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로사리오? 불길한 이름이로다
격정적인 관계 후, 함께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거실을 정리했다.
사실 정리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꺼낸 사진들을 한데 모아 일회용 박스에 넣고, 액자마저 거기 던져놓은 게 끝.
작업이 끝났을 때, 박사는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속이 정말 후련해진 모양이다.
“지금 태울까? 마당으로 가서?”
박사의 물음.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이건 누나가 혼자 처리해. 내일 실비아 씨와 아델한테 무인택시 타는 법을 알려주러 갈 건데, 그때 해봐.”
“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할 기회잖아. 혼자 이런저런 생각도 해보면서 잘 떠나보냈으면 좋겠어.”
마지막 남은 죄악감을 툭 건드려주자, 박사가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널 방해했느니 뭐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시간 사랑해왔던 사람인데 저런 반응이 정상이지.
그녀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니야. 난 이미 너한테 모든 걸 주기로 다짐했어.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오해 안 해. 애초에 누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야.”
“응...”
“약은 정말 안 먹어도 괜찮겠어?”
“.... 네가 먹으라고 하면 먹을게.”
“내일 잠깐 혼자 있어야 되는데, 또 환각이라도 보면 큰일 나니까 먹어.”
“알았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박사가 순순히 약을 먹었고, 내게 다가와 안겼다.
그러더니 회한이 서린 투로 말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한테 뭐라고 하지 말 걸...”
“무슨 말이야?”
“난... 네가 마약을 했을 때 화만 냈었잖아. 지금 넌 미친년이 된 날 부드럽게 대해주고 있고...”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비교 자체가 잘못됐잖아.”
“그래도... 못나서 미안해요...”
고고하던 박사가 이토록 순종적이고 애처롭게 변하다니.
엄청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구나.
박사의 얇은 허리를 팔로 감싸 안은 나는, 그녀를 인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눈에 넣을 듯 빤히 바라보던 박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기분이 이상해...”
“뭐가?”
“그냥 똑똑하고 믿음직한 조수라고 생각했던 널 남자로 보게 되고,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널 너무나도 의지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박사 또한 방금 나처럼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된 과거가 아님에도 먼 옛날이야기 같지? 다 이해한다.
“그게 이상한 기분을 느낄 정도야?”
“말을 잘못했어. 너무 좋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들어가서 잘까?”
“응...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줘.”
밖을 바라보니 슬슬 해가 뜨고 있었다.
히죽 웃은 나는 박사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후 침실로 향한 뒤 그녀를 내려놓고 이불을 덮었다.
그녀의 오똑한 코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내가 말했다.
“오늘은 밥 먹을 때랑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면 침대에서 나오지 말자. 어때?”
“좋아... 아, 그리고 반지 찾아와야 되는데...”
“내일 나 없을 때 다녀와.”
“네...”
**
[지혁 씨! 왜 안 와요? (,,Ծ‸Ծ,,)]
[가고 있어요.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약속시간 지났잖아요! (ʘ言ʘ)]
[미안해요. 차가 막혀서...]
[운전 중에 톡하시는 거에요? 뉴스에서 운전 중 휴대폰 하다가 사고 난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했는데...]
[자동운행모드에요. 누워있어도 알아서 목적지로 안내해주는 기술이죠.]
[태평하시네요? 제가 지금 휴대폰으로 찾아봤거든요? 자동차의 자동운행모드는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한대요! 그래서 늦는 거죠!?]
빨리도 찾아보네.
[금방 갈게요.]
[저는 준비 다 끝났는데요? 빨리 오세요! (メ゚皿゚)]
무인택시를 타는데 뭔 준비가 필요하다고... 오버하네.
아델의 톡을 상큼하게 씹은 나는 핸들을 잡고 자동모드를 풀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니까 빨리 가줘야지.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정부에 있는 별채에 도착했다.
박사를 세뇌하는 동시에 슬슬 아델 공략을 위한 사전작업을 쳐놔야 하는데...
