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평생의 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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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웨딩 링 전문점 직원들의 깍듯한 인사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온 박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쾌청한 날씨였다. 절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하지만 비오는 날도 은근히 그리웠다.
매마른 자신의 감정에 물을 주는 기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혁이 옆에 있을 경우에만. 그가 없다면 비오는 날은 끔찍이도 싫었다.
잠깐 나른한 표정을 짓던 박사는 샵에서 받아온 반지상자를 열어보았다.
얇은 밴드 가운데에 있는 프롱, 거기 딱 걸쳐진 잘 가공된 다이아몬드 반지 한 쌍.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디자인됐다.
역시 비싼 값을 한다고 생각한 박사는 차에 탔다.
그리곤 지혁이 어디 있는지 위치추적기를 켜보았다.
‘의정부 성당...?’
지혁은 무교인데 갑자기 성당이라?
고개를 갸웃하던 박사는 이내 아델이 성녀라는 사실을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분명 철없는 그녀가 지혁에게 성당을 가자고 칭얼댔으리라.
그러려니 하며 차에 시동을 걸려던 박사는 돌연 이러한 걱정이 들었다.
‘추적기... 어쩌지...’
박사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지혁 몰래 설치해놓은 추적기.
지금은 들키지 않아 괜찮지만, 만에 하나 지혁이 이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관계가 단숨에 파탄 날 수도 있었다.
저번에 지혁이 채보영의 권유에 못 이겨 마약을 했을 때, 추적기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지혁은 경황이 없어 박사 자신이 어떻게 왔는지 알아볼 생각도 못했고, 그 이후로도 궁금해 하지 않아서 흐지부지 넘겼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지만 다음도 그러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슬슬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우웅-!
상념에 젖어있던 박사는 진동소리와 함께 톡이 하나 오자 얼굴이 환해졌다.
[누나 오늘 아침에 약 먹었던가?]
지혁의 톡. 아델과 있는 도중에 자신을 걱정해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너무나도 기꺼웠던 박사가 황급히 답장을 보냈다.
[너 양치질하고 있을 때 눈앞에서 먹고 보여줬잖아. 졸린 눈으로 나한테 잘했다고 칭찬한 거... 기억 안 나?]
[맞다, 그랬지. 경황이 없었네. 미안해.]
[괜찮아. 어디야?]
[성당. 아델이 데려와 달래.]
진실을 말한 지혁에게 안도한 박사가 손가락을 놀렸다.
[택시 타는 법은 알려줬어?]
[응. 쉽다고 허탈해하더라. 돌아가기 전에 연락할 테니까 영화 예매해놔. 아무거나 누나가 보고 싶은 걸로.]
[알았어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
마지막 톡을 보고 행복에 겨워한 박사는, 휴대폰을 컵 홀더에 넣어놓고 시동을 걸었다.
그래... 추적기는 기회가 보이면 제거하자.
그리 생각한 박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구실에 들렀다.
[생체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푸쉬익-!
전파방해 효과가 있는 문이 좌우로 열리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간 박사는 불에 타지 않는 재질의 상자를 가지고 나오려다가, 상황판을 슬쩍 살폈다.
전 세계에 설치해놓은 이블리언 탐색기는 잘 작동되고 있었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박사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상황판 앞에 앉아 입으로 바람을 후 불었다.
키보드에 쌓여있던 먼지가 휘날리며, 작동되고 있는 환풍기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다.
대충 자리를 정리한 박사는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든다.
이것도 전부 에드워드의 유산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장소.
더 운영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 쪽으로 기울었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돈도 너무나 많이 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세계연합도 문제였다.
원래는 그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자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고, 오랜 시간 끈끈한 유대를 쌓으려 했지만, 지혁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이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은 썩은 놈들이 너무 많고, 권력자들은 부패했다.
세계연합에서도 연구실에 은근슬쩍 뒷돈을 찔러주며 자신의 나라를 케어 해달라는 자들이 많았다.
그것 때문에 세화도 큰 번민을 겪었고...
그런 놈들을 무상으로 도와주자니 정말 싫었다.
하지만 사명감은 없어졌어도 책임감은 남아있었다.
비스트 슬레이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리고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신념을 가진 그녀들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지혁, 단 둘뿐이었다.
“후...”
머리가 아파온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혁과 함께 외딴 섬에서 평생 살고 싶다.
‘조금만 잘까...’
그래야겠다. 머리가 복잡할 땐 잠이 최고다.
한 시간 정도만 눈을 붙이고 돌아가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는 자신의 휴게실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불을 대충 털어낸 그녀는, 클래식을 틀어놓고 알람을 맞춘 다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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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귀에서부터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침대에서 뒤척이며 부스스한 눈을 뜬 박사가 가장 먼저 본 건,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혁이었다.
그의 따사로운 손이 침대와 등 사이로 파고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박사는, 지혁의 부축에 힘입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물었다.
“언제 왔어...?”
“다섯 시간 전에.”
충격적인 말을 들은 박사가 놀랐다.
“다, 다섯 시간...? 지금 몇 시야?”
“밤 아홉 시 다 됐어. 톡도 씹고 집에도 없길래 혹시나 싶어서 와봤더니... 자고 있더라.”
“아홉 시...? 오자마자 깨워주지 그랬어... 영화 예매해야 되는데...”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기 싫었어. 연구실은 왜 온 거야?”
“그... 사진을 넣어놓고 태울 박스가 하나 필요했는데... 왔다가 상황판을 보니까 생각이 많아진데다 피곤해지기까지 해서...”
