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57화 (157/471)

EP.157 밑바닥 인생

따악-!

경쾌한 소리의 배트 타격음.

관중들의 함성을 엔진삼아 쭉쭉 뻗어나간 야구공은 외야석 중앙에 떨어졌다.

홈런볼을 잡은 사람은 젊은 성인 남자.

그는 홈런볼을 줍지 못해 울먹거리고 있는 어린 꼬마아이에게 흔쾌히 공을 내어주었다.

보기 좋은 광경.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중앙석 위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박사가 방긋 웃더니, 내게 고개를 돌리면서 묻는다.

“어때?”

“훈훈하네요.”

“그치? 사람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존재야. 다양한 성향을 갖고 있는 만큼, 부대껴서 살다보면 여러 일이 일어나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뾰로통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말라는 거지. 그리고 넌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언제나 현명하고, 친절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 지금은 잠깐 스트레스를 받아서 짜증이 났을 뿐이라고 생각해.”

난 말없이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품으로 당겨왔다.

그러자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박사가 말을 잇는다.

“미술관 앞에서 사진을 찍어준 할아버지도 좋은 분이셨잖아. 대가 없는 선의를 보여주셨고, 덕분에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거고.”

그건 아닌데... 사진은 그냥 기폭제가 되었을 뿐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도 넌 나한테 왔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난 그렇게 생각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불지? 당장 박고 싶게.”

“.... 경기 볼까...?”

“그래요.”

우린 지금 미국으로 여행을 온 상태.

호텔을 잡아놓고 연고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MLB 팀의 홈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야구장.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박사의 단발머리가 흩날리며 신비스런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얼마 후, 점수판 옆에 있는 큼지막한 스크린에 박사의 모습이 잡힌다.

홈런을 때렸을 때 시큰둥한 표정의 날 껴안으며 환호하는 장면.

벌써 3번째였다. 지금쯤 인터넷에서 미모의 여자 관중으로 화제가 되고 있겠지 아마.

핫도그를 입 안에 쑤셔 넣고 빠르게 씹어 삼킨 내가 말했다.

“돌아갈까요?”

“벌써? 아직 7횐데?”

“경기결과는 이미 나왔잖아요. 8:0인데 역전은 불가능해요.”

“그러지 말고 같이 보자...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라는 말도 있잖아. 공이 둥근 이상 경기는 모르는 거야.”

“오늘따라 기분이 좋나보네? 알았어요.”

“당연히 좋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너랑 함께 있는데.”

나중엔 생각이 많아질 걸?

여행 도중, 그리고 이후로도 여러 일들이 일어날 테니까.

**

재수가 옴 붙은 날이 있다.

그날따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운이 좋지 않은 날.

내게... 아니, 박사에겐 그날이 오늘이었다.

야구경기가 끝나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 상대방과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범퍼가 약간 찌그러질 정도의 약한 사고. 평소였다면 보험을 부르거나 그냥 괜찮다고 하며 보내줬을 터였다.

하지만 박사는 분개하고 있었다.

“아니! 그쪽에서 먼저 잘못한 게 명백한데 사과를 해야지, 왜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거에요?”

사고를 일으킨 차주의 태도가 너무나도 싸가지 없었기 때문.

꼬장꼬장하게 생긴 중년 백인은 박사의 타박을 듣고도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웃기는 소리. 내가 먼저 나오려고 했는데, 먼저 나온 너희들이 잘못한 거지.”

“무슨... 그럼 지금 빈정이 상해서 우릴 일부러 받았다는 뜻인가요? 장난해요!?”

“일부러? 아니지. 너희가 양보를 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어.”

세상에 미친놈은 많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기가 찬 박사가 헛웃음을 켰다.

“어처구니가 없네. 당신 혹시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 읍!”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박사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중년인에게 말했다.

“범퍼 상태가 양호하네요. 많이 찌그러지지도 않았으니까 말다툼은 여기까지 하죠.”

