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6 길들이기
“안녕하세요, 지혁 씨?”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은 아델라인의 인사였다.
통역기도 없는데 발음이 무척 자연스럽다.
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뜻. 괜히 기특한 마음이 든 나는 아델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안녕하세요, 아델.”
“이거 볼래요? 머리집게!”
아델이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며 자신의 몸을 180도 돌렸다.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잘 틀어 올려 고정시킨 머리를 보니 흐뭇한 미소가 맺힌다.
“고정이 잘 됐네요.”
“그렇죠!? 밥 먹었어요? 우리 스파게티 다 떨어졌어. 로제 파스타, 까르보나라, 알리오 올리오, 볼로네제...”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접으며 파스타의 종류를 나열하는 아델.
귀엽다... 성녀만 아니었다면 당장 따먹는 건데, 삽입하면 몸이 가루라도 될 것 같아 무서워서 건드리지를 못하겠다.
“내일 사올게요.”
“내일? 약속해? 요?”
반말로 끝마무리를 했다가 화들짝 놀라선 요 자를 붙이는 그녀였다.
“약속할게요. 내일 사서 가지고 올게요.”
“손가락 걸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럽잖아.
절로 아빠미소를 지은 나는 아델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꾸욱 맞부딪쳤다.
“헤헤...”
헤실헤실 웃은 아델은 그제야 현관에서 비켜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실비아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비아 씨?”
“안녕. 오랜만이야. 어디 갔었어?”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발음 하나는 원어민 저리가라다.
“속초에 다녀왔어요. 속초 아시나?”
“알아, 강원도.”
“맞아요.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어요?”
“잠깐... 천천히 말해줘.”
“지내는데, 불편한 거, 없어요?”
또박또박 말하니 실비아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얘도 예쁜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느낌이라 따뜻한 아델과는 정반대의 매력을 풍긴다.
“없어. 항상 고마워.”
말을 마친 실비아가 통역기를 휙 던졌다.
뭔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 같다.
약간 서툰 몸짓으로 통역기를 받고 작동시킨 내가 물었다.
“할 이야기라도 있으신가요?”
“우리가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해서.”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잖아. 이 지구에 도착해서 미국에 있다가, 네가 구출해서 여기 한국으로 왔어. 덕분에 편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우리 목적은 따로 있어. 너도 알잖아.”
“예. 신탁을 받은 동료들과 악에 맞서 싸우는 목적이 있으시죠.”
“맞아. 너무 평화로워. 이상하지 않아?”
당연히 이상하지.
근데 뭐 어쩔 건데? 내가 마물들을 풀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그리고 아델만 아니었으면 너는 이미 비밀기지에서 세뇌당하고 있었을 걸? 운 좋은 줄 알아라.
“이상하긴 하죠. 하지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래. 그 타이라트라는 놈이 눈치를 채고 숨어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찾으려는 노력은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전혀.
난 지금 박사를 길들이는데 여념이 없단다.
“물론입니다. 전 세계를 매일매일, 꼼꼼히 뒤지고 있어요.”
“너희 노력을 폄하하려고 한 건 아냐.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한 디바이스도 곧 제작에 들어가니까, 지금은 언어공부와 문화를 배우는데 집중하셨으면 좋겠어요.”
디바이스 제작이라는 말에 실비아의 안색이 밝아졌다.
무한대로 충전이 가능한, 악을 멸하는 아이테르의 힘. 당연히 탐이 나겠지.
“정말 좋은 소식이네? 근데 아이테르는 어떤 방식으로 충전돼?”
“그건 제작이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았어. 그리고... 혹시 이세화와 유리아 엘레나르를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동료가 될 예정인데 얼굴이라도 익혀두면 좋잖아.”
동료가 될 예정이긴 하지.
악을 멸하는 동료가 아니라, 악 그 자체가 되어 전 우주를 정복하게 될 동료.
“조만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약속이야?”
“약속이에요.”
“그럼 손가락 걸어.”
“.....”
아델한데 옮았나? 이런 걸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실비아와 손가락을 걸었다.
“됐어요?”
“또 있어. 제니퍼 캐시 박사님을 만나게 해줘.”
