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7 길들이기 #2
“안녕하세요, 제니퍼 캐시 박사님. 제 이름은 실비아 리즈 입니다.”
“안녕하세요! 제니퍼 캐시 박사님! 저는 아델라인이에요! 줄여서 아델이라고 불러줘!”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실비아에 비해, 아델라인은 여전히 활기찼다.
박사는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니퍼 캐시에요.”
둘과 악수를 나눈 박사는, 실비아가 공손히 전달해준 통역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물건.
박사가 흥미를 가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지혁아, 이거 어떻게 작동시키는 거야?”
통역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작동법을 물어보는 박사였다.
“옆면을 좌우로 몇 번 비벼주면 돼요.”
“이렇게?”
위이잉-!
“네, 됐네요.”
“이거 진짜 신기하다... 어떤 기술로 만든 거지? 분해해 봐도 되나?”
“글쎄요. 실비아 씨한테 한 번 여쭤보시는 게...”
우리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통역기를 켠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언어를 다 배울 때까지는 꼭 필요한 물건이라서... 분해는 안 돼요.”
“아, 미안해요. 처음 보는 기계가 너무 흥미로워서...”
“아니에요. 만나 뵙게 되서 정말 영광입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실비아. 날 대할 때와는 다르게 예의가 제법 바르다.
가식적인 모습은 아닌데... 수장 격인 사람에겐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숙여야할 사람임을 알아보는 건가?
뭐가 됐든 나에겐 좋은 일이다. 실비아가 박사를 신뢰하면 할수록 내가 다루기 편하게 되니까.
나는 식탁에서 사온 스파게티를 보며 희희낙락해하는 아델에게 다가가 그녀도 대화에 참여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뒤로 조금 물러나 세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사실 이야기라고 해봐야 중요한 건 없었다.
대부분의 주제는 그냥 연구실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타이라트가 숨어있는 장소의 탐색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지구에서 마물이 나타나면 어떤 식으로 발견하는지 등이었다.
아이테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박사는 실비아가 꺼낸 아이테르 보관함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이것도...”
“네, 저희 행성에서 만든 보관함이에요.”
“기술력이 정말 대단하네? 가지고 가서 파악해보고 싶을 정도야.”
어느 샌가부터 말을 편하게 놓은 박사의 칭찬.
실비아의 콧대가 약간 세워졌다.
지가 살던 행성을 칭찬하니까 기분이 좋나보다.
“박사님께서 디바이스를 만들어주시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볼게. 지혁이도 있으니까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산만한 꼬마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델이 초롱초롱한 눈을 했다.
“지혁 씨도 박사님처럼 똑똑해요?”
“나보다 더 똑똑해.”
“와아! 정말요?”
“정말이야. 솔직히 지혁이가 없었다면 연구실이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몰라. 지구 전체에 우리 인프라를 깔아놓을 수 있었던 것도 지혁이 덕분이었어.”
이들 앞에서 얼굴에 금칠을 해주다니 쑥스럽... 기는 개뿔.
나에 대한 호감이 쌓이면 좋은 거지 뭐.
이야기는 세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끝났다.
박사는 설명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 실비아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모두 말해주었고, 덕분에 난 의심을 대부분 벗을 수 있었다.
박사는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하며 아쉬워하는 실비아와 아델을 위로했고, 작별인사를 나눈 후 통역기를 돌려주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나 또한 박사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실비아가 붙잡자 잠시 멈췄다.
“오늘 정말 유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고마워.”
“아니에요. 박사님 말씀처럼 디바이스 제작에 착수했으니까, 좋은 소식을 들고 올게요. 그때까진 근질근질하더라도 참아줘요.”
“응. 박사님도 되게 좋은 분이라 안심했어. 그리고... 의외였어. 박사님이야 그렇다 쳐도 일반인이었던 네가 연구실에 들어가서 도움을 줬을 줄은...”
잔뜩 풀어진 표정을 보니 내 평가가 오른 걸 알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더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실비아가 박사를 꽤나 많이 믿는 것 같아서 나도 반사이익을 얻었다.
의심을 벗어야겠다는 목적은 달성이다. 경계심이 많은 실비아를 상대로 이 정도면 좋은 성과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잘해보죠.”
