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7 기회의 땅, 미국
댈러스 국제공항의 활주로 구석에 자리한 내 전용기.
거기에서 내린 박사가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린다.
“여기도 정말 오랜만이네...”
그녀를 따라 뻑적지근한 몸을 푼 내가 물었다.
“오랜만이요?”
“남편이랑 여기서 살았었거든.”
“그렇구나...”
“빨리 움직이자. 피곤하다.”
피곤하긴 무슨. 남편 생각 때문에 힘든 거겠지.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저 마음을 빨리 내게로 돌리고 싶다.
“알겠습니다.”
입국수속을 마친 우린 곧장 휴스턴의 최고급 호텔로 향했다.
박사는 내가 모든 경비를 내는 것에 부담스러워 했다.
예전 강화도에서 철판을 깔고 호텔비를 내달라고 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반응.
갑을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저번에도 생각했듯, 급발진해서는 안 된다.
차근차근, 스텝을 밟으면서 공략해나가는 거다.
박사의 마음속엔 단단하기 그지없는 남편, 파슨스의 조각상이 있다.
그 높이는 하늘과 맞닿을 정도의 마천루보다 높을 테지.
처음부터 저걸 깨뜨리려 하면 안 된다.
놈의 옆에 내 조각상을 하나 설치해놓고 크기를 불려나가는 게 먼저다.
그나저나 단둘이 오니 마치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괜히 설렌다. 세화와 첫 섹스를 했을 때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박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내가 물었다.
“오늘은 푹 쉴 거죠? 간단하게 식사하시고 쉴까요?”
“그러자. 짐만 풀고 로비에서 만나는 걸로 할까?”
“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린 각자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고, 웃기게도 거의 동시에 문을 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박사가 무안했는지 헛웃음을 켰다.
“너 일부러 내가 나올 때 맞춰서 나온 거 아니지...?”
솔직히 그러려면 그럴 수 있었다.
청각을 집중한 다음 박사가 나올 때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우연이었다.
운명... 그래, 이건 운명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제가 그런 능력도 있었나요?”
“너는 있을 것 같아. 기본적으로 음흉하잖아.”
장난이 분명함에도 괜히 찔린다.
어떻게 알았지? 이 감 좋은 년...
애써 웃은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흉한 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농담이야. 내려갈까?”
“요새 장난이 부쩍 느셨네요?”
박사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부끄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저러는 모습이 귀엽다.
평소 박사의 모습과 매치가 안 되지만 오히려 어울렸고, 신선했다.
조만간 자주 보겠군.
레스토랑에 들어간 우린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뭐 먹을래?”
“박사님이 주문해주세요.”
“왜? 영어울렁증이라도 있어?”
“또 농담이죠?”
“응.”
나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좋네요. 옛날의 박사님은 딱딱해서 다가가기 힘든 구석이 있었는데.”
“그랬어?”
“네. 솔직히 무서웠어요.”
“지금은 아닌가보네?”
“많이 편해졌죠. 주문할까요?”
방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박사가 웨이터를 불렀다.
여러 음식을 시킨 우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세미나에 관한 얘기였다.
“사실 연구실에서는 말 못한 게 있는데... 그쪽에 꼴통들이 조금 많아. 네 지적 호기심이 채워질 가능성은 없다고 봐.”
“견식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잖아요. 여러 의견을 들어봐야 식견이 높아지죠.”
“좋은 자세긴 한데... 솔직하게 말해줄까? 거기 있는 머리 빈 놈들보단 네가 훨씬 똑똑해. 배울 점은 단 하나도 없을 거라고 장담할게.”
“그 정도에요...? 유명한 사람들만 모인다면서요?”
“유명한 거랑 똑똑한 거랑은 별개지.”
“아무리 그래도 미래과학 분야의 최고들일 텐데...”
“나보단... 아니, 우리보단 못해.”
나는 입을 아치형으로 만들었다.
반신반의하는 내 표정을 본 박사가 말을 잇는다.
“실력도 없는데 고집불통인 사람들이 수두룩하지. 그런 사람들이 미래과학을 좀먹고 있어. 왜 이런 말 있잖아. 어설프게 아는 것보단 모르는 게 더 낫다고. 그 어설프게 아는 것에 딱 부합하는 사람들이야.”
“너무 깎아내리는 거 아니에요...? 같은 동료들인데...”
