서도 하위권 마물이고.”
“하지만 마물이 나타난 건 오랜만이잖아. 세계연합과 아르헨티나는 대응 프로세스를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공짜로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우린 유리아 씨를 보내주는 걸로 할 만큼 했다고 봐. 나머지는 그쪽들 사정이야. 게다가 전투기를 타도 가는데 몇 시간이나 걸리잖아. 포탈은 우리 몸이 버티질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지켜보는 게 나아.”
“하아...”
박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세계연합에 신물이 나서 정나미가 뚝 떨어졌을 텐데도 이러는 것으로 보아 인류애가 아직 남아있는 모양.
빨리 인류를 등졌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지.
박사는 악의를 주입하지 않았으니 이해하자.
성녀가 내 권속이 되기 전까지는, 최소한 힘을 사용하지 못할 때까지는 신중의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박사에게 다가간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부드러운 압으로 주물렀다.
그러면서 박사를 안심시켰다.
“유리아 씨가 빨리 가주면 아무런 희생 없이 끝날 수도 있어.”
“응...”
“내가 이러는 게 낯설어?”
“.... 아니. 나도 네 말에 동의해...”
“스트레스 받지 마. 가뜩이나 중요한 때니까.”
“알았어... 근데 타이라트가 슬슬 다시 활동하려고 하는 건가?”
맞아, 활동하려고 해. 우리 어여쁜 마물들이 피에 굶주려 있다고.
“마물이 나타났으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대체 지구의 어디에 있길래 못 찾는지... 큰일이야 정말...”
“지구가 아니라 우주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
“하긴... 우리와 비슷하게 포탈을 사용하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박사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난, 모니터를 조작해 마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쪽의 포탈을 비췄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 포탈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스트 슬레이어 상태의 유리아가 나타났다.
연두색 땋은 머리를 한쪽 어깨 아래로 내려뜨리고, 딱 달라붙은 레오타드와 치마를 입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
저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스타로트가 죽은 날이 기억나는구나.
-쿠오오오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마물의 포효.
땅을 한 차례 힘차게 차서 공중에 뜬 유리아는, 투명한 계단을 밟듯 허공을 차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나는 포탈 옆에 설치해둔 무인기를 조종해 유리아를 따라가도록 했다.
이후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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