“그것도 약속드릴게요. 조만간...”
“아니, 내일 만나고 싶어.”
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박사를 꼭 만나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날 믿지 못하고 있는 건가?
실비아는 내 당황한 얼굴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분이라도 뵈어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 그래.”
내 저의를 의심하고 있구나.
하긴, 연구실의 책임자인 박사를 여태 만나지 못한 건 이상할 만도 했다.
이 의정부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을 테니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좋아, 만나게 해주지. 박사에겐 악의를 주입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의심을 벗길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알겠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중으로 만나게 해드릴게요.”
“괜찮겠어?”
“예. 설득해보죠 뭐. 박사님도 흔쾌히 만나주실 겁니다. 다만 바쁘신 분이니만큼 이야기를 오래 나누지는 못합니다.”
“물론이야.”
**
연구실에 찾아간 나는, 보관실 문이 열려있자 몰래 그쪽으로 갔다.
거기엔 밀봉된 폴리머스를 넣어놓고 있는 박사가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건가?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제법 강하게 때렸다.
짜악!
“꺄악!”
보관실 안이 메아리칠 정도로 높은 비명소리를 내지른 박사가 몸을 격하게 떨었다.
거의 만세를 하다시피 하며 밀봉된 폴리머스를 날려 보내기까지 한다.
너무 심하게 놀랐네. 난 손을 뻗어 그녀가 놓친 폴리머스를 낚아채 위로 들었다.
“조심해야죠.”
“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시키다가 버럭 성을 내는 그녀.
내가 태연하게 반문했다.
“왜요?”
“과학자로서의 자세가 안 됐잖아! 모든 물질은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이게 뭐니!? 잡아서 다행이지만 떨어뜨렸으면 어쩔 뻔했어!”
폴리머스는 옥상에서 떨어진다 해도, 불구덩이에 집어던진다 해도 아무런 흠집도 없을 완벽한 물질이긴 했다.
하지만 모든 물질은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한다는 박사의 말엔 반박이 불가능하다.
내 위장신분은 미래과학을 좋아하는 천재 공돌이, 기계광이었으니까.
그런 신분으로 폴리머스라는 중요한 물질을 옮기는 박사에게 장난을 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근데 1차적인 잘못은 네가 했잖아. 누가 그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래?
그 엉덩이를 누가 가만 놔두겠냐고.
“하...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대체?”
“미안해요. 누나가 너무 좋아서.”
냅다 사과와 칭찬을 하니 할 말이 없어진 듯,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로 헛웃음만 켜는 박사였다.
“나머지는 내가 옮겨놓을 테니까 누나는 나가있어요.”
“됐어, 같이 옮겨. 불안해서 못 맡기겠어.”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박사의 목소리는 유해진 상태였다.
씨익 웃은 나는 말없이 박사를 도와 폴리머스를 옮겼다.
일을 마친 우린 보관실을 나와 자리에 앉았다.
박사는 아까 일이 계속 신경 쓰이는 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날 나무랐다.
“너무 안일했어. 알고 있지?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 이 말인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중요한 물질이었잖아. 떨어뜨려서 구조가 바뀌기라도 하면... 물론 폴리머스의 구조가 바뀐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횡설수설하는 박사.
킥킥 웃은 나는 그녀가 하려던 말을 대신 마무리해주었다.
“100퍼센트는 없으니까 조심하자고?”
“그래, 그거야...”
“알았어요. 근데 걸음걸이가 왜 그래요?”
“뭐가?”
“보관실을 나올 때부터 계속 불편해했잖아요. 속초에서 했던 일 때문에 근육이 조금 조이는 건가?”
그 말에 박사의 귓볼이 빨개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 이건 그냥... 오늘 오전에 운동을 해서.”
“운동? 무슨 운동?”
“헬스장 갔다가 왔는데...”
남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겠군.
나는 미간을 좁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러자 박사가 내 눈치를 보더니 애써 태연한 척한다.
“왜? 뭐 잘못됐어...?”
“헬스장을 갈 거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운동은 내가 알려주면 되잖아.”
“넌 바쁘니까...”
“이제 디바이스도 같이 만들어야 해서 맨날 붙어있어야 되는데 뭐가 바쁘다고요? 날 피하고 싶어요?”