“그냥 가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

“예. 그겁니다.”

“경찰이나 보험사는 안 부르고?”

“바빠서요.”

“그러시던가. 고마운 청년이로군.”

난 다시금 욱해 나서려는 박사를 만류하고, 그녀를 조수석 안으로 쑤셔 넣다시피 했다.

이후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지혁아! 지금 경찰 안 부르면 반납할 때 다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왜...”

“미친놈은 상대하면 안 돼요. 특히 미국의 미친놈은 그냥 피하는 게 낫다고 봐요. 누나가 더 잘 알 텐데?”

총기가 자주 보이는 나라고, 가끔 굵직한 사건도 터져 나오니 피하는 것이 맞았다.

사실 여기서 더 싸운다 해도, 폭력사태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간다고 해도 저 중년인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못한다.

왜냐? 저 중년인은 마르셀라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장한 마르셀라.

“그, 그건 그렇지만... 너무 억울하잖아... 진짜 화나.”

여태까지 성향이 어쩌니, 잠깐 짜증났을 뿐이라느니 하며 너그러운 척했으면서, 네가 당하니까 화딱지가 나냐?

내로남불의 끝판왕이로구만. 역시 나랑 잘 어울려.

“참아요.”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누나.”

낮게 깔리는 내 목소리에, 박사가 황급히 말을 정정한다.

“아, 알았어... 참을게...”

박사의 불운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호텔로 돌아가 세탁물을 찾는데 얼룩이 져있거나, 사흘 치를 계산해놓았는데 이틀 치가 계산되었으니 추가요금을 내라고 듣거나, 바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저질 멘트로 작업을 거는 남자가 접근하거나.

마르셀라는 여러 사람들로 변장하며 그러한 사건들을 일으켰다.

아, 마지막에 작업을 건 놈은 마르셀라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박사는 3일 동안 하나하나씩 뜯어보면 매우 사소한, 그렇지만 쌓이면 짜증이 날 만한 일들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의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짜증은 상당히 내긴 했지만 말이다.

원래는 작은 사건들을 통해 양념을 치고, 잘 재어졌다고 생각이 될 때쯤 한 방 크게 터뜨리려고 했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며 박사의 정신을 서서히 피폐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사의 정신력과 성숙한 가치관을 과소평가했다.

그래, 박사의 가치관은 내게 맞춰져가고 있는 거지, 아직 맞춰진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허접한 짓거리는 쓸모가 없었다.

아니, 있기야 하겠지만 박사가 유의미할 정도로 피폐해지는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가?’

양념을 치는 일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큰 것만 빵빵 터뜨려버린다면 어떨까?

그래야겠다. 그냥 큰 파도로 몰아치는 게 낫다고 본다.

널찍한 창문을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나는, 속옷 차림의 박사가 생수병을 가져오자 상체를 일으켰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생수를 받아든 내가 대답했다.

“그냥. 체크아웃하기가 너무 귀찮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그래? 그럼 여기 더 있을까? 아직 못 가본 곳도 많은데... 더 있다가 옮기자.”

“여기 묵는 거 엄청 싫어했잖아요.”

“그건 맞아. 요즘은 개나 소나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장사하나봐.”

“많이 화났구나?”

“서비스의 기본조차 안 되어있는 직원들이 사방에 깔렸는데... 너 같으면 화 안 나? 아무래도 나한테 마가 꼈나봐.”

어떻게 알았냐? 그것도 그냥 마가 아니라, 아주 지고지순한 마가 꼈지.

순수악 그 자체란다.

낄낄거린 나는 생수를 들이켠 뒤, 뚜껑도 닫지 않고 방바닥에 휙 던져놓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카펫을 적시는 물.

박사가 화들짝 놀라더니 날 나무란다.

“애도 아니고 왜이래?”

