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5 박사의 속을 썩이는 나 #2
“이 걸레 같은 년아!”
옆에서 들려오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
눈을 뜬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는 씩씩대고 있는 박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히죽 웃었다.
“누나...?”
그 말에 박사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난, 끝나지 않은 약효 때문에 아직까지 행복감에 젖어있는 보영을 한쪽 발로 밀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풀린 눈을 한 채 박사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야...! 지금 뭐하는...”
“누나... 진짜 사랑해요... 난 누나 없으면 안 돼...”
박사는 내 진심 어린 고백에 황당한 듯 헛웃음을 켰다.
“그런 놈이 다른 년이랑 자냐...? 하지 말란 마약까지 또 하고?”
“미안해요... 참을 수가 없었어... 좋은 거 있다고 하길래...”
“그럼 이건... 네가 구해온 게 아니라 저년이 줬다는 거야?”
“그게... 그...”
“됐어. 말하지 마.”
단호한 투로 내 말을 끊은 박사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보영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취해있던 보영이 움찔한 채로 벌벌 떨 만큼 무서운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보영이 더 곤란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누나 오늘 화장했네? 예쁘다...”
“안 통해. 저리 가.”
“싫어요.”
박사는 어린아이마냥 투정을 부리는 내 뒤통수를 약한 힘으로 툭 쳤다.
보영의 뺨을 지독하게 때린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반응.
다른 여자와 잤다는 증거가 있는데도 이럴 정도면... 내 죄가 그렇게까지 크진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내 목 뒤를 쓰다듬어주던 박사가 말한다.
“지금 치료받으러 가자.”
“치료...?”
“그래. 의료기기에 들어가서 다시 몸을 정상화시켜야 돼. 저번처럼 안 받겠다고 하지 마. 투정부리지도 마.”
지금 자신은 무척 화가 났으니, 기분에 맞추라는 뜻이었다.
“알았어요...”
“차 끌고 왔지? 어디 있어?”
“지하주차장에...”
“차키 어디 있냐고 이 멍청아.”
“아, 잠깐만...”
박사의 허리를 잡은 손을 푼 나는, 책상으로 움직이면서 보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려놓았다.
마치 여자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내 모습에 박사가 다시금 분노하려고 했지만, 약효가 아직 돌고 있다고 판단해서였는지 가만히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차키를 든 나는 박사의 앞으로 가서 그걸 뱅글뱅글 돌렸다.
“운전은 내가 할까요? 나 지금 상쾌한데...”
“웃기는 소리 말고 내놔. 방금까지만 해도 헤롱거리던 놈이...”
“그건 자다 깼으니까 잠결에 그런 거지...”
“내놓으라고 했어.”
“알았어...”
나는 순순히 박사가 내민 손에 차키를 쥐어주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던 박사는, 손가락으로 보영을 가리키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내게 말했다.
“저년도 데려와.”
“어...? 연구실 가려고요...? 보영 씨도 치료하려고?”
“이대로 놔둘 순 없잖아. 쟤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으니까 내 말대로 해.”
“알겠어요. 잠깐만... 이거 정리 좀 하고...”
나는 보영에게 그녀의 옷들을 대충 던져주고는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자리를 치우는 내 모습에, 박사는 다시금 화딱지가 올라왔는지 이마에 손을 짚었다.
**
“몸은 괜찮아요?”
박사의 말투는 점잖았지만, 얼굴은 명명백백하게 화가 나있었다.
의료기기에서 치료를 마친 뒤, 연구실 안에 있는 휴게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보영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박사가 물었다.
“채보영 씨죠? WW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아까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는데... 맞죠?”
“마, 맞아요...”
“정말 착하고 실력도 좋은 가수라고 평가가 자자한데, 왜 그런 선택을 했어요? 마약은 한국에서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잖아요. 들키면 가수생활은 물론이고 인생마저도 파탄이 날 텐데?”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흐윽...!”
금세 눈물을 터뜨리고는 훌쩍거리기 시작하는 보영.
휴게실 안마의자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내가 생각했다.
보영의 연기력이 아주 훌륭하다고 말이다.
박사는 티슈를 몇 장 뽑아 보영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그걸 공손히 받은 보영은,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고는 사정을 설명... 아니, 사전에 입을 맞춰놓은 거짓말을 했다.
“두 달 전에 힘든 일이 있어서...”
“힘든 일?”
“그때 미니 앨범을 냈는데... 제가 원하는 음악적 특색이 들어있는 대표곡보다 소속사가 대중들의 입맛에 끼워 맞춰서 낸 곡이 쭉 1위에 올랐었어요... 그때 제 음악성이 부정되는 기분이라 많이 힘들었어요...”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자신이 묻히고 싶은 음악적 특색이 있는데, 대중들은 상업용으로만 만든 곡을 좋아해서 힘들었다... 이거네요?”
“마, 맞아요...”
예술 쪽에서 특히나 이런 경향이 많이 발생한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성보다는, 그냥 한순간에, 취미로 휘갈긴 그림이나 작곡한 음악이 더 유명세를 얻는 일은 역사적으로만 봐도 수두룩하다.
그로 인해 자괴감을 느낀 예술가가 마약에 빠진 사건도 아주 많다.
현대에서도 심심하면 이런 사건이 터져 나오는 판인데, 박사도 보영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겠지.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이해는 하지만 보영 씨는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들키면 잘못될 걸 알면서도 마약에 손을 댄 건 정말... 게다가 혼자만 한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을 끌어들였잖아요.”
