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39화 (139/471)

EP.139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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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어지럽지...?’

연구실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박사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지럼증.

원인은 비행기 안에서의 심력소모이리라.

오랜만에 들어온 집.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 박사는 잠깐 소파에 앉아 자신의 심리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참 옆머리를 꾹꾹 누르던 박사는, 휴대폰을 들어 미술관에서 할아버지가 찍어준 사진을 보았다.

두 손을 모아 다소곳하게 서서 환하게 미소 짓는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의 어깨를 감싼 채 광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웃고 있는 지혁.

입에 호선을 잔뜩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심력의 소모는 이 사진에 의해서 일어났다.

지혁이 사진을 보내주라고 말할까봐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혁은 이걸 까먹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박사는 자신조차 모르게 사진에 있는 지혁의 얼굴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저 행복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옛날에 에드워드와 함께했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에드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렇게 일찍 요절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15년 전에 만나서 2년 뒤 결혼에 골인하고, 3년간 열렬한 사랑을 했다.

그의 괴짜 천재 같은 모습이 정말 좋았고, 차분하고 냉정한 자신에 비해 톡톡 튀는 성격까지도, 난임이라 아이를 갖기 힘들었음에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까지도 좋았다.

그냥 에드가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했던 모든 일은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게 없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최근 그가 자꾸 생각나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고, 침대에 걸터앉아 협탁에 있는 자그마한 액자를 들었다.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등에 업은 채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짧은 갈색머리가 인상적인 젊었을 적의 에드워드 파슨스.

“.... 흑!”

행복했던 부부의 사진을 본 박사는 갑작스레 찾아온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나이를 먹고 애들 마냥 눈물이라니... 주책 같았지만 오늘따라 울고 싶었다.

한참동안 소리 없이 흐느끼던 그녀는, 우웅! 하는 진동소리에 손바닥으로 양쪽 눈을 닦아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잘 들어가셨어요? 저는 지금 도착했어요. 집에 아무도 없네요.]

지혁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저 문장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지혁도 뭔가 불안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심증일 뿐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잘 사귀고 있던 세화 이야기도 요새 뜸했고...

‘술이라도 하자고 할까?’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술이 절실할 정도로.

그러나 지혁과 술을 마셨을 때 실수했던 기억이 있어 망설여졌다.

터치패드를 붙잡고 고뇌하던 박사는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수고했어.]

[박사님도요. 내일 운동하실래요?]

갑작스레 운동? 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운동?]

[요새 계속 연구실에만 앉아계셨잖아요. 저도 최근 운동을 하지 못해서 몸이 뻐근하더라고요. 같이 해요.]

운동이라... 분명 지혁은 몸이 무척 좋았다.

저번에 그가 연구실에서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나왔을 당시, 창피한 건 둘째치고서라도 탄탄한 근육에 속으로 감탄했었다.

옷을 입어도 몸이 좋은 게 그대로 드러나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확실히... 요새 몸이 뻐근하긴 했는데...’

그녀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신을 보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내일 오전 10시까지 XA주택으로 갈게요.]

어떻게 주소를 알았냐고 물으려던 박사는, 술자리에서의 실수를 생각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알았어.]

[푹 쉬세요.]

박사는 휴대폰을 무선 충전기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최근 지혁의 행동이 조금 적극적이었다.

호텔에서 머리를 묶어준 것도 그렇고, 사진으로 보이는 얼굴도 그렇고, 필요한 얘기 외에 사족을 붙이는 것도 그렇고...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마 자신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간 박사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되지 않는 일.

지혁은 잘생기고 똑똑한, 앞날이 창창한 남자다.

그런 녀석이 세화 같은 완벽한 여자친구를 놔두고 자신 같은... 곧 40대가 되는 과부를 좋아할 리가 없잖은가.

그냥 착해서, 그리고 진심으로 스승인 자신을 따르려고 해서 친밀하게 다가오는 거다.

자신도 지혁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이상한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자.

그리 생각한 박사는 에어컨을 켜고 이불을 덮었다.

아무 생각 말고 자자. 지금은 잠이 절실하다.

고요한 침실에서 눈을 감은 그녀는, 뇌리에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정말?-

뇌리를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이었다.

