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2 사랑을 고백하세요
사흘 뒤.
“다 왔다니까... 그만 전화해요. 나 운전 중이라고 했잖아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올 때 맥주 사올래? 다 떨어졌어.
“그 말도 몇 번이나 했어요. 사갈 테니까 끊어.”
다소 높아진 내 언성에 박사가 황급히 사과한다.
-아, 알았어... 미안.
전화를 끊은 나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최근 박사는 집착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일하러 나가면 거의 30분마다 한 번씩 전화를 건 다음 어디냐고, 언제 오냐고 물어봤었다.
박사의 휴대폰에 뜬 위치와 대조해보면서 거짓말을 하나, 하지 않나 확인해보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정도면 오늘 대판 싸워도 되겠구나.
맥주를 사고 집에 돌아가 주차를 하던 나는, 박사가 우산을 쓴 채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최근 살이 많이 빠져서 보기가 좋다.
가슴 사이즈가 약간 줄어든 건 아쉽지만.
기어를 파킹에 놓고 시동을 끈 내가 문을 열자, 박사가 냅다 우산을 씌워주었다.
“누나, 비 맞잖아요.”
“난 괜찮아. 일하느라 수고했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치 연인처럼 박사와 애정 어린 뽀뽀를 했다.
그 뒤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얼른 들어가요.”
“알았어.”
집으로 돌아간 나는 정장 외투를 대충 벗어던졌다.
그러자 우산을 펴놓던 박사가 후다닥 달려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벗겨주었다.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던 내가 물었다.
“저녁은 안 했죠?”
“응. 먹고 왔다며.”
“누나는 먹었어요?”
“난 먹었지... 얼른 씻고 나와. 그리고 오늘부터 추워진다니까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지 마. 새로 주문한 가운 놔둘 테니까 그거 입어.”
“알았어요.”
“대충 대답하지 말고.”
“알았다니까.”
안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한 나는, 침대에 잘 놓인 가운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왔다.
이후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는 박사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박사가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
난 그런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워 뉴스를 시청했다.
[기록적인 가을장마로 인해 홍수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수만 명의 수재민들이 발생……]
[폭우는 며칠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뇌우가 열흘 내내 지속된 건 102년 만이며, 장마가 끝날 예상 시기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박사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안 멈춰서 큰일이네...”
“왜요? 딱히 피해는 없는데.”
“뉴스 제대로 안 봤지? 수만 명의 수재민들이 발생했다고 하잖아.”
“우리 얘기였어요.”
그 말에 박사가 정색을 했다.
날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녀가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해?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하죠. 근데 뭐 어떡해요? 자연재해인데 별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것저것 신경 쓰다보면 정신만 산만해져요. 예능 틀어 봐요. 영화라도 보던가.”
“알았어... 근데 지혁아.”
“왜요?”
“우리... 연구실에 안 간지도 열흘이 넘었는데...”
드디어 연구실 이야기를 꺼내는구나.
상체를 일으킨 나는 박사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박사가 곤란한 얼굴로 몸을 빼려고 한다.
“이러지 말고 얘기하자.”
“뭐라는 거야? 이 상태에선 못해요?”
“하아... 알았어. 우리 이제...”
박사가 말을 하려고 할 때쯤, 나는 고개를 돌리고는 내 뺨에 손가락을 가져가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박사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내 뺨에 입술을 대고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다시.”
또 한 번 말을 끊은 나.
헛웃음을 켠 박사가 다시 한 번 얼굴을 들이밀었다.
타이밍에 맞춰 고개를 돌린 난 박사의 키스를 입술로 받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 왜 이래 진짜...”
“왜요?”
“진지한 얘기 좀 하자니까? 똑바로 들어줬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해봐요.”
“우리 이제 연구실 가서 디바이스 만들어야 돼.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실비아랑 아델한테 너무 미안해... 지금 가서 시작하자.”
“오늘 피곤해요. 일이 너무 많았어.”
“그럼 구경만이라도 해. 오늘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눈으로만 익힌 다음,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박사의 말이 끊겼다.
내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렸기 때문이다.
잠시 날 바라보던 그녀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인다.
“휴대폰 끄고 집중해줄래?”
싫은데? 빼앗아가서 네가 꺼라. 한 판 싸우게.
박사의 말을 상큼하게 씹은 나는, 웃긴 동영상을 틀고 킬킬거렸다.
“송지혁, 휴대폰 끄라고 했어.”
또 한 번 말을 씹자, 박사가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됐다. 잘했어 박사야.
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해요? 지금?”
“너 자꾸 이렇게 애처럼 굴 거야?”
“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언성을 마주 높이자 박사가 흠칫한다.
“무슨 소리야?”
“어제도, 오늘도 거의 3, 40분마다 한 번씩 전화하고... 그거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요? 중요한 회의가 있었는데 임원들한테 눈칫밥을 먹었다고요. 한 번 안 받으니까 문자폭탄 보내고... 애처럼 군 게 누군데?”
“그, 그건 미안하지만...”
“게다가 오늘은 정말 피곤하니까 집 밖으로 벗어나기 싫은 건데, 왜 누나는 누나 생각만 해요?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해?”
박사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냐! 난 항상 널 생각하는데...”
“항상 날 생각한다는 사람이 내가 피곤하다는데도 연구실에 가자고 해요? 누나 혼자 가면 됐잖아요.”
“지혁아, 진정하고...”
“진짜 화난다. 내가 서운한 건 이것만이 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어요.”
“뭐...?”
흠칫한 박사.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입술에 침을 묻혔다.
며칠 전 우리가 살짝 다퉜을 때, 내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걸 상기해낸 것이다.
그녀가 조심스런 투로 묻는다.
“그... 무슨 얘기인지 물어봐도 돼?”
“다용도실.”