“죄송합니다... 그... 지혁 씨도 힘들다고 하시길래...”
흠칫한 박사가 날 바라보았다.
나는 TV로 시선을 돌리면서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고 말이다.
박사는 이 상황이 정말 착잡한지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보영을 향해 물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는 알아요?”
“잘 모르겠어요... 약간 과학 연구소 같은 느낌이에요...”
“계속 몰라야 돼요. 오늘 여기 왔던 일은 기억에서 잊어요.”
“.... 네...”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료를 해준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절대, 절대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몸은 정상이에요. 이젠 미칠 정도로 마약이 그립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마약을 했던 쾌락은 보영 씨의 뇌리에 남아있어요.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지는 의지에 달려있는 거에요. 보영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말리진 않겠지만, 만약 다시 한 번 마약에 손을 댄다면 이번엔 치료해주지 않을 거에요.”
“네에... 정말 감사합니다...”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보영을 잠시 주시하던 박사는, 결국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상황을 끝냈다.
아쉽다.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안 하다니.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지혁이 너는 여기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의 말이었다.
“알았어.”
**
보영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박사는, 과자를 씹어 먹으며 TV를 보고 있던 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쏘아보았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박사를 향해 말했다.
“귀걸이도 했네?”
“입 다물어.”
“예쁘니까 칭찬한 건데?”
“지금 그런 소리가 태연하게 나오니? 모르는 여자랑 잔 주제에?”
“그건 정말 미안해요. 약을 하니까 성욕이 막... 솟구치더라고... 참을 수가 없어서...”
“하아...”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있던 박사가 내 앞으로 와서 쪼그려 앉았다.
오늘 그녀가 입은 베이지색 H라인 미니스커트, 그 안에 있는 허벅지 사이로 하늘하늘한 속바지가 보이...
“이상한데 쳐다보지 말고 나 봐.”
“응.”
난 순순히 박사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주시했다.
얼마간 나와 눈싸움을 하던 박사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지혁아, 보영 씨가 그랬었잖아. 너도 힘들었다고... 나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 그럼 뭔데?”
“.....”
“난 너한테 솔직하고 싶어. 물론 거짓말을 했던 전적이 있지만...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있어. 그러니 네가 어떤 말을 하든 솔직하게 답할 거야.”
정말? 추적기를 깔아놨다는 걸 물어봐도 네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너한테 ‘내가 그 건물에 있던 걸 어떻게 알았어요?’ 라고 말한다면 아주 곤란해 하겠지.
하지만 이건 넘어가줄게. 큰 거 한 방 터뜨릴 때 같이 터뜨릴 예정이니까.
오늘은 박사의 마음을 확고히 하게 하는 걸로 끝내자.
나는 박사의 왼손을 잡아 내 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곤 약지에 끼인 반지를 손가락으로 잡아 좌우로 밀면서 천천히 빼냈다.
그때까지 박사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변화도 없었다. 내가 뭘 하든 가만히 있겠다고 각오한 듯했다.
오랜 시간동안, 뜸을 들이며 박사의 결혼반지를 빼낸 나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어놓은 뒤 그녀의 약지에 남아있는 반지자국을 쓰다듬었다.
“이거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
“쪼잔하다고 생각하지 마요. 나한테는 큰일이었으니까.”
그 말에 박사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내 등을 천천히 두드리던 그녀가 말한다.
“널 만나고 나서부터 이상한 일을 겪어.”
그녀의 포옹을 풀어낸 내가 물었다.
“뭐가요?”
“내 가치관이 마구 흔들리는 느낌이야. 이번 일만 봐도 그래. 보영 씨는 정말 선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나쁜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망가질 뻔했지. 너도 마찬가지고.”
“.....”
“세상도 그래. 마물이라는 공통된 적이 나타났을 땐 적극적으로 뭉치더니... 조금만 평화로워지니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우리 무기를 파헤쳐서 이용하려고 했고, 다섯 개 주에서 미국을 전복하려고 했지. 실제로도 가만 놔뒀다면 미 정부는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심지어 네게 누명까지 씌웠어. 말이 돼?”
그래, 지금 이 지구는 나쁜 놈들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지.
정당하게, 착하게 살아가려는 인간들은 만연한 혐오와 폭력, 부패에 학을 떼고, 영향을 받아 변한다.
이게 다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다.
지금 내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박사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박사는 언제나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뒈진 에드워드 파슨스가 남긴 유산.
이 유산은 박사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그녀와 깊게 동화된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와 있으면서 여러 안 좋은 사건들을 접하니까, 사랑하는 내가 큰일을 겪으니까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계속 여러 사건을 일으키면서 박사의 마음속에 자리한 에드워드 파슨스의 조각상을 박살낸다면, 그녀가 내 패도에 동화되는 건 시간문제다.
아니, 사실 지금도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사랑해 마지않던 에드워드 파슨스, 그와의 결속의 상징이었던 반지를 빼낸 것이 그 증거.
이제부턴 가속을 붙여야지.
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자, 박사가 화제를 바꿨다.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할까? 집에 돌아가서 푹 쉴래?”
“네... 그리고 누나.”
“응?”
“속 썩여서 미안해요.”
죄책감이 가득한 내 사과에, 박사가 너그러움과 씁쓸함이 섞인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괜찮다고는 못하겠어. 오늘 나도 엄청 상처받았거든.”
“알았어요.”
“돌아가자. 운전은 내가 할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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