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밝혀지는 진실 #2
전용기 안.
실비아와 아델라인은 오오... 하며 감탄을 터뜨렸다.
차로 공항까지 올 때도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연신 와! 거렸었는데, 세상의 문물을 처음 본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실소가 터져 나왔었다.
“앉아요.”
푹신한 좌석을 가리키며 그리 말하니, 두 사람이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나 또한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고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는 숨을 가득 들이켠 뒤 길게 내뱉었다.
“푸하...”
8월 말, 원래 더운 애리조나, 인간 상태의 몸이 삼위일체를 이뤄 땀이 한가득이었다.
좌석 테이블에 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데,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흥미로운 눈으로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보였다.
그녀들을 향해 밝게 웃어준 나는 일어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나는 두 사람.
말 한 번 잘 듣네.
나는 그녀들을 전용기에 마련된 샤워시설로 데리고 가서 버튼을 눌렀다.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힘차게 내려오는 물줄기.
그걸 본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와아아!”
아델라인의 감탄.
며칠간 애타게 기다려왔던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니 신난 모양이다.
샤워는 할 줄 알겠지? 샴푸랑 바디워시를 쓰는 방법만 알려줘야겠다.
아델라인은 오랜 시간동안 내 바디 랭귀지를 보았고, 내가 말하는 간단한 단어들을 익혔다.
반면 실비아는 다 아는 내용인 듯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실비아가 사는 행성의 문명은 발달한 편이구나.
난 마지막으로 초고속 세탁, 건조기에 옷을 걸어놓으라고 학습시킨 다음 좌석으로 돌아왔다.
“하아...”
답답하다. 계속 이렇게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어.
빨리 언어를 익히도록 해야겠다.
나는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샤워를 하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니 고통이 조금 가셨다.
실비아와 아델라인은 한국으로 데려올 것이다.
그편이 컨트롤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후 스텔라까지 WW엔터에서 부르도록 만든 다음, 타락시킬 땐 한 명 한 명씩 따로 떼어놓으면 돼.
마물들은... 저 두 사람이 이쪽으로 오게 된 경황을 파악해본 다음, 마계로 돌려보낼지 말지 결정하자.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데, 샤워를 마친 실비아가 좌석으로 오더니 손을 내민다.
“실비아.”
뭐 어쩌라고. 네 이름이 실비아인 건 알아.
아, 이제 내 이름을 알려달라는 얘기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방긋 웃었다.
“송지혁.”
“송... 지혁?”
아까도 느꼈지만 발음이 정말 좋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송지혁. 지혁이라고 불러요. 지혁. 지이이이 혀어어억. 지혁.”
이름을 반복해서 말하고 길게 늘어뜨리기까지 하니 실비아가 피식한다.
도도한 게 유리아 같군. 둘이 붙으면 볼만하겠어.
“내 이름, 실비아 리즈. 반가워, 지혁.”
눈치도 빠르고... 마음에 든다.
이어서 아델라인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실비아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에 ‘송지혁’, 혹은 ‘지혁’ 이라는 단어가 들먹여지는 것으로 보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뒤, 아델라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갑슴미다, 지혁.”
정말 귀엽긴 한데 절로 한숨이 나온다.
집에 쳐넣고 언어공부만 시켜야겠다.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한 이후부터 저들끼리만 대화하고, 나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실비아는 틈틈이 내 눈치를 봤지만, 아델라인은 노트에 머리를 박고 펜을 끄적이기만 했다.
그래, 니들 알아서 해봐라. 이미 너흰 내 손아귀에 들어왔으니까.
유리아를 타락시킬 때 사용하던 의정부의 집은 그냥 두길 잘했다.
실비아와 아델라인의 훌륭한 거처가 될 테니까.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들을 여기 데려다놓았다.
거실을 둘러보고 손을 모으는 아델라인.
시크한 실비아조차 집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둘을 보던 난 눈에 이채를 띠웠다.
여긴 마물들이 오갔고, 유리아가 타락한 장소이기도 하다.
마기의 잔향이 많이 남아있던 장소라 아델라인이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다.
마기를 지워놓은 게 통한 모양이다.
약한 마기는 가까워지지 않으면 감지가 불가능, 봉인된 마기는 아예 불가.
그리고 마기의 잔향을 지워놓는다면 눈치채지 못함.
지금까지 알아낸 아델라인의 능력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두 사람에게 방을 소개해주었고, 화장실 사용법이나 TV를 트는 법, 쟁여놓은 먹거리를 먹는 법, 이 외에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려주었다.
목이 쉴 정도로 여러 물건들을 소개, 안내해주고 나니 새벽이 다 되었다.
‘피곤하다.’
인간의 몸인 난 지금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 상태.
눈이 퀭했고 피로가 몰려온 것이 티가 났다.
이런 내 얼굴을 본 두 사람이 미안해했다.
특히 아델라인은 몸을 배배 꼬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상태였다.
괜찮아. 나중에 몸으로 갚아.
난 애써 웃으며 오늘은 돌아갈 테니 절대 도망가지 말라고 몸짓을 했다.
이런 내 몸짓을 알아들은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까부터 말을 잘 듣네. 괜히 뿌듯해진다.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현관문으로 향하던 나는, 아델라인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리자 고개를 돌렸다.