“그래, 잘 부탁해. 박사님에게도 안부 전해줘. 이세화 씨와 유리아 엘레나르 씨를 만나는 날도 기대하고 있을게.”
“물론입니다. 그럼 쉬세요.”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려던 나는, 아델이 냅다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자 피식했다.
“왜요? 뭐 할 말이라도 남았어요?”
“아니요! 감사인사 하려구요! 감사합니다!”
힘차게 상체를 구십 도로 숙이는 아델.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며,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거니,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박사가 지나가는 투로 묻는다.
“내가 나가고 무슨 얘기했어?”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냥 누나 칭찬.”
“무슨 칭찬?”
“칭찬이 칭찬이지 뭘 그렇게 자세히 캐물으려고 해요?”
“궁금해서...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딱히 궁금할 거리는 아니에요. 실비아 씨가 누나더러 좋은 사람이라고 하길래 맞다고 했어. 이제 됐나요?”
“응... 됐어.”
나는 속으로 박사를 비웃었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것들도 궁금해 할 정도면, 조만간 중증으로 번질 것이 분명하다.
자율주행모드로 변경한 나는 등받이를 쫙 내리고 박사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어때? 괜찮아 보여요?”
그러자 박사가 나처럼 등받이를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네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좋아. 착한 아이들이야.”
아무렴, 착한 아이들이지.
내가 야금야금 지구를 갉아먹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아이들이기도 하고.
“그렇죠? 실비아 씨는 매사에 냉정하고, 아델은 활기차고... 좋은 콤비가 될 거라고 느껴져요. 외모도 궁합이 좋지 않아요? 차가운 실비아 씨, 귀엽고 따뜻한 아델...”
그 말에 박사가 조금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쳤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예전이었다면 또 남편처럼 유치한 장난을 친다며 타박했을 텐데 저런다는 건...
무의식 속에서 질투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은 여지만 남겨둔 터라 아주 약간 불편해하는 정도가 끝이겠지만, 틈 날 때마다 언급하면서 박사와의 관계가 깊어진다면... 종국에는 두 사람에게 적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때 내 마음대로 둘에 대한 이미지를 조작해놔야지.
아이테르를 봉인할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기 위한 사전작업도 성공적이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박사의 위로 자리를 옮겼다.
“야...! 너 지금 위험하게...”
놀라서는 날 나무라려는 그녀.
난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좋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이대로 있을게요.”
“너...”
무슨 말을 하려던 박사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결국 내 머리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푹신한 가슴베개와 미시 특유의 인자한 손길 때문에 졸음이 밀려온다.
조금만 자자.
**
“지혁아... 다 왔어. 일어나.”
“으음...”
힘겨운 목소리로 끙끙댄 나는 눈을 지그시 떴다.
어두운 차 안. 밖엔 어느 샌가 비가 내리며 차창을 후두둑 때리고 있었다.
소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좋다.
비가 내리는 날은 특유의 흙내음과 먹구름이 껴 우중충하고 습한 분위기를 만든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이 분위기에 휩쓸릴 테고, 지금의 박사가 그랬다.
나와의 관계가 발전된 지금, 그녀를 혼자 둔다면 심한 외로움을 탈 것이다.
집에 덩그러니 홀로 있으면 아마 남편과 날 생각하며 펑펑 울겠지.
아니, 애초에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할 거다.
그렇다면 아예 박사의 집으로 가서 다 해결해야겠다.
“여긴 어디에요?”
“연구실 근처야. 네가 차 가지고 오면 자주 대는 곳. 얼른 일어나.”
박사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아이 달래듯 툭툭 쳤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도착한지 얼마나 됐어요?”
“30분.”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차에 우산 있어?”
“있긴 한데...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요?”
“왜...? 많이 피곤해?”
떨려오는 목소리. 역시 불안해하는 중이다.
“아니요. 원래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한강에서 돗자리 깔고 마시려 했는데, 비가 오잖아요.”
“가게 안에서 마셔도 되잖아.”
“시끌벅적할 것 같아서 별로에요.”
“룸 있는 곳으로 가자.”
“그냥 누나 집으로 가면 안 되나?”
“우, 우리 집...?”
어두컴컴한 차 안이지만 박사의 눈이 크게 뜨인 게 보인다.
개인적인 공간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껄끄러운 걸까?
