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박사 공략 개시
몰래 만들어둔 논현동의 지하층 건물.
이곳은 겉보기엔 패션기업의 물류창고처럼 보였다.
아니, 물류창고가 맞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예전 창고였지만.
나는 그 안의 사무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문이 열리더니, 사무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천천히 열리며 젊은 여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세요...? 이지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제 연수에게 말했던 배우 연습생이었다.
난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아, 네...”
다소곳한 몸짓으로 맞은편에 앉는 그녀.
내가 말했다.
“송지혁입니다. WW엔터와 사업 협력을 하고 있어요. 혹시 이야기는 들어보셨는지?”
“네, 연수에게 들었어요. 그...”
지혜가 날 보며 우물쭈물해했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는 모양.
나는 그녀를 향해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그럼 대표님이라고... 할게요. 대표님 친구분께서 저와 사진을 찍고 싶으시다고...”
“맞아요.”
“어디... 계신가요?”
“조금 있으면 올 겁니다. 근데 지혜가 본명이에요?”
“아니요. 본명은 따로 있어요... 소속사 사장님께서...”
“단아한 인상이시니까 점잖은 이름을 고른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커피라도 드실래요?”
“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랍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일반인에게 악의를 주입하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커피에 피를 탈까? 아니면 강제로 고꾸라뜨릴까?
전자부터 해보자.
난 지혜 몰래 손가락을 따고 악의를 생성해 피와 함께 집어넣었다.
커피를 다 탄 나는 접시에 받쳐 책상으로 가지고 왔다.
그러자 지혜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커피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태도가 상당히 공손하다. WW엔터에서의 내 위치가 상당히 높아 그런 것 같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회사와의 연계로 인해 WW엔터는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본다면 깍듯이 대하라고 소속사 사장이 그랬겠지.
연수도 지혜에게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을 테고.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지혜.
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변화가 있나 확인해보았다.
그런 내 시선이 불편했는지, 지혜가 눈을 피했다.
“몇 살이야?”
내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말.
지혜가 깜짝 놀라 말을 더듬는다.
“스... 스물넷이에요.”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악의를 주입당해 그런 게 아니라, 내 낮은 목소리와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바뀐 게 없구나. 한 모금만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바뀌었는데 원래 성격이 유지되는 건가?
알아볼 방법은 하나였다. 비정상적이고 치욕스런 일을 시켜보는 것.
“옷을 한 번 벗어볼래?”
“네...?”
믿어지지 않는 눈을 한 지혜.
변화하지 않았구나. 한 방울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커피 안에 들어가서 희석되었다 쳐도 조금 서운하다.
명색이 마왕인데... 한 방울로 일반인을 함락시키지 못하다니.
대놓고 피를 먹여봐야지.
스폰이니 뭐니 하는 말로 지혜를 꼬실 생각은 없다.
나는 두려움으로 점철된 지혜의 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사과는 해줄게. 미안하다.”
“무, 무슨 말씀... 이세요...?”
난 말없이 지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패닉이 왔는지 멍하니 있다가, 내가 지척까지 접근하자 정신을 차리고는 구석자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쿵쿵!
벽을 쳐대면서 한손으론 휴대폰을 꺼내 신고를 하려고 한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살려주세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악을 지르는 그녀.
먹통인 것도 모르고 있나보다.
난 지혜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채 내 쪽으로 끌고 왔다.
그러자 지혜가 날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익...! 사람 살려어!! 도와주세요!!”
귀가 얼얼하다. 목청 한 번 크구나.
난 지혜의 입이 벌어질 타이밍에 맞춰 팔을 들이밀었다.
“으엡!”
입이 꽉 막힌 그녀가 날 올려다본다.
바짝 겁을 먹은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빨리 깨물어봐. 그래야 활로를 찾을 거 아냐.
점점 지혜의 이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살짝 고통스러운 척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지혜가 내 의도대로 팔을 강하게 물었다.
꽈아악...
동시에 피가 터져 나오면서 지혜의 입 주변을 시뻘겋게 물들인다.
나는 히죽 웃으며 지혜의 턱을 타고 떨어지는 검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팔은 절대 빼지 않았다. 그녀가 피를 삼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으읍! 으우읍!”
피맛을 느낀 지혜가 온갖 발악을 하기 시작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 그러나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코로만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는지 지혜가 목을 꿀렁였다.
그 순간,
“으으우...”
지혜가 눈을 까뒤집더니, 그녀의 몸에서 거뭇한 기운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난 그제야 팔을 빼냈다.
“케헥! 켁!”
기침을 하며 철퍼덕 주저앉은 지혜.
그녀의 입에서 타액에 의해 희색된 피가 주르륵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의자를 끌고 와 지혜의 앞에 놓고 앉은 나는 잠자코 대기했다.
한참동안 목에 뭐가 걸린 듯 켁켁대던 지혜는,
“.....”
기침이 멎자 산발이 된 머리를 올리고는 날 쳐다보았다.
일단 지혜의 이목구비는 그대로. 몸도 정상이었다.
마가렛 같은 마물화가 되지 않았다는 뜻.
당연했다. 그런 마물화는 유리아의 자각몽에서 만든 가상의 효과였으니까.
수건을 집어 팔에 댄 내가 지혜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벗어.”
“.... 네...”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지혜가 흐물흐물 일어나더니 티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성공했구나.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속옷까지 벗어던진 그녀는 알몸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다.