“기대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리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참아. 무식한 놈들이지만 유명하긴 해서 한 번 입소문이 나면 큰일이 나니까. 그냥 폴리머스만 구하러 간다고 생각해.”
열 받으면 몰래 죽이면 되지.
“뭐... 알겠습니다.”
**
다음 날, 우린 간단하게 산책을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후덥지근한 텍사스의 공기를 마신 내가 물었다.
“아침식사 끝내고 관광이라도 하실래요?”
“아니, 저녁까지는 쉬고 싶어. 너도 돌아다닐 생각 말고 푹 쉬어. 거기 갔다 오면 분명히 진이 빠질 테니까.”
이 정도면 거의 억하심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수준인데...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박사가 웃는 낯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저녁 7시에 로비에서 만나자. 알았지?”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 아쉽다.
순순히 대답한 나는 방으로 돌아가 리무진을 신청해놓았다.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세미나는 꼰대들의 집합소 같았다.
그렇다면 모양 빠지게 택시를 탈 수는 없지.
우리 제니퍼 캐시 박사는 완벽해야 해. 놀림거리가 되선 안 돼.
그날 저녁. 로비에서 박사를 기다리던 나는,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리 위로는 흰색, 아래는 검은색인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너무나 고혹적이었기 때문.
마름모꼴로 툭 튀어나온 골반,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로 파인 넥, 한쪽만 오픈된 어깨를 보자니 절로 침이 삼켜진다.
악세서리는 팔찌 딱 하나가 끝.
밋밋해 보일 법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코디가 완성됐다.
여기서 화장까지 더하니 미의 여신이 따로 없었다.
쇄골부터 목까지 은은하게 드러나는 몇 가닥의 힘줄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오른쪽 눈을 살짝 가린 머리카락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다.
특히나 섹시한 부분은 아주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온 윗배, 그 가운데에 자리한 도랑이다.
당장 핥고 싶어서 미칠 정도였다.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 박사가 킥킥 웃으며 파우치를 든 손으로 내 팔을 친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아... 죄송...”
“입 닫아. 침 흘리고 있잖아.”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턱으로 가져가 쓱 닦았다.
그 행동에 박사가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한참 웃던 그녀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안 흘렸어. 너 요새 진짜 웃긴 거 알아?”
“그...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내 칭찬에 박사가 실소를 터뜨렸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세화가 화낼 텐데?”
“세화는 지금 없잖아요... 근데 여긴 가리면 안 될까요?”
나는 내 가슴팍 앞 허공에 손가락을 대고 지퍼를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박사가 당황해했다.
“신경 쓰지 말지?”
“신경이 안 쓰이게 생겼습니까 지금?”
“택시나 잡아. 혼나기 전에.”
남들이 네 가슴을 보는 게 싫다고!
서운한 마음을 감춘 나는, 내 어깨 뒤를 가리켰다.
“리무진 신청해놨어요.”
“뭐...? 고작 15분 거리인데...?”
“기분 좀 내보려고요. 얼른 타죠.”
“넌 진짜 못 말리겠다... 그래... 타자.”
세미나가 개최되는 장소는 저택이었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저택. 부호가 여는 장소인 듯싶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난, 밖에 사람들이 많자 놀랐다.
이 정도면 안은 북적거리겠는데?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죄다 모인 건가?
내가 눈을 데굴 굴리고 있자, 박사가 옆으로 오더니 말한다.
“쫄지 마.”
“아, 예... 근데 여기에 젊은 사람들도 있어요...?”
“있기야 하지. 30살 안팎으로.”
“30살...? 그게 젊은 건가요?”
“내 기준으로 30살이면 젊지 않나? 얼른 들어가자. 칵테일이라도 마시고 싶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슬쩍 박사의 눈치를 보았다.
입장할 때까지만이라도 팔짱을 끼고 싶은데... 물어봐야지.
“팔짱 껴도 돼요?”
“아니.”
안 되는군.
“예. 안 까불게요.”
나는 체념어린 눈길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박사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설마 진짜로 이럴 줄은 몰랐던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지금 무슨...”
“구색은 갖춰야지. 딱 입장할 때까지만이다?”
날 남자로서 좋아하기에 팔짱을 낀 게 아니다.
정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한 거다.
하지만 이런들 저런들 뭐 어떠하리? 뭐든 스킨십을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알겠습니다.”
**
박사의 초대장 덕분에 무사히 저택에 들어온 나는, 간단한 칵테일을 주문하고 분위기를 살폈다.
