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 기회의 땅, 미국 #2
나는 박사와 함께 판매자를 찾아다니며 폴리머스 구매에 대한 의향을 비쳤다.
판매자는 대부분 노인이었는데, 그들은 이사벨 파슨스가 조수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리고 그 조수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고 말이다.
구매 과정은 순탄했다. 구두계약이긴 했지만, 사기를 치려고 하면 그냥 빼앗아오면 돼서 걱정은 없었다.
슈트와 무기를 두 개씩 만들 분량을 확보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다.
나는 박사와 함께 저택 발코니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오늘 수고했어.”
“수고는 박사님이 하셨죠. 그런데 구두로만 계약해도 돼요? 만약 팔지 않겠다고 하면...”
“저 사람들은 세미나에 매번 참석하고, 각자 위치에서 최고로 높은 자리에 있어. 신용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돈만 입금하면 바로 보내줄 걸?”
“그런가요?
“응.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쪽팔리지만... 난 엄청 유명해. 그런 내가 폴리머스 판매자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하면, 사기꾼들은 앞으로 절대 미래과학계에 접근할 수 없어.”
“하긴, 그럴 만도 하겠네요. 내일도 여기 오나요?”
“네가 원하면 오고, 원하지 않으면 오지 말고.”
“폴리머스도 다 구했으니까... 오지 말죠.”
“알았어.”
나는 시선을 돌려 저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술에 거하게 취해선 노래를 부르는 놈들, 운전기사에게 몸을 맡기고 차로 가는 놈들, 사람을 붙잡고 자신이 아는 이론들을 늘어놓는 놈들 등등...
한심하다. 무식한 것들이 콧대만 높아선...
가라앉은 눈으로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칵테일을 홀짝이던 박사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실망했지?”
“뭐가요?”
“여기 사람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잖아. 축 쳐져있는 게 눈에 보여.”
“폴리머스 판매자 영감들은 눈빛에 총기가 있던데요? 박사님과 제게 깍듯한 태도를 고수했고요.”
“이쪽 과학계에 줄을 대고 있으니까 당연히 깍듯해야지.”
하긴, 폴리머스는 미래과학계에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물질이다.
과학자들이 아니었다면 폴리머스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테고, 의료 쪽에서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폴리머스 연구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이 이사벨 파슨스... 즉, 제니퍼 캐시 박사였다.
그 때문에 판매자들은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 모인다는 게 신선해요.”
“그래? 너도 몇 년 만 있으면 이곳에 발을 붙이게 될 걸? 그러다 나처럼 학을 떼겠지.”
“제가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분명히 그럴 거야. 넌 이런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럼 어디랑 어울리는데요?”
“연구실.”
나는 박사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오랜 시간동안 박사님 옆에 있고 싶어요.”
듣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는 고백이었다.
만약 박사가 과학자로서 이 말을 받아들였다면, 조수, 파트너로서 함께 가자는 뜻으로 들릴 것이다.
허나 한 사람의 여자로서 받아들였다면,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당황해할 테지.
“나도 마찬가지야. 열심히 잘해보자.”
박사의 대답은 태연했다.
과학자로서 받아들였구나.
그래도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갈 길이 엄청나게 멀진 않다.
그래, 한솥밥을 먹은 지도 오래 됐는데 슬슬 마음을 열어줘라.
너 내 알몸도 봤잖아? 일부러 보여준 것이긴 했지만.
박사는 칵테일 잔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팔짱을 꼈다.
나름 시원해진 저녁 공기를 잔뜩 들이켠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해.”
나는 나비넥타이를 풀어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박사처럼 난간에 팔을 기댔다.
박사의 옆모습을 보니 욕정이 끓어올랐다.
긴 속눈썹, 오똑한 콧대, 샤프한 턱선, 주름마저도 하나 없다.
누가 이 사람을 내일모레 40살이 되는 미망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왜 갑자기 사과를 하고 그러세요.”
“널 연구실에 데리고 온 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그래. 20대 청춘인데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잖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떠나고 싶어 할지도 몰라.”
잘만 즐기고 있는데... 요즘 실비아와 아델 때문에 조금 쫄깃하긴 하지만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박사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제 마음을 확인해보려고 하시는 거죠?”
그러자 박사가 날 돌아본다.
한참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녀가 말한다.
“유능하고 믿음직한 파트너잖아.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연구실에서 장비를 개발하는 게 좋고, 항상 박사님과 함께 하겠다고 누누이 말해왔습니다. 방금도 그랬고요.”
“알아. 그냥 다시 확답을 듣고 싶었어. 그리고 아까부터 느꼈는데, 정장 엄청 잘 어울린다.”
