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6 오디션 계획 #2
“안녕하세요... 대표님.”
여전한 미모를 자랑하는 채보영의 공손한 인사.
패션기업 사장실에 앉아있던 나는 탁상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보영이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잘 지냈지?”
“네, 대표님.”
두 번째 만남이지만 정말 탐난다.
너무 빨리 물들였나 싶을 정도로.
그냥 참자. 아직 내 지구정복계획은 한참 남았다.
보영에게 눈을 돌릴 시간 같은 건 없어.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신곡은 잘 돼가?”
“네... 녹음은 다 끝났어요.”
“그러면 장기휴가 받아서 미네소타에 다녀와. 거기서 사람 한 명 찾아.”
보영은 WW엔터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런 그녀가 쉬고 싶다 한다면 대표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터.
보영이 대답했다.
“알겠어요. 누굴 찾으면 될까요?”
“스텔라 헤일리. 사진하고 주소 보내줄 테니까 혼자만 봐. 방법은 두 가지 중에서 네가 원하는 걸로 선택해. 개인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던가, 아니면 우연찮게 스텔라를 발견한 척하고 실력을 본 다음, 후계자를 찾았다면서 데리고 오던가.”
“만약 오디션을 연다고 하면... 합격자는 스텔라 헤일리 한 명뿐인가요?”
“맞아.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네가 생각해서 결정해.”
“알겠습니다...”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하는 보영을 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스텔라를 굳이 WW엔터 소속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 멋대로 휘두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를 고민해보던 나는,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보영아.”
“네?”
“네 매니저는 경력이 얼마나 됐지?”
“오래 됐어요. 저랑 데뷔 때부터 함께 해왔던 사람이에요.”
“그럼 살살 꼬셔봐. 소속사 하나 차리자고.”
“소, 소속사요...?”
“그래. WW엔터는 나올 준비하고, 너랑 매니저랑 알아서 잘 상의해봐.”
보영이 침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겁이 덜컥 나는 모양. 하지만 이내 곧 침착하게 돌아온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히죽 웃은 내가 말을 이었다.
“너는 늦게 나와도 되는데, 매니저는 최대한 빨리 나오도록 만들어. 필요한 건 전부 아람이한테 말하고... 스텔라가 새로 차린 소속사에 소속될 수 있게끔 해.”
“알았어요.”
“오늘 스케줄 있어?”
“저녁에 예능 출연이 있어요. 화보 촬영도 해야 되고...”
난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점심, 박사는 내가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구색을 맞추려면 한두 시간 정도는 버텨야 한다.
나는 탁상에 놓인 리모컨을 조작해 문을 죄다 닫았고, 커튼까지 쳤다.
누가 봐도 음흉한 짓거리를 하겠다는 뜻.
이런 내 행동에 보영의 눈이 희열로 젖어갔다.
“매니저한테 밥 먹고 오라고 해.”
“아, 네...!”
**
보영과 거사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차 안에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차례 울리기도 전에, 박사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다.
-지혁아, 회의 끝났어?
내 연락을 기다리느라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역시 귀엽다니까.
“끝났어요. 누나는 지금 어디야?”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뭐 사갈 거 있어?
“없어요. 의정부엔 들렸어요?”
-응. 생필품 사서 갖다 줬어.
“그랬더니 뭐래?”
-똑같지. 고맙다고...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냐고...
말투에서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실비아가 디바이스 제작상황을 물어봤구나. 박사는 순탄하다고 대답했을 테고.
죄책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예전만큼은 아니겠지.
그거면 됐다.
“알았어요. 지금 어디쯤이에요?”
-너보다는 늦게 도착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그... 당연히 넌 서울에서 일을 보니까... 난 방금 의정부에서 출발했거든.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으로 내 위치만 보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대답을 한 거지?
익숙함이란 게 참 무서운 거야.
내 입장에선 참 고마웠다.
왜냐? 계속 건수를 주니까.
“그래요? 음...”
-왜...?
약간 미심쩍어하는 말투를 해주니 박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러게 누가 제 발 저리래? 자승자박이야.