“네 본명부터 가족관계까지 다 말해봐.”
“저는 이유영, 24세고 부모님과 함께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니가 한 명 있고,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
더 볼 것도 없겠군. 나는 지혜의 말을 끊었다.
“그만.”
“.....”
깜짝 놀란 지혜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를 앞에 둔 나는 다리를 꼬았다.
감정이 드러나는 건 좋은데 너무 수동적이다.
이렇게 한 번 해볼까?
“넌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리고 내 앞에서도 가면을 쓰고 예전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거야.”
“네, 대표님...”
“오늘 여기서 뭘 했지?”
“지혁 씨의 친구분과 사진을 찍었어요...”
“그 다음은?”
“그 다음... 으음...”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던 지혜가 말을 잇는다.
“그 다음 창고에서 여러 옷들을 선물로 받아 돌아갈 거에요.”
됐다. 핑계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낼 정도라면 충분히 능동적인 꼭두각시지.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물류창고 구석에 샤워실 있어. 샤워하고, 여기서 아무 옷이나 입은 다음 돌아가. 내 연락은 최우선 순위로 받고.”
“네...”
씨익 웃은 나는 지혜를 남겨두고 창고를 나섰다.
첫 실험은 만족스럽다.
악의가 얼마나 들어가야 물들여지는지도 알게 됐고, 떨어진 지혜의 마기는 미세했다.
이 정도라면 지척까지 접근하지 않는 이상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지혜는 앞으로 인간사회에 잘 섞여서 살아갈 테지.
그녀의 가족들을 물들여도 되지만, 좀비 떼처럼 마구 늘려놓는다면 우연히 길을 걷던 아델라인에게 들킬 수도 있다.
무턱대고 늘릴 게 아니라 딱딱 필요한 사람만 만들어놓고 유사시에 안전가옥으로 쓰면 된다.
세화도, 유리아도, 마르셀라도 모르는 내 첫 대피소를 만드는 일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
연구실에 들른 난, 박사가 방에서 눈을 부비적대며 나오자 피식했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응... 졸려서.”
연구실 책상은 아주 깔끔했다.
박사가 장비 개발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
집도 있으면서 계속 여기 박혀있는 게 웃겼다.
뭐, 돌아가면 남편이 생각날 테니 이해는 하지만 말이다.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온 박사가 안경을 썼다.
“그 친구들은 어때?”
실비아와 아델라인을 말함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의정부에 그대로 있죠 뭐. 열심히 언어를 공부하면서요.”
“슬슬 디바이스 제작에 착수해야겠네?”
으음... 만약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디바이스로 변신을 한다면... 이거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아닐까 싶은데.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은 두 사람의 아이테르가 모두 소모되는 것이다.
차선책은 세화와 유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 있을 만큼 친해지는 것이고.
“일단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보류하고 있어 봐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며? 게다가 아델라인이라는 애는 타이라트에 대한 신탁을 받았다고 했잖아.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 또 다시 습격을 감행해올지 모르니까... 곧바로 제작해야겠어.”
완고하구나. 그래, 상관없다.
제작이 완료되기도 전에 널 떨어뜨릴 테니까.
내 수족이 된 네가 만들게 될 디바이스는 아이테르의 힘을 봉인하는 물건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시작할 테니까... 넌 일 봐. 바쁜 일이 다 끝나면 붙어서 같이 만들자.”
“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박사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
그녀는 내게 디바이스의 제작법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물론 마르셀라가 카피하는데 성공해서 제작방법 정도는 알고 있긴 했지만, 최소한 박사에게는 전혀 배운 적이 없다.
“세 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네 도움을 받으려고 해. 그래줄 수 있어?”
박사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관계가 더욱 가까워지는 건 자명하다.
상황이 잘 풀린다. 느낌이 좋아.
일주일 안에 안전가옥 설치와 세화의 무기를 완성시켜놓고 돌아와야겠다.
유리아의 활은 마르셀라가 만들고 있으니까 괜찮을 테지.
“물론이죠. 일은 일주일 안으로 끝날 것 같아요.”
“일주일? 한 달 정도 걸린다며?”
“다행히 일이 빠르게 진행됐어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가 잘 풀렸거든요.”
“그래...?”
팔짱을 낀 박사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가슴 때문에 팔이 삼켜지잖아.
근데 오늘은 노브라인가? 출렁이는 낌새가 심상찮은데.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박사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묻는다.
“넌 미래과학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혹시 디바이스를 빨리 만들고 싶어서 일을 포기하고 돌아오려는 건 아니지?”
“에이...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정말 잘 돼서 그래요. 연구실에 자금을 더 지원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아냐. 자금은 지금도 충분해.”
“슈트도 세 개나 만들어야 하잖아요. 무기도 그렇고요. 폴리머스가 엄청 들어갈 텐데...”
“.....”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모양.
나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매번 미안해하지 마세요.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니까.”
“미안한 걸 어떡하니...”
“그래도요.”
“알았어... 근데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네가 없었다면 이 연구실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막막했을 거야.”
“저번에도 몇 번 들었던 말 같은데요?”
“그랬나...? 어쨌든 내 마음은 그래. 오늘 바쁘지 않으면 밥이라도 먹을래?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한숨 돌리자.”
나야 환영이지.
“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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