“박사님도 잘 어울려요.”
“생소한 모습을 봐서 그렇게 느낀 거지, 나중엔 별로라고 생각할 걸?”
“그럼 자주 보여주시면 되죠.”
그 말에 박사가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입에 손을 가져가 웃던 그녀가 손가락을 세워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돌아가자, 머리 아파지기 전에.”
“네. 뒷문을 찾아볼까요?”
“뒷문은 왜?”
난 말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저택 내부를 가리켰다.
그곳엔 여러 사람들이 박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사벨 파슨스임을 확신했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미간을 구긴 박사가 말한다.
“빨리 나가자.”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난 룸서비스를 시켜 음식을 받았고, 박사의 방에 가서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면서 박사가 눈을 찡그린 채로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고 있던 그녀가 묻는다.
“왜?”
“아침 먹자고요.”
“내려가기 귀찮은데...”
“룸서비스 시켜놨어요. 제 방으로 오세요.”
“그랬어? 잠깐만... 세수만 하고 갈게.”
“예.”
방으로 돌아온 난 가방으로 문틈을 막아놓고 자그마한 식탁에 음식들을 옮겨놓았다.
박사는 금방 찾아왔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그녀가 자리에 앉고는 방긋 웃었다.
“문틈은 나 들어오라고 막아놨던 거야?”
“맞아요.”
“고마워. 베이컨이네?”
“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베이컨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 않나요?”
“딱히 그렇지는 않아. 가끔 밤 새고 집에 들어가면 먹거든. 맛있게 먹어.”
“박사님도요.”
우린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전통적인 미국식 아침식사를 빠르게 먹어치운 나는, 아주 약간만 악셀을 밟아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박사의 뒤로 가서 그녀의 머리끈을 풀었다.
그러자 박사가 깜짝 놀란다.
먹던 토스트를 황급히 뱉어낸 그녀가 손을 뒤로 올려 내 팔목을 쳤다.
“너 지금 뭐하냐?”
“머리 다시 묶어주려고요.”
“그럴 필요 없어.”
“머리카락이 계속 입에 들어갔잖아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야! 너 지금...”
“가만히 계시라니까요? 금방 묶어줄 테니까.”
“.....”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던 박사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그녀의 머리 윗부분을 잡았고, 앞머리까지 가지고 와서 꼼꼼하게 묶어주었다.
그리고는 박사의 맞은편으로 돌아가 앉아 생글생글 웃었다.
“편하죠?”
“너...”
눈을 가라앉힌 박사가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내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더니 다시 닫는다.
“왜요?”
생글생글 웃은 나.
박사가 얕은 날숨을 내뱉더니 날 나무란다.
“앞으로 다짜고짜 그렇게 하지 마.”
“왜요?”
“왜냐니... 최소한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네겐 세화가 있잖아.’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물어보기라도 하라고?
어제 밤 칵테일을 마셔서 감수성이 조금 높아진 상태였다면 몰라도, 멀쩡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예상외로 날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앞으로는 조심해줘.”
싫은데?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걸 알았으니까 계속 할 예정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은 박사가 베이컨을 입으로 가져갔다.
얼마 뒤 아침을 다 먹은 그녀는, 물로 입가심을 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 간다? 잘 먹었어.”
“네. 아, 박사님.”
“왜?”
“오늘 미술관 가실래요?”
“미술관...? 갑자기?”
“저랑 같이 관광해요.”
박사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고민을 하는 기색이 보인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폴리머스 판매자에게 돈을 입금해야 되지 않을까?”
“돈이야 여기서도 입금할 수 있는데요? 전화 한 통이면 돼요. 게다가 왜 이렇게 급하세요? 저흰 폴리머스가 오면 디바이스 제작에 착수하기로 했잖아요. 그게 바로 오는 물건도 아니고... 빨리 와도 나흘 이상은 걸릴 텐데?”
박사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너 왜 이렇게 태평하니? 언제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잖아. 모두가 평화를 얻었다고 말할 때가 제일 위험한 때인 거 몰라?”
“대비는 해놨어요. 이블리언 탐색기를 세화와 유리아 씨의 디바이스에 연동해놨고, 범위를 넓혔죠. 내장된 포탈도 있으니까 마물이 출몰하면 두 사람이 곧장 움직일 거에요.”
할 말이 없어진 박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잠깐 고뇌하던 그녀가 말한다.
“세미나도 엄청 실망스러웠으니까... 조수 한 명 구제해준다고 생각할게.”
승낙이었다.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되지 핑계거리를 붙이기는...
“감사합니다.”
“대신... 미술관만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텍사스는 나랑 맞지 않는 곳이야. 날씨가 너무 더워.”