일단 나에 대한 호감은 분명히 생겼다.
남자로서의 호감이 아니라 ‘인간’ 송지혁으로서의 호감이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조급한 마음이 든다거나 하진 않았다.
세화나 유리아, 그리고 박사도 이 상태에서부터 시작해 꼬셨으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차가 의정부 주택에 진입했다.
야외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 문을 열자, 현관문에서 흰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아델이 나왔다.
발목 부근에 리본이 달린 흰색 샌들까지 더하니 귀여움이 터져 나오는 수준.
근데 지금 무슨 소풍 가나? 가을이 된지도 오랜데 어이가 없다.
나야 눈요기를 해서 좋지만 말이다.
그녀의 뒤로 간단한 트레이닝 바지와 긴팔 티셔츠를 입은 실비아가 피곤한 얼굴로 뒤따라 나왔다.
딱 봐도 아델에게 편한 복장을 입히려다가, 그녀가 떼를 쓰니 포기한 듯 보였다.
아델은 좋게 말하면 순수한, 나쁘게 말하면 철없는 성격. 조교할 때 골치가 조금 아플 테지.
하지만 잡아먹는 맛도 엄청날 것 같다.
날 향해 냅다 뛰어온 아델이 휴대폰 시간을 보더니 뾰로통한 얼굴로 말한다.
“지혁 씨! 약속시간보다 7분 21초 늦었어요!”
“죄송해요.”
“약속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제일 밉상이래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게임 채팅에서요! 길드원들이 그랬어요!”
“아...”
잘 어울리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다른 행성 출신인 걸 들키지는 않았겠지?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아델을 주시하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포탈을 타고 왔다는 건 아무도 모르니까요!”
맹탕이긴 해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구나. 다행이다.
아델은 지각한 벌을 받아야 한다, 벌금을 내야 한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우리의 앞으로 실비아가 다가와 감사인사를 전한다.
“고마워.”
“뭐가요?”
“바쁠 텐데 아델의 철없는 부탁을 들어줘서 말이야.”
그 말에 아델이 실비아를 쏘아보았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얼굴. 볼을 쭉 당기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실비아는 그런 아델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나는 운동을 좀 하려고 해. 택시는 너희 둘이 타. 아델한테 알려주면 내가 알아서 배울게.”
그럼 나야 좋지.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자주 칭얼거릴 텐데 무시해도 좋아. 그럼 아델을 잘 부탁해.”
“아, 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내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보인 실비아는 몸을 풀더니 가벼운 조깅을 하며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차렸다.
“지혁 씨는 제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요! 벌 대신이에요!”
“부탁?”
“네! 부탁!”
그 모습이 웃겼던 나는 팔짱을 꼈다.
이게 실비아가 말했던 칭얼거림이로구나.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있자, 아델이 우물쭈물한 끝에 부탁을 말한다.
“지구의 성당에 가보고 싶어요. 데려가주실래요?”
다소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저도 모르게 반문할 만큼.
“성당이요?”
“네. 무인택시로 가까운 성당에 가주세요. 그냥 둘러만 보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성당이라... 모시는 신이 달라 기도를 드리려는 건 아닐 텐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나처럼 팔짱을 낀 아델을 보니, 당연히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간을 좁힌 내가 툭 내뱉었다.
“싫어요.”
“네에!?”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입을 쩍 벌리는 아델.
경악하는 모습이 정말 웃기다.
킬킬 웃은 나는 말을 정정했다.
“농담이었어요. 가요.”
“와아!”
양팔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만세를 외치는 그녀였다.
감정이 대놓고 드러나는데다 기복이 파도 같아서 놀리는 맛이 있네.
자고로 성녀란 온화하고, 우아하며, 통찰력이 아주 깊어야 하는 게 국룰 아니던가? 아델은 완전히 반대다.
나야 좋지만 말이다.
“어플 깔아두라고 한 거 있죠?”
“네! 택시 어플요!”
“그거 켜세요.”
“알겠습니다!”