“소심하게 복수해주는 거지. 그나저나 살 빠진 거 보기 좋아요.”

박사의 배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그리 말하자,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그래?”

“응. 그리고 렌즈 낀 것도 괜찮긴 한데, 누나는 안경이 더 어울려요.”

“지금 안경 끼고 있잖아.”

“밖에 나갈 때 끼지 말라는 소리였어요.”

“그건 내 맘인데...”

난 박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잡고 내 아래로 깔아뭉갰다.

“요즘 왜 자꾸 말대꾸해요? 혼날래?”

“.....”

박사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희열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빛.

어디 혼낼 테면 혼내보라는 느낌을 팍팍 풍겼다.

그럼 바라는 대로 혼내줘야겠지.

**

그날 새벽.

세 번의 섹스로 박사를 완전히 보내버린 나는, 그녀가 곤히 잠든 틈을 타 호텔을 나왔다.

이후 인적이 뜸한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비밀기지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아주 조용히 포탈이 열리더니 민지로 위장한 마르셀라가 튀어나왔다.

“마왕님, 부르셨어요?”

“그래, 사흘간 박사를 괴롭히느라 수고가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아...”

금세 뜨거워진 마르셀라의 숨결.

얘는 칭찬만 해줘도 이런다니까.

저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마르셀라가 저럴 때마다 당장 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지금도 같은 마음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참자.

잠이 얕은 박사가 깨서 날 찾기 전에 마르셀라에게 명령을 하달해놓아야 한다.

“마르셀라.”

“네에... 마왕니임...”

“네게 일을 하나 시키고자 한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

“넷! 말씀만 하셔요!”

금세 의욕적인 모습으로 바뀌고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던 내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오늘 안으로 세계연합 데이터베이스에 은밀히 정보를 하나 끼워 넣어라. 박사가 찾아볼 수 있게끔.”

“정보라 하심은...?”

“미국 어딘가에서 미래과학기술이 유출되어 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정보. 예전 후지산에서 샤벨 타이거가 나타났었을 때, 레오나가 사용했던 집속탄 하나가 불발됐고, 그걸 일본의 야쿠자가 주워 연구하다가 도저히 분석이 안 되어 미국의 메이저급 범죄조직에 팔았다... 정도로 살을 붙이면 되겠군.”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증거도 필요하시겠지요?”

“정확하다.”

“준비해놓고 연락드리겠사와요.”

박사는 최근 매일 아침마다 세계연합의 소식을 살폈다.

혹시나 사건이 생기면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연구실에 가지 않으니 심란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푸는 것이다.

그녀가 중점적으로 보는 건 굵직한 정보들.

난 이를 이용해 시리아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도록 할 생각이었다.

다만 비슷하다뿐이지 똑같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 봉인한 마기를 해제해야겠다.”

“네...? 그건 왜... 아델라인이 눈치챈다면 어쩌시려구요?”

“앞으로 벌어질 일은 인간의 몸으론 많이 위험하거든. 그리고 아델은 지금 의정부에 있으니, 힘을 많이 쓰지만 않는다면 네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 말에 마르셀라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가 말한다.

“위험하다니요? 제거할 대상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박사가 인류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언질을 살짝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대비해야 되니까...”

“교도소에 가고자 한다.”

그 말에 마르셀라의 큼지막한 눈동자가 두 배는 더 커졌다.

“네에...!? 교, 교도소요...?”

“그래.”

밑바닥 인간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나도 밑바닥 인생이 되어볼 생각이다.

박사야... 이건 네 잘못이야.

네가 굳건하니까, 내가 피폐해진 다음 널 끌고 올 수밖에 없잖아.

오늘부터 넌 어마어마하게 큰일을 연속적으로 겪게 될 거다.

나는 가짜로 떨어질 테니, 너는 진짜로 떨어져라.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마르셀라를 향해 방긋 웃어준 내가 생각했다.

‘이래도 네 정의로운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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