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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134화 (134/471)

EP.134 박사 공략 개시 #2

“너는 순진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잘 먹다 말고 웬 이상한 질문?

나이프를 내려놓은 내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첫 만남을 기억해?”

“그야... 기억하죠. 암두시아스라는 말머리 마물이 나타났고, 세화가 변신했고... 건물 잔해에 깔려있던 저는 박사님의 비행선에 의해서 구조됐고...”

“연구실에 갔을 때 네가 보였던 반응이 정말 웃겼던 거 알아?”

당시 의료기기와 연구실의 각종 기계들을 보고 흥미를 가졌었다.

물론 가짜흥미지만 기계광 공돌이를 연기해 박사의 호감을 샀었다.

나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입장에선 눈이 돌아갈 만한 것들밖엔 없었어요. 박사님 덕분에 식견도 높아졌고요.”

“그만두고 네 돈으로 여러 실험을 해볼 수 있을 텐데도 그러지 않는 이유가 뭐야?”

“박사님이 그만두지 말라면서요.”

“진지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진지하게 말해줄까?

세화와 유리아, 그리고 널 떨어뜨리려고 붙어있는 거다.

두 사람은 마족이 됐고, 이제 남은 사람은 너지.

다시 나이프를 들려다 멈춘 나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아냈다.

여기서 악셀을 밟을 수도 있다.

박사님 혼자 두지 못하겠다... 같은 말을 하면서.

하지만 박사를 공략할 때도 생각했듯, 천천히 하는 거다.

어차피 기회는 오게 되어있다.

일주일 뒤부터 거의 매일 붙어있게 될 텐데,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 보면 눈이 맞게 되어있는 건 공식이지.

네 머릿속에 있는 남편의 존재를 서서히 지워주마.

“세화를 위해서에요.”

“세화를 위해서?”

“네. 유리아 씨는 감정기복이 별로 없고 정신력도 굉장히 강해요. 타이라트에게 왕국이 멸망해 사라져서 목적의식까지 충분하죠. 웬만해선 정신이 무너지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세화는 달라요. 유리아 씨보다 정신력이 훨씬 약하죠.”

“난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하면 의지가 굳건해져. 레오나가 흔들리는 거 봤어?”

“그 말이 아니에요. 레오나가 아니라 세화일 때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

“네. 세화는 유리아 씨와는 처한 환경 자체가 달라요. 평범한 대학생으로 잘 살다가 뜬금없이 비스트 슬레이어가 됐죠. 변신이 풀리면 힘들어해요. 박사님도 알잖아요.”

세화는 박사의 앞에서 여러 번 말실수를 했었다.

그걸 상기해낸 박사가 동의했다.

“그건 맞아.”

맞긴 뭐가 맞아.

타락하기 전의 세화는 박사의 말마따나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박사와 말다툼을 한 건 순전히 나 때문.

내가 세화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바른 길로 인도해줄 길잡이가 필요해요. 제가 연구실에 있는 건 그것 때문입니다. 디바이스 충전도 해야 하고요.”

그 말에 박사가 움찔했다.

디바이스 충전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창피함을 느꼈나보다.

당황해하던 그녀는 곧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세화를 케어하는 거랑 디바이스 충전은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연구실을 나가도...”

“그럼 나갈까요?”

“아니, 나가지 마.”

정색을 하며 반대하는 박사.

히죽 웃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아, 연구실에 붙어 있어야할 다른 이유도 있어요.”

“다른 이유? 그게 뭔데?”

“이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식사나 마저 하실까요?”

“그러자.”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박사가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그녀의 길고 좁은 입이 앙 벌려지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음식에 포크를 가져갔다.

식사를 마친 우린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화도 시킬 겸 근처 산림공원의 산책로를 나란히 걸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박사님은 힘들지 않으세요?”

“나야 뭐... 장비를 개발하다보면 시간이 잘 가서...”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디바이스 개발을 해야 하니까... 그럴 수도 없게 됐네요. 제가 최대한 열심히 돕겠습니다.”