**
“카드를 대어주세요... 라는 문구가 나왔어요! 여기에 대면 되는 건가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아델의 물음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네, 직접 대보세요.”
“우와... 떨린다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차례 긴 날숨을 뱉은 아델.
그녀가 카드를 좌석 뒷부분의 화면에 대자, 삑! 소리와 함께 계산이 완료되었다는 문구가 튀어나왔다.
“어... 끝이에요?”
“맞아요. 쉽죠?”
“엄청 쉬운데...”
아델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를 데리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온화한 투로 설명했다.
“택시 계산 방법은 이게 끝이에요. 가고 싶은 장소가 멀거나 시간이 별로 없다면 플라잉 택시를 타요. 계산은 이 무인택시랑 똑같으니까 지레 겁먹지 마시고요.”
“플라잉 택시? 날아다니는 택시 맞죠? 산책하다가 몇 번 봤어요!”
“맞아요. 그리고 돈이 들어가는 웬만한 일은 제가 드린 이 카드가 전부 해결해주니까, 당황스럽다 싶으면 카드를 내요. 아셨죠?”
“네! 고맙습니다!”
아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활발한 텐션. 보고만 있어도 절로 아빠미소가 튀어나오는 수준이다.
“이제 성당으로 들어가 볼까요? 평일 오후라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 같으니... 둘러보기엔 편할 겁니다.”
“네!”
아델이 후아! 하는 추임새를 넣더니 제자리에서 한 차례 점프했다.
제법 잘 디자인된 큰 성당을 올려다본 그녀가 감탄한다.
“우와아... 엄청 크다아...”
“아델이 사는 행성엔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신전이라고 부르죠?”
“네, 항상 운영하고 있어요. 마치 24시간 편의점처럼요. 하지만 신전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그건 왜죠?”
“믿음만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애써 활발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말투에서 서운함이 드러났다.
그쪽 행성 사람들은 믿음이 별로 없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다른 신전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 명의 신만 모시는 것 같다.
아델이 얕게 어휴... 하며 탄식하더니 묻는다.
“지혁 씨는 신을 믿으시나요?”
내가 신 그 자체인데 왜 다른 신을 믿어야 하지?
“저는 안 믿습니다.”
“아쉬워요. 믿음은 큰 힘이 되는데...”
그래, 네가 마기에 물든 인간을 정화하는 걸 보면 큰 힘이긴 하지.
나랑 상극인 힘이라서 배울 의향이 단 하나도 없단다.
나는 웃는 낯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아델이 용기를 얻었는지 내게 이런 말을 한다.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지혁 씨를 비롯한 다른 동료 분들께 로사리오 님의 교리를 알려드려도 되나요? 실비아 언니는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서운해요.”
로사리오? 들어만 봐도 빛의 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불길한 이름이잖아.
“로사리오 님이요?”
“제가 모시는 여신님의 존함이에요. 정말 대단한 분이시죠.”
대단하긴 무슨... 아주 좆같은 년이 따로 없는데.
가만, 여신님이라고 했지? 좋아... 너도 접수.
최종보스 격의 존재가 분명한 것 같은데, 모든 비스트 슬레이어를 타락시키고 네년의 아래도 따주마.
왠지 그년과 아이테르가 관계있을 거라는 생각이 풀풀 나지만 적어도 지금은 물어보지 말자.
“교리를 배우면 저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아쉽게도 간택된 성녀이자 대리인이 아니라면 신성력은 사용하지 못한답니다.”
“그렇군요. 다른 분들한테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다른 분들이 거절하시면... 지혁 씨만이라도 교리를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해주실 거죠? 그렇죠?”
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분명히 아델과 가까이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질 터.
승낙해서 배우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역시 지혁 씨는 최고로 선한 사람이세요.”
난 최고로 나쁜 사람... 아니, 마왕인데?
널 벗겨먹는 재미가 정말 쏠쏠할 것 같구나.
히죽 웃은 내가 말했다.
“이제 성당 안을 구경해볼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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