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66화 (166/471)

EP.166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딩-동!

잡음 하나 없는 초인종소리가 들리고 얼마 뒤, 실비아가 반가운 낯으로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둘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잖아.”

상냥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말투에 가시가 콕콕 박혀있었다.

어색한 웃음을 터뜨린 내가 대답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어요. 그간 잘 지내셨죠?”

실비아의 표정이 꿈틀했다.

약간 회의감이 섞인 내 표정을 보고 큰일이 났구나 짐작한 것이다.

그녀의 말투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살도 좀 빠진 것 같네.”

“하아... 말하자면 엄청 긴데, 들어가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알았어.”

집으로 들어간 나는 양손에 든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다놓았다.

그러자 실비아가 내용물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큭큭 웃는다.

“또 스파게티지?”

“맞아요.”

“아델 취향이 바뀌었어. 이제 스파게티는 입에도 안 대.”

“아... 그래요? 그럼 오늘 전화로 연락 드렸을 때 말씀해주시지...”

“그럴 걸 그랬네. 미안해.”

“아니에요. 그나저나 한국어가 많이 느셨네요. 이젠 통역기가 없어도 대화가 잘 되겠어요.”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상적인 대화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아델 씨는요? 어디 가셨나?”

“방에 있어. 휴대폰 게임하느라 정신이 팔린 상태야.”

나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아델뿐만이 아니라 실비아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자신은 안 하는 척이라니... 내 휴대폰에 결제 문자가 수백 건 날아왔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55만원 패키지, 33만원 패키지, 11만원 패키지... 이 외에도 날마다, 주마다 살 수 있는 건 전부 샀잖아.

적응을 잘 해도 너무 잘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수천만 원을 쓰고도 내게 미안해하지 않을 리는 없을 텐데... 화폐가치는 잘 모르는 건가?

아니면 내가 돈이 많은 걸 알고 있는 상태라 마구 사는 건가?

뭐가 됐든 나로선 다행이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는 원망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식탁에 앉은 나는 실비아가 물을 떠다주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잘 마실게요.”

“이제 말해볼래?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한동안 연락도 없었던 거야?”

물을 한 모금 가득 삼킨 나는, 시원한 날숨을 내뱉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냥 가감 없이 말했다. 연구실에서 기술 유출이 됐고,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범죄조직과 결탁해 기술 분석 후 국가를 전복하려고 했고, 그 와중에 난 누명을 써서 교도소에 갔던 것까지.

다만 여행을 갔다가 발견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정보를 수집해서 미국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두 사람의 디바이스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태평하게 여행을 갔다가 정보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뉴스에 나왔던 사람이 너였구나?”

“뉴스도 나왔었어요?”

“응. 세계연합의 정보로 인해 미국이 큰 도움을 받았다고, 그 와중에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냥 지나가는 뉴스였지만 기억하고 있었지.”

원래라면 대서특필이 되어도 모자랄 정도인데 지나가는 뉴스?

세계연합에서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었구나.

이건 내가 원하는 바였다.

내 정체가 드러나면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테니까.

뭐든 음지에서 일을 진행하는 게 낫다.

“그랬군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잠깐 디바이스 제작이 중지됐어요.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 당연히 널 구출하는 게 먼저지. 많이 힘들었어?”

“저보다는 박사님이 힘들어하셨죠. 지금은 둘 다 괜찮아요. 제작도 다시 착수할 거고요.”

실비아의 눈빛이 조금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생각하는 내 마음씨에 기꺼워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아델과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했었어.”

“어떤 말을요?”

“행성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두 사람은 불시착하자마자 내 추적용 마물을 없앴고, A급 마물과 싸웠다.

그런 일을 겪었던 만큼 앞으로 험난할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마물이 나타나질 않으니 허탈해할 만도 하다.

“그 타이라트라는 놈이 네 말대로 정말 숨어버린 것 같아. 우리야 기다리기만 하면 되고, 아이테르 에너지는 아직 충분해서 마물이 나타난다 해도 싸울 수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봐.”

평화에 안주하기 시작하는구나. 아주 좋은 징조다.

물론 마물이 나타나면 극도의 경계모드로 들어가겠지만.

“그럴 수야 없죠.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두 분이 가지고 계신 불안감을 해소해드리고 싶네요.”

“우린 정말 괜찮아.”

나는 민망해하는 실비아를 향해 방긋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내가 물었다.

“심심하셨을 텐데, 밖엔 나간 적은 있으세요?”

“편의점 외엔 없어. 그리고 아델이 네게 뭔가를 부탁하고 싶어 하는데... 거절해도 좋아.”

“뭔데요?”

“직접 들어봐. 불러올게.”

“아, 예.”

얼떨떨한 표정의 날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실비아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인데, 인간의 몸이라 청각을 집중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래도 참자. 곧 나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슬슬 지루해할 무렵.

덜컥!

안방 문이 열리더니, 내가 가르쳐준 머리집게로 머리를 올린 아델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걸어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지혁 씨!”

“안녕하세요. 잘 지냈죠?”

“네! 저는 잘 지냈어요!”

저도 모르게 아빠미소를 지은 나는, 이 작은 악마가 무슨 부탁을 할지 얼른 듣고 싶어졌다.

“부탁이 있으시다고?”

“네...! 근데... 실비아 언니가 그랬어요. 지혁 씨가 엄청 고생하셨다고... 그래서 그냥 다음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델.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말해보세요.”

“그럼... 말만 할게요... 절대! 절대 들어주지 마세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델은 항상 귀엽다.

행동거지부터 시작해서 말투까지 말이다.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신성력을 쓴다.