“아니에요. 나 거의 다 도착했는데, 얼른 와요.”
-금방 갈게. 짐 있는데 마중 나와 주라. 비 맞기 싫어.
“도착하기 2분 전에 연락해요 그럼.”
-알았어. 사랑해.
“나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에게 연락이 오자 킥킥 쪼갰다.
플라잉 택시를 탄 것도 아니면서, 의정부에서 이토록 빨리 돌아온다고?
아무리 내가 보고 싶어도 그렇지...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추적기를 빨리 찾아내고 싶어지잖아.
우산을 들고 나온 나는 현관문에서 1, 2분가량 서있었다.
얼마 뒤, 멀리서 고급 세단이 제법 빠른 속도로 오다가, 속도를 줄이며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차의 시동이 꺼지자 운전석 쪽으로 갔다.
잠자코 우산을 들고 있으니, 박사가 환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준 나는 놀라고 말았다.
“머리... 너무 많이 자른 거 아니에요?”
박사의 기다란 머리가 단발이 되어있었기 때문.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짧아졌다.
끝부분에 웨이브가 들어간 펌. 좌우가 비대칭인 양쪽 옆머리도 포인트였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숙미를 물씬 풍겨서 기존보다 훨씬 나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랬어요?”
“그냥... 기니까 답답해서. 어때...?”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한 박사의 물음이었다.
“예뻐요. 진짜로. 진작 자르라고 할 걸 그랬네.”
“그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박사.
난 그녀의 손에 들린 수트케이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손에 든 건 뭐야? 정장인가?”
“응. 네 거. 맞춤이야.”
“내 거라고요? 게다가 맞춤이라니... 핏은 어떻게 알고?”
“그야 당연히 알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박사가 부끄럼을 탔다.
괜히 장난기가 든 나는 그녀의 뽀얀 목을 지그시 쓰다듬었다.
“몸을 많이 섞어봐서?”
그 말에 박사가 아랫입술을 오므리더니, 주먹으로 내 가슴을 쳤다.
애정 어린 펀치에 낄낄 웃은 나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장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머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본 박사가 내게 케이스를 내밀며 말한다.
“한 번 입어봐.”
“귀찮아요. 아니 근데 왜 사왔대? 정장은 많은데...”
“앞으로는 내가 사준 걸로 입어. 얼른 입어보라니까? 전체적으로 한 번 보자. 혹시나 사이즈가 안 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아... 의상마저도 관리하려고 하다니.
너무 좋아. 짜릿해 죽겠다.
“나중에 일 나가기 전에 입어볼게요.”
“그냥 입어주지...”
“그럼 오늘 자기 전에 입을게. 이러면 괜찮죠?”
“응...”
나는 박사의 허리를 확 잡아 끌어당겼고, 그녀의 이마부터 시작해서 턱까지, 온 얼굴에 키스를 했다.
이런 애정표현에 좋아라하던 박사는 날 조심스레 밀어냈다.
그리곤 핸드백에서 액자를 하나 꺼내 TV 선반 위에 두었다.
손바닥 두 개만한 크기의 액자.
뭔가 싶어 선반에 가까이 가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액자 안에는 저번에 미술관 입구에서 할아버지가 찍어준, 나와 박사의 보기 좋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허어...’
미치겠다. 너무 사랑스러워.
뚫어지게 액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하는 내게, 박사가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묻는다.
“이래도 괜찮아...?”
“뭐가요?”
“액자... 이렇게 놔둬도 괜찮냐고... 싫으면 바로 치울게...”
난 말없이 몸을 돌려 박사를 꽉 끌어안았다.
한참 그렇게 있으니, 내 어깨 위에서 박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구나. 예뻐 죽겠다 진짜.
즐거운 마음으로 사상주입을 할 수 있겠어.
**
[다음 세계 소식입니다. 한국시간으로 어제 오전, 영국 프로축구 심판의 집에 괴한이 침입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범인은 한 훌리건으로, 축구경기가 이뤄지는 도중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불리한 판정을 받자 앙심을 품고……]
인간은 긍정적인 일보다 부정적인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 박사만 봐도 그렇다.