저택 안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지구의 미래과학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온갖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잠자코 학자들의 면상을 살피고 있는 내게, 박사가 말을 걸어왔다.
“어때?”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요? 오프닝은 아직이에요?”
“딱히 오프닝이라고 할 건 없어. 그냥 자유롭게 토론하는 자리일 뿐이야. 겸사겸사 친목도 다지고.”
“중심을 잡아줄 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토론을 하고 친목을 다져요?”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아.”
“아...”
엘리트 집단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지들끼리 다 해쳐먹으려고 해.
나중에 내가 지구를 정복했을 때, 아주 공평하게 모가지를 따주지.
“세미나가 아니라 친목회 수준이네요.”
“정확해. 난 이제부터 발품을 팔아볼게. 폴리머스 판매자를 찾으면 부를 테니까 여기 있어.”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일단 내가 먼저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아까부터 자꾸 서운하게 말하네? 확 보영이처럼 따먹어버릴라...
“알았어요...”
“다녀올게.”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어색한 미소를 지은 박사가 내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엔 박사의 미모에 홀딱 반한 건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었다.
박사를 바라보는 년놈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는 이사벨 파슨스의 얼굴과 대조해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이름으로는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저럴 만도 하네.’
몇몇 놈들이 박사의 가슴을 슬쩍 곁눈질하고 있기는 했다.
사형, 너도 사형... 저 새끼도 사형.
그들을 내 살생부에 올려놓고 있는데, 한 4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근처로 다가와 묻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웨이터는 아니겠고... 혹시 조수인가?”
“예, 알렉스 송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조수지?”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내가 이름을 알려줬으면 네 이름도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너도 사형이다.
“그냥... 나노튜브, 폴리머스 전문가의 조수에요.”
“스승의 이름을 밝히기 싫다 이거로군. 그나저나 나노튜브에 대해서 잘 아나?”
“배열에 대해선 많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배열 교체연구를 하고 있어요.”
그 말에 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연구를 하고 있군. 나노튜브는 정석적인 배열을 사용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져.”
나는 왜 박사가 어제 이놈들을 깎아내렸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 부류.
그 한심한 잣대를 가진 채 남들을 평가하려고 하는 인간들.
심지어는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만큼 있지만, 이런 놈들은 남의 말을 들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토론하는 건 시간낭비. 그냥 무시로 일관하는 게 나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대체 어떤 학자에게서 배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배웠군.”
“알겠다니까요.”
“젊은 친구라 혈기가 왕성해서 그런가? 오만하구나. 그런데 그거 아나? 여기서 젊었을 때 천재소리 안 들어본 사람은 없어.”
아니 씨발 뭐 어쩌라고?
너는 최우선 사형이다. 돌아가자마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주지.
나는 한참동안 중년인이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걸 힘들게 들어주었다.
더 이상 한 귀로 흘리기가 어려워지면서 슬슬 짜증이 나던 찰나, 멀찍이서 박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근처에서 멈췄다.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를 띠운 채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어때? 내가 했던 말이 정확하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
쓴웃음을 지은 내가 중년인의 뒤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이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
“.... 그래서 나노튜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응? 누가?”
중년인이 말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틈을 탄 나는 잽싸게 인파에 섞여 박사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날 보던 박사가 킥킥거리며 묻는다.
“엄청 재빠르네? 벌써부터 피곤해지지? 내가 말했잖아.”
“그게... 저분만 그런 거일 수도 있잖아요.”
“여기 절반 이상은 저 사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걸? 예전엔 저런 놈들도 순수했어. 하지만 여기서 권력 맛을 보더니 변했지. 그냥 기대하지 마.”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나.
박사는 내 얼굴에 담긴 실망감을 보더니 소리죽여 웃었다.
“내 말을 믿지 않은 네 잘못이야.”
“지금 위로가 절실한데... 그만 놀려요. 판매자는 찾았어요?”
“응. 찾았어. 조금만 천천히 갈까?”
말투를 보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목에 힘을 빼며 허탈한 얼굴을 했다.
“빨리 가죠...”
“앞으로 말 잘 들어야 된다? 오늘처럼 후회하기 싫으면.”
아니, 네가 내 말을 잘 들어야 돼.
내가 하라는 건 뭐든지 해야 된다고.
“그만 놀리라니까요...”
“알았어. 얼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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