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혈연으로 이루어진 군단?
간만에 오피스텔로 돌아온 나는, 조작한 위치추적기가 잘 작동되어있는지 확인한 다음 침대 옆으로 휙 던졌다.
그리곤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흐으...”
내 위에선 유리아가 등에 아로마 오일을 떨어뜨리고, 넓게 펴 발라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처음 시켜보는 마사지임에도 생각 외로 재능이 있었다.
미끈해진 팔로 내 등허리를 살살 비비거나, 손가락을 활용해 적당한 압력으로 꾹꾹 누르면서 은근슬쩍 가슴 부근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며 성감대를 자극했다.
양쪽으로 벌린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리를 살짝살짝 조이는 느낌도 좋았다.
“지혁 씨... 좋으세요?”
위에 올라탄 유리아의 물음.
고개도 돌리지 않은 내가 대답했다.
“좋아. 계속해.”
“저 힘든데에...”
“힘들어? 30분도 안 됐는데?”
“힘드러요...”
콧소리가 섞인 엄살에 낮은 웃음을 터뜨린 나는, 괜히 장난기가 들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유리아의 지압이 강해졌다.
“헤엑... 헥...”
거기에 더해 입으로 힘든 기색을 내비쳤고, 엉덩이를 들었다가 제법 강력한 힘으로 내 허리에 내려앉았다.
대놓고 따지지는 못하겠고, 불만을 표출하고는 싶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교태 섞인 앙탈을 부리는 것이다.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린 나는 유리아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내려오라는 뜻. 그녀가 반색하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바른 자세로 누운 나는 그녀의 목 뒤로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세화는?”
“학교 갔어요.”
나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세화는 심심함을 달래려 대학이라도 다니고 있지만, 유리아는 아니다.
타락한 이후 할 게 없어진 상태.
가끔 인간사냥을 할 때를 제외하면 집, 혹은 비밀기지밖에는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심심하지 않아?”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가끔 얼굴을 비춰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요즘 너한테 소홀했네.”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세화가 돌아오면 뭐해?”
“그냥 나가서 술을 마시거나, 돌아다니면서 쇼핑해요. 인간들 영혼도 수집해서 힘을 키우고요. 아, 저번에는 같이 동영상을 찍었는데, 반응이 좋대요.”
동영상? 그리고 반응이 좋아?
트윙클 아이디를 하나 파고 둘이 레즈 키스를 하는 모습이라도 찍었나?
“무슨 동영상?”
“잠깐만요...”
손을 깔끔하게 닦은 유리아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더니, 세계 최대의 동영상 사이트 어플을 켰다.
그리고는 내게 하나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 안엔 세화와 유리아가 나란히 서서, 기장이 짧은 핫팬츠와 크롭티를 입고 골반을 튕기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일렉트릭 음악의 리듬에 맞춰 포즈를 다양하게 바꾸는, 요즘 유행하는 밈이었다.
조회수는 3천만. 인지도가 없던 상태에서 올린 것치고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수치였다.
영상을 다 본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귀엽게 노네. 어지간히 심심했나보다.
영상을 끈 나는 유리아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었다.
“예쁘네.”
그 말에 유리아의 낯빛이 무척 밝아졌다.
헤실거리며 웃던 그녀가 화제를 돌린다.
“아, 그리고 활이 완성돼서 써봤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근데 마기를 숨긴 상태라 화살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아쉬워요. 지금은 비스트 슬레이어 때 사용하던 나노튜브 화살이 있어서 걱정은 없지만요.”
“마계에 들러서 쏴보고 와도 되는데? 메릴도 만날 겸.”
유리아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 그래도 돼요?”
“그래도 돼. 하지만 데리고 오는 건 안 돼. 메릴은 마기를 숨길 수 없으니 아델한테 들키면 큰일이 날지도 몰라.”
“만나서 친해지기만 하면 돼요. 정말 감사합니다...”
“당장 달려가고 싶겠지만 이번 주는 참아주고.”
“이번 주는 왜요...?”
“박사의 상태에 따라서 너와 세화를 연구실로 부를 생각이거든.”
고개를 갸웃하는 유리아.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로,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팔을 꺾어 유리아의 부드러운 볼을 만지작거렸다.