정화의 힘, 거기에 아이테르까지 사용한다면 비스트 슬레이어 중에서 가장 강하겠지.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괜찮죠?”

“아, 넷!”

긴장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아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저...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이런 소릴 할 것 같긴 했다.

항상 집, 편의점만 왔다 갔다 거리기엔 지구는 놀거리가 많았으니까.

매번 집에 있는 것도 지루했을 것이다.

TV 같은 매체에서 놀이공원에 대한 영상을 봤나보다. 그래서 흥미를 가졌겠지.

“처, 철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해요... 그냥 다음에... 지혁 씨가 안 바쁘실 때 데리고 가주시면 안 될까요?”

철없는 소리는 맞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진짜 정의의 편일 때의 이야기.

박사의 질투심도 더욱 키워놓고, 아델에게 나에 대한 호감을 쌓아올릴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나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실비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더러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말했다.

“지금 가서 맛만 보고 올래요?”

“맛이요? 음식 드시게요?”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한 채 그리 물어오는 아델.

실소를 터뜨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지금 놀이공원으로 가자는 뜻이었어요.”

“그, 그래도 돼요?”

“네. 박사님한테 말씀드려놓을게요.”

아델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고른 어린아이의 그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표정.

실비아의 대답은 당연히 승낙이었다.

“잘 다녀와.”

**

-아... 그래서 아델과 놀이공원에 가려고 한단 말이야? 실비아는 안 간대?

“집에 계시겠다고 하던데요. 사람 많은 곳은 별로래요.”

-단둘이 가는 거야?

“네.”

-그래... 잘 다녀와.

박사의 목소리는 약간 침울했다.

내가 아델과 단둘이, 박사와도 못 가본 놀이공원을 간다니 기분이 조금 상한 게 분명했다.

여기서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박사를 살살 긁어놓자.

“이만 끊을게요.”

-응. 올 때 연락 줘.

“네, 박사님.”

-.....

박사는 자신과 내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실비아나 아델이 몰라야 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이해는 하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날 독점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상태인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중에 살살 달래줘야지.

박사의 질투심이 놀이공원의 감시카메라를 해킹할 정도라면 금상첨화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괜찮다.

전화를 끊은 나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탄 아델은 정말 신이 나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안전벨트 매요.”

“아... 그렇죠. 죄송해요.”

아델이 황급히 벨트를 잡아당겨 클립을 버클에 끼웠다.

박사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큰 가슴 사이에 벨트 줄이 먹히면서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델은 자신이 의도치 않게 섹스어필을 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말이다.

흰색 무지 티셔츠, 그리고 끝단이 살짝 접힌 데님 핫팬츠와 쪼리.

간단한 패션이긴 한데 집게로 틀어 올린 밝은 금발머리와 조화를 이뤄 너무나도 청순해보였다.

이 순진무구한 처녀를 어떻게 공략하지? 정화가 무서워서 섣불리 건드리기가 힘들다.

안에 박는 순간 내 마기를 전부 태워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악셀을 밟은 나는 전방에 시선을 두고 아델에게 물었다.

“아델, 당신은 신을 모시는 신자죠?”

“맞아요! 정말 영광스럽게도 대리인이자 성녀로 간택되었답니다! 신님의 힘을 받았어요!”

“그 신님의 신성력으로 악을 정화하는 건가요?”

“네!”

“멋진 힘이네요.”

“그렇죠!? 헤헤...”

아델이 모시는 신은 내 대척점에 서있는 존재 같은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만약 어디든 볼 수 있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대리인을 내세우지 않고 직접 강림했을 테니까.

괜히 과대평가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과소평가를 하지도 말아야겠지.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더 캐려면 캘 수 있으나, 아델은 집으로 돌아가면 실비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할 거다.

그리고 실비아는 아주 냉철한 년이다.

내가 아델에게 정보를 많이 얻어갔다는 걸 들킨다면 기껏 쌓아놓은 신용이 무너질 우려가 있을 테니까 참자.

나는 이대로만 하면 된다.

호감도를 쌓아놓으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근데 놀이공원은 갑자기 왜 가고 싶었던 거에요?”

그 말에 아델이 쑥스러운 듯, 자신의 양손을 허벅지 사이에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정말 재미있어보여서요... 너무 가고 싶었어요...”

“다음번엔 실비아 씨와 두 분이서 가보세요.”

“저, 저희 둘이서요? 멀리 외출해도 돼요?”

“당연하죠. 거기가 무슨 감옥도 아니고... 애초에 막은 적도 없는데 가만히 있었던 건 두 분이었어요. 대신, 편의점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면 외출하실 땐 저한테 꼭 말해줘야 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장 달려가야 하니까요.”

“넷!!”

정말 기뻤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

귀가 잠시 멍해진 나는 머리를 짧고 빠르게 흔들었다.

목청 한 번 더럽게 크네.

“지혁 씨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다행? 나중에도 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보자.

박사를 공략한 다음은 너야.

네 신성력이 어둠으로 물들면 다른 비스트 슬레이어를 타락시키는 일이 수월해질 것 같거든.

“볼 때마다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 같아서 좋네요.”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나중에 세화 씨랑 유리아 씨를 만났을 때 빨리 친해지려구요!”

“조만간 자리 한 번 만들어볼게요.”

“알겠습니다! 근데 저 롤러코스터 먼저 타도 돼요? 그걸 가장 타보고 싶었어요!”

나는 신나선 발을 구르는 아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해요.”

놀이공원에 가면 아델이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즐겁게 해줘야겠다.

오늘은 아델이 모시는 신에 대한 정보도 작게나마 얻었고... 내게 아주 큰 행운이 따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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