박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낭패라는 듯 긴 한숨을 내쉰 그녀가 말한다.
“봤구나...”
“봤어요. 누나 결혼사진이랑 앨범. 에드라는 이름이 적힌 골프채도 있더라?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구석에 숨겨져 있던데요? 누가 봐도 일부러 감춰놓은 것처럼 보였는데, 왜 그랬어요?”
“그게...”
“누나 집에 사진 같은 게 전혀 없으니까, 난 누나가 남편을 가끔, 그저 말로만 그리워하면서 잊어가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박사는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달달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 것이 당황스런 모양.
고요해진 거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삭막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잠시 텀을 둬서 박사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나는 말을 이었다.
“남편 티셔츠 한 장... 난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번에 누나가 내 손에 티셔츠를 들려줄 때 완전히 노선을 정했다고 확신했었어요. 근데 내 착각이었네. 차라리 미리 말이라도 해주던가. 그랬다면 내가 더 노력했을 텐데...”
그 말에 박사가 허겁지겁 고개를 젓는다.
“지혁아... 넌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 내 말 좀 들어주면 안 될까? 먼저 듣고... 듣고 판단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왜 누나는 내 얘기는 듣는 척도 안 하면서, 자기 얘기는 하고 싶어 해요? 진짜 이기적이다. 내가 피곤하다고 했죠? 일 많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연구실에서 구경하라는 말을 쳐 하냐고 씨발. 그랬으면서 누나 말을 들으라고요?”
톤이 점점 올라가며 입에서부터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의도적으로 흥분한 척을 한 거다.
박사는 설마 내가 이럴 줄은 몰랐는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곧바로 사과한다.
“저, 정말 미안해... 지혁아... 물 가져올 테니까 마시고 진정하자...”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할 정도라 내가 진심으로 실망, 분노하고 있다 생각한 것 같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꾹꾹 눌렀다.
“나는 누나를 진짜 사랑하는데, 누나는 날 그냥 장난감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왜! 왜 그런 말을 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는 박사.
내가 말했다.
“오늘 진짜 힘들고 머리도 아파요. 여기 있으면 더 그럴 것 같으니까 이만 돌아갈게요.”
“뭐라고...?”
“우리 시간을 가져요.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시간을 갖자. 나중에 연락하겠다.
이것만큼 잔인한 말이 없다.
특히 이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대목이 중요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자신이 먼저 연락한다면 안 된다는 마음이 깊게 뿌리박힌다.
참다못해 연락을 하자니 집착하는 모습으로 보일까봐, 상대방이 싫어할까 무섭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에 전전긍긍하며 가슴앓이를 해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다.
알겠다고 묵묵히 참는 사람도 있으며, 그냥 냅다 연락해 사과하거나 더 싸우는 사람도,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년놈들도 있다.
박사라면 아마도 연락은 하지 않고 발품을 팔며 날 찾겠지.
무조건 내 예상대로 될 것이다.
그녀가 하는 행동만 봐도 안다.
지금까지 홀로 외로움을 잘 삼켜왔지만, 나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혼자 있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박사는 자신의 말라서 갈라진 마음속에 물을 주는, 새로운 사랑을 꽃피워준 내가 없어진다면 이틀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혁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우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자! 일단 앉아, 앉아봐... 네 얘기 먼저 들을게!”
내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소리치는 박사.
이틀이 아니라 하루도 버티지 못하겠구만.
남녀관계에 대한 주도권이 한 사람에게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이든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관계에 금이 갈만한 패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 패가 상당히 강력한 경우 뭐든 갖다 붙이면 자연스럽게 무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그 일환.
솔직히 이렇게까지 번질 사태는 아니었다.
미망인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다. 금슬이 좋았으니 유품을 보관할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박사가 내게서 그걸 숨겨놨다는 게 중요했다.
그걸 오늘 서운했던 일과 더불어 언급하고, 내 식대로 각색해 던져주면서 실망했다고 어필을 했다.
그러니 내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이 강한 상태였던 박사가 스스로 찔려서는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다.
박사는 내 말에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떠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이성보다는 감성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가 없다면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애정결핍 상태에 들어선 상황이었기에 효과가 아주 좋았다.
아마 시간을 갖자는 말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지.
“미안해요, 누나. 지금은 어떤 얘기도 하기 싫어.”
착잡한 말투로 그리 말한 나는 박사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차키를 가지고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박사가 큰 소리로 경고한다.
“가지마! 가지 말라고 했어! 너 진짜 가기만 해!”
아아... 매사에 침착하고 똑똑하던 네가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늘그막에 찾아온 사랑이 참으로 무섭다. 그치?
내가 박사를 무시하고 슬리퍼를 신자, 그녀가 다시금 성을 낸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어찌나 큰 목소리였는지 집이 쩌렁쩌렁 울렸다.
난 박사를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사의 다음 반응은 측은함이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내게 달려온 그녀가 가운 자락을 꽉 잡고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한다.
“나도 머리아파... 쉬고 싶어... 오늘 연구실 가지 말고 같이 자자... 응?”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박사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가 내 허리를 꽉 부여잡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느껴진다.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댄 내가 나직이 속삭였다.
“머리 아프면 일해요. 디바이스라도 만들어요. 누나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다분히 비꼬는 말이었다.
움찔한 박사가 사정사정한다.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지혁아... 제발...”
“나도, 누나도 혼자 있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우리 그렇게 해요.”
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박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더 이상 붙잡는다면 돌이킬 수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모양.
나는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잠시 쳐다본 후, 집 밖으로 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떠났다.
마음이 아프지만 네가 날 더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며칠만... 아니, 하루나 이틀만 참아라.
내 옷이라도 부여잡고 꺽꺽 울면서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은 다음, 위치추적기를 사용해서 날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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