**
점심시간, 약속시간에 맞춰 박사와 만난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거짓말을 했다.
해외 출장이 잡혔다고 말이다.
“출장...?”
“응. 사흘 정도는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갑작스럽게 잡혔어. 회사를 크게 키울 기회야.”
“.....”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박사.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날 바라보던 그녀가 황당한 제안을 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무슨... 출장을 같이 가자고?”
“얌전히 있을게. 나랑 떨어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최대한 빨리 온다고 약속할게.”
“나 환청도 들리는 것 같단 말이야...”
“환청?”
조현병 증세가 오는가보군.
예전에도 낌새가 있긴 했는데 오늘 제대로 느낀 모양이었다.
“오늘 차 안에서 누가 말을 걸었어.”
“누가?”
“에, 에드워드...”
“누나 남편?”
“전남편...”
허어... ‘전’남편이라.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 같다.
“심했어?”
“예전에도 그랬는데... 그때는 짧은 환청만 들리고 금방 사라졌거든...? 근데 오늘은 달라. 마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어. 아니, 실제로 대화를 나눴어.”
“그래...?”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괜찮아졌지만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았어...”
들려오는 환청으로 대화까지 나누었다면 증세가 심각한 수준.
내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일단은 안심시켜줘야겠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집...? 일 남은 거 아니야?”
“누나가 힘들어하잖아. 돌아가서 집밥 먹자.”
“나, 난 좋은데...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긴 무슨, 표정에 뛸 듯이 기뻐하는 게 보이는구만.
“병원 갔다가 집 가자. 괜찮지?”
“벼, 병원...?”
“환청 같은 건 조현병 증상이야. 이거 꼭 치료해야 돼. 심각한 질환이잖아.”
“.....”
덜컥 겁을 집어먹은 박사.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그녀를 위로했다.
“정신과 가서 확인해보자. 만약 의사가 양성이라고 판단 내리면 출장을 미루는 한이 있어도 누나랑 같이 있을게.”
“그럼... 알았어...”
**
오랜 시간의 진료 끝에, 의사는 박사에게 조현병 양성 진단을 내렸다.
환각은 없지만 환청, 망상이 심해 중증으로 갈 수 있는 증세.
꾸준한 통원치료가 필요한 정도였다.
나는 울먹거리는 박사의 어깨를 감싸 약 처방을 받고, 병원비를 결제했다.
약국에서 약을 탄 나는 박사를 어르고 달래 차에 태웠다.
그녀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날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참고 있지만 당장에라도 구슬피 울 것 같은 표정.
그녀가 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 어떡해...? 진짜 조현병이었어... 다른 성격장애 위험도 있대...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나는 말없이 박사를 꼭 안아주었다.
내 포옹에 진정이 조금 됐는지 그녀의 떨림이 멎었다.
포옹을 푼 나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이 안 돼...? 난...”
“의사 말 못 들었어? 도파민이 과하게 분비되어 발생하는 병이라잖아.”
“그게 뭐...”
“내가 마약에 빠졌을 때 누나가 어떻게 했더라?”
슬쩍 힌트를 주자 박사의 안색이 밝아졌다.
“의, 의료기기... 거기 들어가서 도파민을 정상화시켰어.”
“그렇지? 지금 연구실에 들러서 치료받고 나오자.”
“응...”
“처방된 약 설명을 들어보니까 도파민 차단제래. 앞으로는 먹지 말고, 뭔가 요상하다 싶으면 곧바로 기기에 들어가서 확인해보자. 도파민은 의료기기가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알았지?”
“알았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나 때문에 누나가 이렇게 된 것 같아.”
“그, 그런 말 하지 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오랜 시간 홀로 지내다가 격정적인 연애를 시작하는 것도 도파민 수치를 높인다고. 전남편의 영향력이 너무 컸나봐... 다 그 사람 때문이야.”
박사는 나로 인해 조현병은 물론, C군 성격장애를 죄다 가지고 있게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박성, 의존성, 회피성 성격장애 말이다.
우울증의 위험성도 있겠지.
이에 대한 원인을 에드워드 파슨스로 향하게 하는 과정은 이미 진행될 대로 진행됐다.