내가 의지를 다지자, 박사가 실소를 터뜨리며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공기 진짜 좋지 않아? 날씨도 슬슬 풀려가고... 매일 밖에 나오고 싶어져.”

“저랑 자주 산책해요.”

박사는 대답하지 않고 날 돌아보았다.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는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참을성을 가지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박사가 뜬금없는 말을 한다.

“난 널 도저히 모르겠어.”

“예?”

“어쩔 땐 세 살짜리 어린아이 같은데, 또 어쩔 땐 엄청 어른스러워.”

“제가 언제 어린아이 같은데요?”

“비스트 슬레이어라는 유치한 이름을 붙인 것도 너고, 세화에게 레오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너고... 기계에 흥미를 가질 때나, 이번에 중앙정보국에 거미 영웅 코스튬을 입고 찾아간 거나... 한두 가지가 아니야. 아,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순수해서 좋다는 뜻이었어.”

“머리가 약간 모자라다는 건가요?”

농담 식으로 자책을 하니 박사가 킥킥거리며 내 팔을 툭 친다.

아주 좋다. 터치에 거리낌이 없어지는 모습이.

“아니라니까. 정말 칭찬이었어. 널 보고 있으면 자주 웃게 돼.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재주가 있는 건 큰 장점이야. 왜 세화가 널 그토록 따르고 좋아하는지 알겠다. 네가 없었다면...”

잠깐 침묵하고는 침을 삼킨 박사가 말을 잇는다.

“네가 없었다면 연구실이 정말 삭막했을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유리아를 만나기도 전에 와해됐을지도 몰라.”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을...”

“그만큼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었다는 거야.”

“박사님한테요? 아니면 연구실한테요?”

“둘 다.”

박사의 속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남편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와 네 남편이 낄낄거리며 유치한 장난을 하는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지?

나는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말을 돌렸다.

“오랜만에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좋네요.”

“세화랑은 이런 얘기 같은 거 안 해?”

“대부분은 제가 세화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편이죠.”

“그렇구나...”

“세화가 제게 의지하듯, 저도 박사님에게 의지가 돼요. 스승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낯부끄러운 말은 하지 말아줄래?”

“사실인데 왜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린 박사가 공원에 마련된 야외 운동기구로 시선을 돌리더니,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노부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노부부가 담소를 나누며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게 부러울 테지.

나는 박사를 지나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오금을 펼 수 있는 운동기구에 앉았다.

그리고는 박사를 향해 손짓했다.

“맞은편에 앉아보세요.”

“응? 갑자기?”

“저랑 잠깐 놀다가 가요.”

망설이는 박사.

나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했다.

“매번 앉아계시는데다 나이도 있으시니까 관절이 삐걱댈 거 아니에요.”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신체나이는 젊어.”

“아닐 걸요?”

박사가 헛웃음을 켜더니 날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다리 전체에 힘을 주고 밀면 돼요. 자... 이렇게...”

나는 무릎을 천천히 폈다가 다시 구부렸다.

그러자 내 몸이 사선으로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 시범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사가 다리에 힘을 줬다.

몸이 쭉 올라갔다 내려오는 느낌이 생소한 듯, 박사가 오... 하는 감탄을 터뜨린다.

그렇게 박사와 리듬을 맞춰 몇 번 무릎을 굽혔다 펴길 반복하니,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재밌죠? 그네 타는 거 같지 않아요?”

“별로... 근데 이게 운동이 돼?”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처음 할 때 관절에서 뚜둑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귀가 약간 이상하구나? 이비인후과라도 가볼래?”

뚜둑!

말을 하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던 박사의 무릎에서 선명한 소리가 났다.

내 볼이 순식간에 부풀려지면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푸흡... 으하하하!”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 낄낄 쪼개는 나.

얼굴이 새빨개진 박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급하게 말한다.

“조, 조용히 안 해? 소리 좀 났다고 신나하기는...”

“으히히히... 제 귀가 이상하다고요?”

“시끄러...! 이게 미쳐가지고...”

날 타박하던 박사는 이내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금을 펴길 반복하던 그녀가 말한다.

“고마워, 지혁아.”