마치 방금 했던 생각을 고쳐서 바로잡아주려는 것 같은 느낌.

박사는 눈을 감은 상태로 눈살을 찌푸렸다.

장비 개발, 이블리언 탐색기 보수 같은 생각을 하며 머릿속을 정리한 그녀는, 그 목소리가 다시는 들려오지 않자 안심하고 눈에 힘을 뺐다.

왜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자신은 상상이상으로 피곤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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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시간에 맞춰 박사의 주택에 도착했다.

그녀는 편한 운동복을 입은 채로 정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달라붙는 상의, 그리고 펑퍼짐한 7부 트레이닝 바지.

저게 레깅스였다면 좋았으련만... 박사의 빵빵한 엉덩이를 감상하지 못해서 아쉽다.

그래도 큼지막한 가슴은 대놓고 드러나는 수준이라 만족스럽다.

빵-!

클락션을 짧게 울리자, 박사가 움찔하더니 내 차를 쳐다보았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내가 조수석 창문을 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차에 탔다.

그녀는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맸다.

풍만한 가슴 사이를 먹은 안전띠가 눈에 띤다.

그녀에게 물을 건넨 내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잠은 잘 잤어요?”

“잘 잤어. 너는?”

“저는 뭐... 그냥저냥 잤어요.”

“그냥저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말끝을 흐리며 차를 출발시키니, 박사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날 바라본다.

“왜 싱숭생숭한데? 세화랑 무슨 일 있었니?”

“세화는 어제 외박했어요. 그리고 세화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나는 딱 봐도 깊은 고민이 있는 사람을 연기했다.

박사는 미술관에서의 일 이후, 날 생각하는 마음이 제법 강해졌다.

내가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나온다면, 박사는 따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상은 제대로 적중했다.

“운동 끝나고 이야기라도 할까?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보자. 난 육체보다 중요한 게 심리라고 봐. 마음이 맑아야 디바이스도 실수 없이 제작하지. 안 그래?”

자신의 심리도 불안정하면서 저렇게 말하다니.

나야 좋지.

“음... 맞는 말이네요. 알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 헬스장으로 가는 거야?”

“아뇨. 한강 가고 있어요.”

“한강...? 거긴 왜?”

“박사님은 오랜 시간 운동을 하지 않으셨으니까, 천천히 몸을 적응시키려고요. 게다가 헬스장에서 화면만 보고 운동하면 지루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운동을 하면서 취미를 먼저 붙이는 게 좋다고 봐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

한강으로 간 우린 자전거를 렌트했다.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와 헬멧까지 빌린 나는, 자전거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박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전거는 탈 줄 알죠?”

“장난해...? 당연하지.”

“신기한 듯 보시길래...”

“오랜만에 타게 돼서 그런 거야.”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박사의 뒤로 다가갔고, 팔꿈치 보호대를 둘러주려고 했다.

그러자 박사가 한숨을 내쉬더니 날 나무란다.

“내가 먼저 물어보고 하랬지?”

“아, 깜박하고 있었어요.”

“이리 줘. 내가 할게.”

“제가 해드리고 싶은데요.”

“하아... 대체 왜?”

“서툴 게 분명하니까요. 헬멧도 거꾸로 쓰실 것 같고.”

내 너스레에 박사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승낙을 받은 나는 박사에게 보호대를 착용시켜주고 말했다.

“저 보세요.”

박사가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약간 눈을 내리까는 모습을 보니 이 상황이 무척 어색한 것 같았다.

헬멧을 머리에 씌운 나는, 박사의 턱 근처에 손을 가져다대고 끈을 조였다.

이후 헬멧 윗부분을 잡아 살짝 흔들어보았다.

“잘 됐네요. 갈까요?”

“응. 괜히 긴장되네 이거...”

킥킥거린 나는 안장에 올라탄 박사의 자세를 교정해주었고, 그녀가 미적대는 사이 먼저 출발했다.

그러자 박사가 소리쳤다.

“야! 같이 가! 기다려!”

저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확신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거라고.

**

박사는 의외로 자전거를 잘 탔다.