남편 때문에 그런 거군.
그 정도야 승낙해주지.
“알겠어요.”
**
“제발 촐싹대지 말아줄래? 가만히 좀 있어.”
먼발치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든 박사의 타박.
미술관 입구에 선 나는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니, 제가 뭘 촐싹댔다고 그러세요? 다리 벌린 게 죄인가?”
“몸짓이 아니라 표정을 말하는 거야. 그냥 웃지 혓바닥은 왜 내미는 건데?”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요.”
“아까운 얼굴 막 쓰지 말고, 그냥 무표정으로 앞을... 아니다. 다리 모으고 옆을 봐봐. 분위기 살려보자.”
아까운 얼굴이라고? 자연스럽게 날 칭찬하네? 아주 기쁘다.
“아니, 그냥 찍어주시면 되잖아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지금까지 몇 장이나 찍었는데 다 이상한 포즈였잖아. 내 말대로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싫어요.”
“똑바로 서. 얼른.”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그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나는 군인처럼 딱딱한 차렷 자세를 했다.
팔까지 찹! 소리가 나도록 골반 옆에 붙이자, 박사가 황당한 듯 헛웃음을 켰다.
“진짜 이럴래?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라 박사님이 강제로 바꾸려는 거잖아요.”
“잘 찍어준다니까?”
“그럼 전 이 상태로 있을 테니까 잘 찍어주세요.”
“이게 진짜...”
박사가 날 다시 타박하려는 순간, 옆에서 인상이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물었다.
“보기 좋은 커플이구려. 내가 찍어줘도 괜찮겠는지?”
그에 박사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저흰...”
이 기회를 놓치면 병신이지.
나는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박사의 말을 끊었다.
“같이 찍어요! 빨리요!”
그 말에 어깨를 움찔 떤 박사가 나와 노부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뱉고는 할아버지에게 휴대폰을 넘겼고, 내게 다가와 나란히 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 내 쪽으로 당겨왔다.
그러자 그녀가 할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오물거렸다.
“손 떼지?”
“왜요? 불편해요?”
“그건 아니지만... 능글맞은 짓 좀 하지 마.”
“할아버지도 커플이라고 했잖아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요?”
“저 할아버지가 눈이 침침하신가봐. 누가 봐도 커플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오해하셨어.”
애써 변명을 하는 걸 보니 세화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오해하시긴 하셨네요. 엄마와 아들이 적당한데.”
“그 정도로 늙어 보이지는 않거든? 너는 사진 찍고 나서...”
우리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휴대폰으로 각도를 재던 할아버지가 한손을 들었다.
찍겠다는 뜻. 박사가 말을 멈추고 손을 앞으로 모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그녀가 웃겼던 나는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희미하게 찰칵 소리가 들리고,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박사에게 휴대폰을 내민다.
“잘 찍혔으니 한 번 보시오.”
“아, 감사합니다...”
“좋은 사랑 하시기를 바라오.”
그리 말한 할아버지는 아내와 함께 멀어졌다.
박사는 그런 노부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를 슬쩍 곁눈질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 모양.
애써 태연한 척한 그녀는 찍힌 사진을 보더니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사진이 정말 잘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구도가 좋은 게 아니라, 우리의 표정이 아주 좋았다.
수줍은 포즈로 환하게 웃는 박사, 그리고 옆에서 함박미소를 짓고 있는 나.
누가 봐도 금슬이 좋은 부부, 혹은 커플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보기가 좋은 사진이었다.
박사의 시선은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 얼굴에 남편의 얼굴을 씌우고 있는 건가? 예전 추억이라도 생각난 거야?
복잡한 기분이 들고 있는 건 확실하다.
의외의 소득을 얻었어. 미국에 축복이 있기를.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지구를 정복하더라도 저 할아버지만큼은 무조건 편하게 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잘 찍혔네요?”
“어? 응... 잘 찍혔네.”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 들어가자.”
나는 미술관 입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계속 사진만 보고 있는 그녀.
나는 큰 목소리로 박사를 불렀다.
“박사님! 뭐해요? 안 들어갈 거에요?”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박사가 고개를 털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게로 다가온 그녀가 중얼거린다.
“성격 참 급하다 너?”
“기대되니까 그렇죠. 천천히 구경하다가 점심 먹고 돌아가요. 아, 사진 보내줄래요?”
“사진? 아... 이건 나중에... 점심 먹을 때 보내줄게.”
딱 보니까 절대 보내주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겠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박사와 보폭을 맞췄다.
돌아가면 뭐하지? 폴리머스가 올 때까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자연스레 서로의 몸을 터치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활동적인 데이트를 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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