“진짜 미쳤나봐... 어딜 가나 과몰입하는 극성팬들이 문제네.”
진심으로 혐오스런 표정으로 TV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다.
그녀의 옆에서 묵묵히 뉴스를 지켜보던 내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인간이 문제죠. 폭력만 남은 존재잖아.”
그에 박사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인간이 문제라니... 훌리건 뉴스에서 너무 나간 거 아니야? 그리고 폭력성은 사람의 자연스런 감정 중 하나야. 나도 네가 떠났을 때 엄청 화가 나서 TV도 부쉈잖아.”
“비교가 잘못됐잖아요. 누나는 누나 나름대로 잘 절제한 거야. 게다가 혼자 있었으니까, 애초에 폭력적인 성향이 아니니까 그 정도로 끝난 거에요.”
“그런가?”
“저 인간들은 애초에 싸우려고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이에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고 할 생각 따윈 전혀 없는 야만인들이죠. 지구엔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지혁아... 너무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법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박사는 세화와는 달리 이런 쪽으로 틈이 별로 없다.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
이건 에드워드 파슨스로 인해, 그리고 박사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만들어진 믿음이었고,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박사는 날 매우 사랑하고, 신뢰한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도 모두 내게 맞춰져가고 있는 상태.
지금은 단단하다 해도 인간의 밑바닥을 직접 보여주고, 나나 박사가 피해를 입는다면 생각이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나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의미부여가 되는데 어떡해요? 게다가 법?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루에도 살인, 교통사고 등으로 사람이 십만 명 이상 죽어나가는 지구에요. 평화로운 지금인데도 그 숫자가 크죠. 여기서 전쟁이 터진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역사적으로 봐도...”
박사가 내 말을 끊으며 치고 들어왔다.
“지혁아, 이런 식으로 토론하고자 하면 끝도 없어져. 진정하자, 응?”
“알았어요. 오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갑자기 욱했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회의 중간에 어떤 병신이 주제도 모르고 까불어서 짜증났어요.”
원초적인 욕설에 놀란 박사가 멍해졌다.
잠깐 그러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그녀가 나긋한 말투로 말한다.
“진짜 짜증났겠다...”
나는 실소를 터뜨리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놈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짜증났겠다고요? 그냥 공감해주려는 거죠? 날 위로하려고.”
“아냐. 넌 젊은 나이에 능력도 있잖아. 그런 너한테 질투가 난 그 사람이 괜히 트집을 잡았겠지... 분명 그럴 거야. 세상엔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어가면 어때?”
“방금은 인간을 변호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뭐에요?”
“그건... 난 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아, 그리고 왜 아까부터 사람이라고 안 해?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 인정이 없어 보이잖... 꺄악!”
내게 덮쳐진 박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내려다보던 내가 말했다.
“누나.”
“으응...?”
“누나도 다른 인간들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무슨... 소리야...?”
“남편을 잊지 못하는 주제에 날 사랑하고 있잖아.”
“아, 아냐! 난 지금 너만을... 읍!”
내 손에 입이 막힌 박사의 목이 꿀렁였다.
긴장한 모양이지?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잠시 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나만을 사랑한다고요?”
박사가 허겁지겁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허, 또 거짓말을 하다니. 혼나려고 감히...
“그 실좆은 완전히 잊은 거에요?”
“.....”
“거 봐. 아니잖아. 그런데 나만을 사랑한다는 말이 나와요? 또 거짓말했네?”
“.... 아오해어...”
입이 막인 상태로 웅얼거리는 박사.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내가 물었다.
“잘못했다고요?”
“느헤...”
“잘못한 걸 알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리 말한 내가 손을 살짝 풀었다.
그러자 박사가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면서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더니 말한다.
“벌... 받아야 돼...”
“어떤 식으로?”
“어, 어제처럼... 네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야 돼... 말도 잘 듣고...”
“그렇죠?”
“응...”
“그럼 짐 싸요.”
“짐...?”
박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할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짐을 싸라니 당황한 모양.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여행갈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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