“아니야... 그런 생각은 안 했어.”
“그럼 앞으로는 나랑 운동해요. 알았죠?”
“그게... 아, 알았어. 너랑 할게.”
박사는 뭔가 야릇한 생각을 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래, 섹스로도 운동이 되긴 하지.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보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제 디바이스 제작할까? 일단 구조부터 알아야 하는데... 이리 와봐.”
“네.”
나는 의자를 끌어 디바이스의 구조를 확대해서 띄워놓은 박사에게 완전히 밀착했다.
이후 그녀의 등과 등받이 사이로 손을 넣어 허리를 만졌다.
“너,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말고! 조금 떨어져...! 이렇게 중요할 때에...”
“뭐 이 정도로 당황해한대? 괜히 오버하지 말고 설명이나 해봐요.”
“흐흠... 일단 아이테르가 들어갈 중앙이 가장 중요해... 아이테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공간을 확보... 흐아앗...!”
박사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내가 손바닥 전체로 그녀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기 때문.
야릇한 신음소리를 낸 박사가 눈을 가라앉히고 힘겹게 말한다.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야지...! 만들다가 실수하면 큰돈을 날리게 되는 거라고! 너 과학자잖아. 제발 장난치지 말고 집중해! 알았니?”
꼬우면 그렇게 야하게 생기지 말던가.
게다가 다 아는 내용이라서 듣기 싫은데 어떡하라고?
“다 듣고 있었어요. 아이테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나는 자유로운 왼손으로 띄워진 3D 화면을 휘휘 돌려 구조를 살펴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힘이 잘 분산될 수 있도록 여러 부품들이 맞물릴 수 있게 제작하면 되겠네요?”
“그... 맞아.”
박사는 내가 어마어마한 천재인 것을 상기한 듯했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화면을 끄고는 말했다.
“자료 줄 테니까, 돌아가서 잘 익혀놔...”
“네. 아, 그리고 누나.”
“응?”
“오늘 저랑 의정부에 좀 가야겠어요.”
“의정부는 왜...?”
“실비아 리즈, 그리고 아델라인이 누나를 만나고 싶어 해요.”
그 말에 박사가 깜짝 놀랐다.
“뭐...? 왜?”
“저희 동료가 될 사람들인데 저와만 연락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쪽에서 요청해왔기도 해서요. 이제 서로 얼굴을 익힐 때가 됐다고 봅니다.”
“그래...? 그러면 가자. 이참에 두 사람의 아이테르를 직접 봐야겠어.”
“그렇게 해요.”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가요. 갔다가 돌아와서 간단하게 술 한 잔 하죠.”
“절대 안 돼. 우린 빨리 디바이스를 만들어야 해. 술 마실 시간 같은 건 없어.”
“운동할 시간도 없겠네 그럼.”
“그건...”
“지금 누나 상태로는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보단 쉬엄쉬엄 하는 게 능률이 더 좋을 거에요.”
“무슨 소리야?”
“계속 내 눈치만 보잖아. 그래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딱 봐도 디바이스를 만들다가 실수할 거 같은데?”
박사가 찔끔했다.
처음엔 부정하려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인정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제대로 시작하자.”
그것도 안 될 걸? 네가 나한테 완전히 넘어오기 직전까지, 디바이스 제작은 제자리걸음일 거다.
깔짝깔짝 건드리려고 할 때마다 야한 짓들을 해야지.
의자에서 일어난 박사는 가운을 벗고 얇은 가디건을 걸쳤다.
“가자. 운전은 네가 할 거지?”
난 말없이 박사의 뒤로 돌아가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앞꿈치로 박사의 발뒤꿈치를 슬쩍 밀면서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
내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던 그녀가 목에 둘러진 팔을 꼬옥 잡았다.
좋다, 좋아. 길들이기는 잘 되어가고 있구나.
여기서 더 녹여놓은 다음 연구실 안에서 세화와 한 판 해야겠다.
몰래 엿볼 수 있도록 문틈을 살짝 열어놓고.
세화와의 사랑이 가득한 교접을 본 박사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일단 오늘은 술 마시고 박사의 집에서 자야지.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