“뭐가 고마... 응? 뭐라고요?”

“고맙다고.”

“그 뒤에요. 분명히...”

“여기까지 하자. 무릎 아프다.”

내 말을 뚝 끊어버린 박사가 기구에서 나와 공원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쏭이 아니라 지혁이라... 호감작 한 번 제대로 성공했구나.

나는 박사의 뒤를 쫓아가면서 그녀를 놀렸다.

“무릎 아프다고요? 신체나이는 젊다면서!?”

그 말에 박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상당히 창피한 모양. 꽤나 귀엽다. 놀리는 맛도 있고.

나는 후다닥 달려가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왜 버리고 가요? 미아 될 뻔했네.”

“미아는 무슨... 네가 애냐?”

“어쩔 땐 어린아이 같다면서요. 지금이 그때인가 보죠.”

“나한테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를 않는구나? 마음에 안 들어.”

말은 그렇게 해도 박사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저 큰 젖통에 얼굴을 묻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싶다.

이렇게만 하자.

**

다음날 밤.

나는 남극기지의 구석에서 세화를 이블 발키리로 변신시켰다.

레오나로 변한 그녀의 몸에선 거뭇한 마기가 기세 좋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델라인이 감지할까 무섭네 이거.

보라색 동공을 굴린 레오나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시뻘건 낫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그건...”

“그래, 네 무기다.”

드디어 완성한 데스 사이드의 길이는 170cm 정도로, 레오나의 키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었다.

날이 아치형으로 길게 휘어진데다 무척 예리해서, 한 번 횡으로 휘두르면 인간 몇 명의 모가지를 깔끔하게 딸 것 같았다.

낫을 역수로 쥔 나는 손잡이를 레오나에게 넘겼다.

“한 번 잡아봐라.”

“아, 네!”

침을 꼴깍 삼킨 레오나가 낫을 한손으로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스으으...!

마기가 낫을 감싸더니 검은 기운을 뿜어냈고, 이내 크기를 불렸다.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가 사용했던 필살기처럼 두 배 가까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침식된 아이테르의 힘과 공명해서 파괴력이 늘어났을 것이다.

만능 물질인 폴리머스로 만들었기에 가벼운데다 내구성까지 뛰어났다.

숨겨둔 기능까지 합치면 내 역작이라 할 만한 무기.

레오나도 마음에 드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대... 대단해요...! 자연스럽게 제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네...?”

“아스타로트를 알고 있겠지?”

레오나의 눈이 불타올랐다.

“알아요. 그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아... 비스트 슬레이어 시절에 아스타로트가 부츠를 태워먹은 전적이 있었지.

그때 세화가 정말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었다.

그 기억이 남아있어서 마족이 되었는데도 이가 갈리는 모양이다.

“네 손으로 죽였잖느냐.”

“그건 맞아요. 근데 아스타로트는 왜...”

“아스타로트의 능력이 이 낫에 들어가 있다. 생명체의 무기력한 기운을 얻으면 얻을수록 낫의 힘이 강대해지지.”

“네에...?”

“서해 깊숙한 곳에 아직도 아스타로트의 기운이 남아있더구나. 천만다행이었지. 마르셀라가 열심히 모아서 그 낫에 집어넣어놓았다.”

아스타로트는 힘을 키우는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능력 하나만큼만 놓고 보면 정말 대단한 마물이었다.

정신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의욕 자체를 저하시키는 무기력감은 마물들 중에서도 쉬이 볼 수 없었다.

“정말요?”

레오나의 세로로 된 동공이 조금 확장됐다.

아스타로트의 능력을 잘 아는 만큼 그녀도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 마르셀라가 인간들을 잡아오면 실험해 봐도 좋다.”

“알겠습니다아...”

기대감 어린 눈을 하는 그녀.

오늘 하루 종일 인간들의 모가지를 따겠구나.

나는 세화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당부했다.

“곧 있으면 개강이지? 얌전히 다니고 있어라.”

“물론이에요. 절대 사고치지 않을게요.”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그래, 사고만 치지 마라.

마음 편하게 박사를 공략하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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