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1 거사
박사는 의료기기 테이블에 누워 눈알을 데굴 굴리고 있었다.
치료가 여덟 번 진행될 때까지, 그녀는 얌전히 배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러니저러니 하며 싫다고 했어도 아프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모니터 상으로 박사의 몸에 면역력이 생성되고 바이러스가 대부분 소멸한 것을 확인한 내가 말했다.
“끝났어요.”
그러자 박사가 테이블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고, 조금 어지러운지 발을 끌면서 내게 다가왔다.
“너도 들어가. 내가 모니터링 할게...”
그녀는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욕망에 져버리고 나와 격정적인 키스를 했으니까.
나는 방글방글 웃으며 날 흘끗거리는 박사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아요.”
“괜찮다니... 너도 몸에 바이러스가 들어갔을 거 아니야...”
“왜요?”
짓궂은 물음에 박사가 눈을 흘긴다.
킥킥 웃은 나는 말을 이었다.
“설마 키스로 감기가 전염된다는 잘못된 상식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그, 그건 아니지만 하는 도중에 기침했잖아... 혹시 모르니까 너도 치료를...”
“전 정말 괜찮아요. 아프면 치료할게요.”
“아, 알았어...”
대답 직후, 박사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침묵했다.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한 모양.
치료실은 한참동안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내가 그녀를 불렀다.
“박사님.”
“왜...?”
“나갈까요?”
“그래... 나가자.”
“어디로 가실래요?”
“응?”
흠칫한 박사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걸 물어봐?”
“왜요? 나가자고 하니까 승낙하셨잖아요.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나, 난 치료실을 나가자는 줄 알고...”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저렇게 들을 것이다.
이건 내 언어유희를 통한 낚시였다.
박사를 골려주기 위한.
“같이 밥 먹어요.”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안 돼.”
이대로 휘둘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내 입 안을 진득하게 탐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세화나 유리아와는 다르게 튕기는 맛이 있다.
“알았어요, 누나.”
“뭐... 뭐?”
누나라는 말에 박사의 눈이 커졌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듯 목소리가 떨렸다.
“왜요?”
“너...”
난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깍지까지 끼니 박사가 놀라선 손에 힘을 준다.
하지만 공원에서처럼 빼려고 하지는 않았다.
진도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알기 쉬워서 좋구나.
“밥 먹으러 안 갈 거면 이러고 있을게요.”
“장난해?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고 들렸다는 건, 누나가 절 불편해한다는 뜻인가요?”
“그... 렇지는 않아... 그리고 누나라고 하지 마.”
“왜요? 거북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누나라고 부를게요. 박사님이라고 하면 정이 없어 보이잖아.”
장난기가 담긴 내 말에, 박사의 눈빛이 일변했다.
그녀가 손을 확 빼내면서 연구실 문을 가리킨다.
“이만 돌아가.”
“전...”
“당장 나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박사.
내가 실수한 건 아니다. 박사의 마음은 이미 열렸으니까.
그녀는 어제 공원에서처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다.
난 잠시 박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송지혁! 너...”
“10초만 이렇게 있다가 갈게요.”
“.... 하아...”
얕은 한숨을 내쉰 박사는 몸에 힘을 빼고 우뚝 멈췄다.
난 이 상태에서 정말 10초 정도만 있다가, 목에 키스를 하고는 포옹을 풀었다.
박사는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약간 힘없는 미소를 지어준 내가 말했다.
“가볼게요.”
미련 없이 등을 돌린 나는 연구실을 나섰다.
@@
집으로 돌아온 박사는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보드카 병을 땄다.
그걸 한 모금 크게 들이켠 박사는, 식탁에 병을 올려다놓고 자신의 뺨을 짝! 하고 쳤다.
“미치겠네...”
새파랗게 어린 남자와 키스를 했다.
그것도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
게다가 첫 번째는 지혁이 강제로 했다고 쳐도, 두 번째는 빼도 박도 못했다.
사랑이 가득 담긴 지혁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넘어가버려서 좋다고 달려들었다.
달콤한 키스는 오랜만이어서 이성이 끊어졌던 것 같았다.
‘달콤해? 아냐...’
지혁의 키스는 남편과 전혀 달랐다.