조현병 발병의 원인으로 놈을 지목한 것이 그 증거. 아주 좋다.
나는 박사의 목 뒤를 약한 힘으로 주물렀다.
턱과 목도 살살 쓰다듬어주자, 박사가 마치 주인이 긁어줘서 기분이 좋은 강아지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 동안 그녀를 만져준 내가 말했다.
“반지는 주문했어?”
“응... 이틀 걸린대.”
“잘했네. 이제 연구실로 갈까?”
눈을 그녀가 반문한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서 떠나지 않을 거지? 네 잘못은 절대 없어.”
떠나다니.
아델라인을 떨어뜨린 후, 너도 권속으로 만들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라.
“영원히 함께 할게.”
그 말에 박사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감격에 겨워하던 그녀가 내게 고백했다.
“당신만 믿어요... 사랑해...”
당신이라니.
밋밋한 호칭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너무나도 요염하게 들린다.
앞으로 박사는 가치관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내게 맞추려 할 것이다.
남편의 조각상을 스스로 부서뜨리려고도 할 테지.
나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러자 박사가 내게 천천히 다가와 키스를 한 뒤, 자신의 손으로 내 입술을 닦아내주었다.
“립스틱 묻어서...”
“아쉽다. 먹으려고 했는데.”
장난스런 말에 박사가 풋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준 나는, 차를 몰고 연구실로 향했다.
박사를 의료기기로 들여보내 뇌 전체에 많이 분배된 도파민과 낮은 수치의 세로토닌을 정상화시킨 나는, 기기에서 나온 그녀가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후다닥 달려가 부축했다.
그녀를 휴게실에 앉힌 내가 쪼그려 앉아 물었다.
“어때?”
이마를 꾹꾹 누르던 박사가 대답한다.
“어지러워...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것처럼 느껴져.”
“다행이네. 출장은 취소할게.”
“그래도 돼...?”
“누나 지금 힘들잖아. 어쩔 수 없지.”
박사가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녀는 굳은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갔다 와도 돼.”
“왜?”
“치료도 했고... 오래 있다가 오는 것도 아니잖아. 너 없는 동안 일이라도 해서 집중해볼게. 디바이스의 골조를 만들기 시작하면 될 것 같아.”
나는 박사의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양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애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리인 보낼게. 당분간은 누나랑 같이 있을 거야.”
“.... 진짜?”
“진짜. 내가 아픈 누날 놔두고 어디 가냐?”
“난 네가 전화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됐어. 그냥 같이 있자. 치료도 같이 하고.”
“고마워...”
“그래도 정신병 극복은 누나 의지가 가장 중요해. 알지?”
단단한 상태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신념.
그걸 나한테 맞춰줘라.
내가 뭘 하든 수긍하고 복종해.
바뀌어가는 네 성격을 본연의 성격이라고 받아들인다면 편해질 거야.
“응...”
“집으로 돌아갈까? 오늘하고 내일은 푹 쉬면서 상태를 지켜본 다음 디바이스 제작에 들어가던지 하자.”
“알았어. 아, 그 전에... 잠깐만...”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상태를 체크해보았다.
어지럼증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녀가 후다닥 달려가 의료기기에서 무언가를 뽑아왔다.
아까 검사했을 때 보았던 검사결과지였다.
그걸 유의 깊게 살펴본 박사가 침울해했다.
“왜 그래?”
“먹던 피임약 효과는 의료기기 덕분에 다 없어졌는데, 가임기가 다음 주는 되어야 해서... 그리고 만약 배란일이 된다 해도 임신이 될지 안 될지...”
내가 출장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고, 힘을 보태주니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커진 모양.
사랑이 완전히 무르익었구나.
아이는 아주 많이 낳게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블 발키리 다섯과 사이좋게 임신해서 마왕의 아이를 낳도록 한 뒤, 마족 군단을 만들어볼까?
혈연으로 이루어진 군단... 괜찮네. 이렇게 가닥을 잡자.
나는 방긋 웃는 낯으로 박사에게 말했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마. 같이 노력하면 돼. 난 누나를 믿어.”
나긋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니 박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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