오랜만에 타본다고 하길래 넘어지는 그녀를 잡아주는 로맨틱한 장면을 기대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두 시간동안 자전거를 탄 우린, 한강대교 밑의 둔치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자판기에서 물을 뽑은 나는 그걸 박사에게 내밀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박사가 생긋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뭘요. 벌컥벌컥 들이켜지 마시고 천천히 드세요.”

“물도 그렇게 마셔야 돼?”

“뭐든 규칙적이면 좋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박사는 헬멧 끈을 풀고 옆에 내려놓았다.

내 말대로 천천히 물을 마신 박사가 눈을 감더니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았다.

땀으로 약간 젖어있는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을 보니 키스하고 싶어 미치겠다.

“의외로 운동신경이 있으시네요.”

그 말에 박사가 눈을 뜨고는 날 돌아보았다.

방긋 웃은 그녀가 말한다.

“이래 뵈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어.”

침대에서도요? 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가 다시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욕구를 참아낸 나는 다시 물을 마시는 박사에게 손을 뻗어서, 그녀의 뺨에 달라붙어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떼어 넘겨주었다.

“푸흡!”

내 행동에 눈이 커진 박사가 마시던 물을 뿜어냈다.

뱉기 전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기에 내게 물분수가 닿지는 않았다.

아쉽다. 포상이었는데.

물의 일부가 기도로 들어갔는지 콜록거리던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았다.

“야...! 너 진짜 미쳤어?”

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건데? 너 그거 나쁜 버릇이야. 알아?”

“버릇은 아닌데요. 갑자기 그러고 싶어져서...”

“.....”

난감한 표정을 짓는 박사.

한참 그러고 있던 그녀가 어렵사리 말한다.

“하아... 세화 앞에서는 이러지 마. 알았어?”

“세화가 없으면 계속해도 돼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런 건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남들한테 오해사기 딱 좋은 행동이잖아.”

“오해해도 상관없잖아요.”

“난 상관있어.”

“왜요?”

“그야...”

말문이 막힌 박사가 입을 앙다물었다.

왜? 신경이 쓰이나보지?

한 차례 숨을 삼킨 박사의 말문이 열렸다.

“아냐... 이제 왜 싱숭생숭했는지 말해볼래?”

“말하기 싫어졌어요.”

“.... 너 혹시 정신이 이상하니? 혹시 방금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삐친 거야?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그래? 조용한 곳에서 얘기할까?”

“아뇨. 말하면 박사님이 화낼 것 같아요.”

박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화를 낼 것 같다고?”

“네.”

“내가 먼저 말하라고 물어본 건데 왜 화를 내?”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말할게요.”

“너 혹시 내 욕하고 다니니? 뒷담화를 했다고 고백하려는 건 아니겠지?”

“장난치지 마시고요.”

진중해진 내 얼굴.

박사가 흠칫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속할게.”

“꼭입니다.”

“응. 절대 화내지 않을게.”

나는 잠시 박사의 푸른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쯤, 담담한 투로 말했다.

“제 마음이 싱숭생숭한 이유는... 박사님 때문이에요.”

“.... 나?”

“네. 박사님이요.”

“왜...?”

박사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대충이나마 예상한 모양이다.

하긴,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바보지.

“저랑 술을 마신 날을 기억해요?”

“응... 기억해.”

“그때부터였어요.”

“.....”

이 정도면 충분히 직접적이었다.

누가 들어도 고백이라고 알아차릴 만큼.

긴장하는 척 입술에 침을 묻힌 나는 말을 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 마음을 바로잡기가 힘들어요.”

“.....”

“이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세요?”

“.....”

“만약 박사님이 제가 이러는 게 껄끄럽다면 지금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앞으로는 박사님이 싫어하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을게요.”

박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땅만 보고, 애꿎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새하얀 운동화의 선포에 거뭇한 때를 묻히고 있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했던 말과 행동을 곱씹고 있겠지.

나는 잠자코 박사를 기다렸다.

그녀에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고백을 들은 박사의 마음속에서 억지로 꽉꽉 눌러놓고 있던 외로움이 튀어나올 터다.

그 외로움은 박사의 마음 한켠을 정리해나가면서, 에드워드 파슨스의 조각상 옆에 내 조각상을 세울 공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장장 20여분 가까이 땅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려졌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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