남편은 박사 자신의 의도를 우선시했고, 리드에 따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혁은 직접 리드를 했다. 마치 자신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려는 듯이.
그게 너무나도 신선했고, 좋았다.
엉덩이를 움켜잡았을 땐 미쳐버릴 뻔했다.
첫 번째 키스가 끝난 직후 히죽 웃으면서 늘어진 침을 핥고, 자신의 입술을 닦아주었을 때도 마찬가지. 혼이 쏙 빠졌다.
생소한 키스였다. 그런데 달콤한 기분을 느끼다니 어이가 없었다.
치료를 마친 뒤엔 마치 연인처럼 손깍지까지 꼈다.
지혁에게 휘둘려지는 느낌. 냉정하게 밀어내야 함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뭔가 중독이 심한 마약을 흡입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누나란다.
나이차이가 두 배는 더 가까이 되는데 누나란다.
감미로운 말투로 그 호칭을 들었을 땐 젊어진 느낌을 받았고, 머릿속에 봄바람이 부는 기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간 박사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지혁과의 밀회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다시 선명하게 생각났다.
지혁의 혀가 이빨 끄트머리를 건드리는 느낌도, 잇몸을 툭툭 두드리는 느낌도, 자신의 혀와 얽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느낌도 모조리.
절로 숨이 거칠어진 박사가 다시 보드카를 마셨다.
쾅! 소리가 나도록 병을 내려놓은 그녀는 돌연 지혁이 걱정스러워졌다.
뺨은 괜찮을까...? 조금 세게 때린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지혁이 보여준 힘없는 웃음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괜히 단호하게 말한 듯싶다.
후회가 밀려왔다.
‘에드...’
속으로 남편을 부른 박사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냅다 방에 들어가 누웠다.
하늘에 있는 남편은 지금 이렇게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화를 내겠지? 자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긴 했었는데... 모르겠다.
우웅-!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박사님. 어디에요?]
‘박사님?’
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분명 누나라고 했는데, 왜 다시 호칭을 바꾼 걸까?
설마 자신이 화를 내서? 아마 그런 것 같다.
진심으로 화를 낸 건 아닌데...
괜히 서운한 감정을 느낀 박사가 키패드를 두드렸다.
[집이야.]
대화를 이어갈 건덕지를 주지 않는, 짧고 단호한 문장이었다.
난 지금 기분이 조금 그렇다고 티를 팍팍 내는.
괜히 찔끔한 박사는 문자를 이어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지혁의 답신이 먼저 왔다.
[잘 들어가셨네요. 푹 쉬세요.]
마침표로 끝나는 문자. 박사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자신의 심리는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예전엔 그냥 넘어갔을,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이 쓰이게 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박사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마구 헝클어뜨렸다.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으면 아쉬운데다 지혁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되고, 이어나가자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10분이 흘렀다.
박사는 산발이 된 머리를 대충 넘기고 휴대폰을 들었다.
결국 그녀는 지혁에게 답장을 보내자고 마음먹었다.
문자를 씹어도 지혁이 씹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고마워.]
[내일 저랑 놀러가요. 오전에 연구실로 갈게요.]
곧바로 오는 답장. 그냥 씹어줬으면 좋았으련만...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동시에 안심했다.
지혁이 저렇게 말했다는 건, 자신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답장을 보내야 할까?
이대로 넘어간다면 지혁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감해질 것이다.
폴리머스가 오면 곧바로 디바이스를 제작해야 하는데, 사도에 중독되어 빠져버리면 안 된다.
막아야 한다. 거리를 둬야 해.
그렇게 다짐한 박사가 답신을 보냈다.
[알았어. 오전 11시까지 와.]
박사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의 액자를 쓰다듬었다.
속으로 자신이 이래도 되는지 에드워드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당연히 없었다.
그래도 정신적 지주인 남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이래선 안 돼.’
이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냥 깔끔하게 세화와 잘 사귀라고 하자. 그러기 위해서 내일 만나자고 한 거다.
그런 식으로 정신승리를 한 박사는 액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다음 날 오전.
소매를 접은 흰색 셔츠를 밝은 색 스키니진에 집어넣은 박사는, 시간에 맞춰 연구실에 도착했다.