고개를 주억거린 지혁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박사는 저 갈색빛이 조금 감도는 검은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눈.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이런 박사의 반응에 피식한 지혁이 말한다.
“고민이 많았나보네? 얘기해볼래?”
박사는 자신의 귓볼을 만지작거리는 지혁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책맞게 왜 이러는지... 이 정도면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지혁만 보면 마음이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처럼 변해버린다.
몸을 달싹거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여긴 남편의 유언 때문에 만든 시설이라서... 갑자기 짜증나졌어.”
“짜증날 정도야?”
“사실 복잡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대로 운영하자니 네 돈도 엄청 많이 나가고... 그렇다고 그만두자니 세화를 비롯한 비스트 슬레이어들이 걸려...”
“그래? 그럼 마음가짐을 한 번 바꿔봐.”
“마음가짐을 바꿔?”
“내 뜻에 따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여길 운영하는 게 좋거든.”
“아...”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지혁이 여길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랑하는 지혁을 위해 연구실을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박사가 냅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게.”
지금까진 전남편의 유언 때문에 책임자로서의 책무를 다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긴 지혁의 연구실이다.
앞으로 이 연구실은 지혁이 하고 싶은 대로 운영하게 두고, 자신은 그의 뜻만 따르면 된다.
“표정이 좋아 보이네. 해결된 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지혁의 물음.
작게 웃음을 터뜨린 박사가 수긍했다.
“해결됐어.”
“그럼 다행이고.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하자. 늦었다.”
“응. 근데 나 아직 유품 처리 못했는데... 자느라고...”
“내일로 미뤄. 굳이 오늘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오늘 하라고 했으면서...”
“지금 내일 하라고 하잖아.”
생글거리며 말하는 지혁.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장난은 에드워드와도 자주 했지만, 지금만큼 좋지는 않았다.
왜 그런 재미없는 사람을 사랑했을까 깊은 고민이 들 정도다.
“알았어. 내일 할게. 아, 잠깐만...”
지혁을 놔두고 침대에서 벗어난 박사는, 핸드백을 뒤적거려 반지상자를 꺼냈다.
지혁의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상자를 열었고, 찾아온 반지를 보여주었다.
“어때?”
“예쁘네.”
“지금 끼워줘도 돼?”
“지금? 상황이 조금 심심하지 않아?”
“딱 적당한 상황이라고 생각해.”
“그래? 그럼...”
말끝을 흐린 지혁이 왼손을 내밀었다.
박사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삼키며 사이즈가 큰 반지를 꺼냈다.
그리곤 지혁의 넓은 손바닥 위에 자리한 기다란 약지에 반지를 집어넣고 아주 천천히 밀었다.
세 번째 마디 중간에 딱 걸쳐지는 반지.
사이즈가 완벽하게 딱 들어맞았다.
이런 상황이 어색한 듯, 지혁이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반지를 흘긋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음이 틀림없었다.
고심해서 디자인을 고른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 박사가 왼손을 내밀며 묻는다.
“나도 끼워줄래?”
“아, 그렇지.”
지혁은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런 손길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
이후 박사의 눈을 빤히 주시하며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아...!’
박사는 이때, 지혁과 자신이 하나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젠 지혁의 것이 된 연구실에서, 그와 사랑을 맹세하는 반지를 착용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을 끔벅거리며 눈물을 삼킨 박사가 울먹거리는 투로 말한다.
“고마워...”
“나도 고마워.”
지혁의 나긋한 화답을 듣는 순간, 박사가 그에게 확 안겼다.
널따랗고 단단한 가슴에 뺨을 부비던 그녀의 머리 위로 지혁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폭발하고 지금, 그녀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혁을 향한 진심을 고백했다.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그리고 지혁은... 박사가 듣고 싶어 마지않던 말을 해주었다.
“사랑해, 제니.”
그 애칭을 듣는 순간, 박사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지혁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호칭.
이 특별한 날에 해주니 너무나도 벅찼다.
“가끔 이렇게 부를게.”
이어지는 지혁의 말.
박사는 대답하지 않고 지혁의 품 안에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에게 순종하고 싶다. 그가 원하는 건 뭐든 해주고 싶다.
이러한 마음이 박사의 마음속을 잠식했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에게 몸도 마음도 다 바치고, 완전히 빠져버려 돈, 명예는 물론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어주는 사람들이 간간히 뉴스에 나왔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저들은 모두 자신들이 꿈꿔오던... 내, 외면이 완벽한 이성이 주는 사랑에 중독된 거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도 저들과 같았다.
전남편과의 관계는 풋사랑이라고 느껴질 정도. 그만큼 지혁은 박사 자신에게 있어서 완벽한 남자였다.
첫 마물이 나타났을 때, 건물 잔해에 깔린 지혁을 구해주고 연구실로 데리고 간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를 조수로 뽑게 돼서, 점점 특별한 감정을 품게 돼서, 지금 너무나도 사랑하게 돼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동안 지혁에게 안겨있던 박사가 얼굴을 떼어냈다.
그러자 지혁이 박사의 눈가를 닦아내주며 묻는다.
“배고프지? 외식하고 들어갈까?”
“응...”
눈을 내리깐 상태로 손을 물어뜯던 박사의 대답.
낮은 실소를 흘린 지혁이 다시 묻는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아무거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랑 튀김 먹기 전에 제대로 말해.”
“난 그것도 좋은데...”
지혁이 황당한 듯 헛웃음을 켰다.
하지만 박사는 진심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포장마차의 떡볶이든, 흙바닥에 떨어진 떡꼬치든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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