아니다. 박사는 나와 집으로 가게 되면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저 반응은 사진이라는 남편의 잔재, 그게 있는 공간에서 섹스를 한다는 게 거북한 거다.
거북하다기보다는 찔린다는 표현이 옳겠지.
“왜요? 안 돼요?”
“그... 안주가 별로 없을 텐데...”
박사는 이미 외로움이 폭발한 상태다.
나와의 섹스도 만족에 겨워했고, 달달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황홀해한다.
게다가 지금은 비가 온다. 감성이 터진 박사에게, 내게 빠져가는 박사에게 거절이란 있을 수 없었다.
“사가면 되지. 저번에 보니까 집 앞에 편의점도 있던데. 곤란하면 오늘은 돌아가고요.”
“아, 아냐! 우리 집으로... 가자. 가도 될 것 같아.”
다급하게 승낙하는 박사.
내가 휑하니 떠나버릴까 두려운 모양이다.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내일...”
“억지가 아니라 집이 조금 어지러운 상태라 보여주기 창피했을 뿐이야... 가도 돼.”
“그래요? 그럼 갈게요. XA주택 맞죠?”
“응...”
박사의 집은 연구실과 가까웠다.
덕분에 차를 몬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우산을 챙기고 차에서 내리려는 나에게, 박사가 급한 투로 말한다.
“지혁아! 잠깐만...”
“왜요?”
“나 먼저 들어가서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편의점에서 술이랑 안주거리 좀 사올래?”
“그렇게 창피해요? 보여주기 힘들 정도야?”
“.....”
아무 말 않고 손가락만 꼼지락대는 박사였다.
나는 그녀의 손에 우산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박사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 뛰어가면 되니까 너 써...”
“나도 괜찮은데? 누나가 써요. 다녀올게.”
박사를 향해 씨익 웃어준 나는 곧장 편의점을 향해 달려갔다.
거기서 최대한 느린 속도로 술과 안주거리를 골라 계산을 마쳤다.
큰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오니 박사가 편의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우산을 빼앗다시피 하고, 약간 높게 든 내가 물었다.
“벌써 정리 끝났어요?”
“벌써라니... 너 여기에 15분 정도 있었어.”
“그랬나? 신중하게 고르다보니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네요. 기대된다.”
“뭐가?”
“누나 집은 어떨지 궁금해요.”
“그냥... 평범해.”
그게 궁금한 것이 아니다.
내가 편의점을 간 사이 집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궁금한 거다.
박사와 함께 집에 도착한 나는, 방향제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자 코를 킁킁거렸다.
깨끗한 라벤더 향. 마음이 절로 진정되는 느낌이다.
“냄새 좋다. 라벤더에요?”
“맞아. 내가 좋아하는 향이야. 식탁에 안주 깔아놓고 있을래? 나 화장실...”
“TV 보면서 마시면 안 되나?”
“그래도 돼. 그럼 소파 테이블에 올려놔.”
“알았어요.”
박사는 어색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거실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샤워기를 튼 모양.
쪼르르 거리는 소변 소리를 들려주기 싫은 것 같다.
킥킥 웃은 나는 안방 문이 조금 열려있자 살금살금 가서 살짝 밀어보았다.
조용히 열리는 문. 안방 불을 켜고 그 안을 살펴보던 나는, 협탁이 깨끗하자 눈을 빛냈다.
추적용 마물을 통해 침실을 봤을 땐, 협탁 위에 에드워드와의 결혼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숨겨놓았구나.
내가 보고 싫어할까봐... 라는 마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크겠지.
액자가 있다면 남편이 지켜보는 느낌을 받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겠고.
불륜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 미망인들의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기지.
입꼬리를 올린 나는 샤워기 소리가 멎자 잽싸게 불을 끄고 소파에 앉았다.
얼마 뒤, 화장실에서 나온 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응? 왜 가만히 있어?”
“집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넓지만 아늑하고 좋네요.”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다행이다. 이제 마실까?”
“네, 그래요.”
사부작거리며 봉투 안에서 술과 안주를 꺼낸 나는 소파 옆을 툭툭 쳤다.
그러자 박사가 머뭇머뭇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올린 내가 방긋 웃었다.
“TV 켜줘요.”
“아, 응...”
허리에 손을 대고만 있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이 거칠어지는 박사.
오늘은 펠라를 받아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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