팔짱을 끼고 안을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 문이 열리며 댄디한 복장의 지혁이 들어왔다.
박사 자신처럼 소매를 접은, 적당히 오버된 핏의 흰색 셔츠를 베이지색 밴딩 슬랙스 안에 넣어놓은 그.
나란히 서있으면 누가 봐도 커플이라고 생각할 만한 코디였다.
설마 이런 우연이 있나... 라고 생각하던 박사는 정색을 한 채 지혁을 바라보았다.
꼭 말하는 거다. 우리 이러지 말고 좋은 연구 파트너로 남자고.
“왔니?”
“네, 누나.”
그 말에 박사의 표정이 변했다.
정색하는 표정에서, 약간 자신감이 결여된 표정으로.
중요한 말을 해야 하는데 저 환한 미소를 보고, 누나라는 호칭을 듣고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면서, 마음속에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나 지각 안 했는데?”
“그...”
박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지혁이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무릎을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걱정과 애정이 잔뜩 담긴 시선에 힘이 쭉 빠져버린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고, 결국 말도 되지 않는 핑계를 대버렸다.
“그냥... 지각하면 혼내려고 했는데... 제 시간에 맞춰서 왔네...?”
“그래요?”
“응...”
“흠...”
지혁이 검지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미심쩍은 표정. 박사는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오늘 어디 갈 거야?”
“아직 결정 안 했어요. 가고 싶은 데는 있어요?”
“나는 아무데나 괜찮은데... 네가 결정해.”
“알았어요. 그리고 화장하신 거 예뻐요.”
“.....”
도저히 쳐내지 못하겠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혁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샴푸냄새도, 그의 꿀렁거리는 근육도, 그리고 다채로운 표정도 좋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귀여운 조수, 연구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급변하다니...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 많은 남자들이 좋다고 접근해왔다.
자신에게 꼬리를 치는 그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허나 지혁은 아니다. 그는 특별했다.
미래과학에 열정적인, 약간 4차원적인 모습이 남편과 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제와 같은 키스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든다. 심장이 조여 온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분명 어제 치료는 다 끝냈는데... 오늘은 그냥 쉴까요?”
지혁의 걱정스런 말투에 정신을 차린 박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난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에요?”
“괜찮다니까. 얼른 나가자.”
고개를 주억거린 지혁이 박사의 뒤로 돌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햣...!”
놀란 박사는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제 지혁이 보여줬던 그 슬픈 표정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힘을 뺐고, 지혁의 우람한 팔에 손을 올렸다.
박사의 뒤에 완전히 밀착한 지혁이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누나 때문에 미치겠어요.”
“.....”
그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지혁 때문에 미치겠다. 이성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 번 물꼬가 트이니 여태까지 쌓인 외로움이 폭발한 것 같았다.
지혁이 돌연 박사의 목에 얼굴을 대고 숨을 훅 들이켰다.
“흣...!”
짧은 날숨을 내뱉고는 몸을 움찔한 박사.
지혁이 그런 그녀의 귀에 대고 묻는다.
“저녁에 술 마실래요?”
“술...?”
“네. 누나랑 술 마시고 싶어요.”
“아...”
박사는 지금 이 상태에서 지혁과 술자리를 가진다면, 자신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실 거라고 확신했다.
그로 인해 뒤따를 결과까지도 어렴풋이 예상했다.
분명히... 분명히 야릇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거절해야 한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지혁과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안 돼.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던 박사가 대답한다.
“알았어...”
박사는 자신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거절을 해야 함이 분명한데, 밖으로는 순종적인 대답이 튀어나오다니.
벽에다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참아낸 박사가 생각했다.
그래, 그냥 술만 마시는 거잖아.
지혁은 착하고 사리분별을 잘하니까, 거절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거다.
그런데 제안을 받으면 거절하는 게 가능할까? 이토록 자신을 흔들어대는 지혁에게?
그를 쳐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섹스를 못해본지도 십여 년이나 됐다.
가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하는 남편과의 달콤한 잠자리가 그리웠는데, 지혁과 이런 관계가 되니 솔직히...
‘아, 안 돼...! 정신 차려!’
눈을 질끈 감은 박사가 지혁의 팔을 떼어내며 말했다.
“얼른 가자. 여기 너무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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