“뭐에요?”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내게 노트를 내밀었다.
‘뭐지? 돌아가서 보라는 건가?’
전용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긴 했는데... 일단 받아두자.
“안녕히! 지혁!”
노트를 받자 손을 마구 흔드는 아델라인.
밤낮없이 활기찬 모습이 마치 애 같다.
그녀를 향해 멋쩍게 웃어준 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나는, 양옆에 세화와 유리아를 끼고 아델라인이 준 노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모든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나는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대략 설명하자면 그림은 이런 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삼지창을 든 악마가 지구를 찌르고 있는 그림, 햇볕이 드는 신전, 신전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아델라인, 포탈을 타고 온 실비아.
종합하자면...
“악마가 지구를 넘보고 있으니 막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서 여기로 왔나보네.”
내가 그리 중얼거리자, 세화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 것 같아. 여기서 악마는 너겠지?”
“그래 보여.”
“진짜 어이가 없네? 못생긴 괴물로 그려놨잖아.”
아, 그 부분에서 어이가 없다는 거였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오네.
유리아가 세화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여요. 지혁 씨가 얼마나 정이 많은 분인데...”
내가...? 그건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그래도 너희들에게는 잘 대해주긴 하지.
나는 노트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세화와 유리아의 허리를 잡아 끌어왔다.
내 양옆으로 찰싹 달라붙어오는 두 사람.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야 편안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아.
“지혁아.”
내 가슴을 살살 쓰다듬는 세화의 부름.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걔네들이 그렇게 강해?”
“진짜 강하더라.”
“지금 나랑 싸우면 어떻게 돼?”
그냥 지면 다행이고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다.
지금은 마르셀라의 약 덕분에 마기가 꽁꽁 감춰져있지만, 세화와 유리아의 힘의 원천은 침식된 아이테르다.
이블 발키리로 변하면 마기가 나타날 텐데, 이 상태에서 정화를 당하면 끝이다.
아델라인이 정화를 쓰지 않더라도 실비아에게 능욕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상대하기가 힘들 것 같아.”
“그럼 어떡해?”
뭘 어떡해. 아델라인의 정화 특성을 모두 파악할 때까지, 그리고 무기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면서 꾸준히 영혼을 흡수해 강해져야지.
실비아, 아델라인과 친해졌을 때쯤 뒤통수를 갈기도록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냥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봐.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미안해... 도움이 못 돼서...”
금세 시무룩해진 세화.
유리아도 마찬가지로 풀이 죽었다.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거라 굳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은 아이테르를 보고 놀란 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되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것부터 해결하자.
“너희들은 몸 사리고 있어. 집밖으로 나갈 땐 무조건 마르셀라에게 받은 약들 먹고.”
그 말에 두 사람이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아줘라. 나중에 제대로 활약하게 해줄 테니까.
**
사랑스런 이블 발키리들과 뒹굴지도 못하고 눈만 붙인 나는 언어학습을 위한 여러 책, 영상자료들을 사서 의정부로 향했다.
도착해서 노크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여니, 실비아와 아델라인이 박시한 티셔츠를 입은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적응은 잘 하네. 나는 선생님마냥 빵긋 웃으며 탁상에 책을 늘여놓았다.
오늘부터 언어수업을 시키면... 한 달 정도 뒤엔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
그리 생각한 내가 두 사람을 부르려는데, 실비아가 내게 가까이오더니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그녀가 내민 물건은 손바닥 크기의 기계였다.
고개를 갸웃한 내가 기계를 받으니, 실비아가 똑같은 물건을 꺼내더니 마치 램프를 비비는 것처럼 옆 부분을 쓸었다.
그러자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가 작동이 되더니, 빠른 속도로 한국말을 했다.
[어제 아침 한라산에서 발생한 화재가……]
[괴물들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비스트 슬레이어의 활약을 보고 물러간 거라니까? 지금 우린 안전한……]
[이런 씨발년이!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 어? 이 좆같은 년아?]
‘뭐야 이건...?’
기계에선 뉴스, 토론, 영화에서 나온 대사들이 빨리감기가 되듯 흘러나왔다.
실비아는 황당한 표정의 날 보더니 실소를 터뜨렸고, 자신을 따라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걸로 내게 해코지를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그거면 됐지 뭐.
난 실비아가 했던 것처럼 기계의 옆부분을 만지작거렸다.
[@*&!#^$!^@$*(%*)([email protected]!&&$&*!&@]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빠르게 지나가길 수십 초.
나는 내가 든 기계와 실비아가 든 기계에서 푸른빛이 교차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설마...
입을 떡 벌린 내가 놀라워하고 있을 때, 실비아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말문을 열었다.
“실비아 리즈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지혁아. 우릴 그 답답한 곳에서 빼내주고 옷, 음식, 잠자리... 모든 것들을 제공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연스런 한국어였다.
반말, 존댓말과 호격조사까지 구분하는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
나는 이마를 딱 짚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씨발. 나랑 장난 하냐?’
이런 좋은 동시통역기가 있으면 진작 쓰든가 이 개 같은 년아!
잠시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던 내가 말했다.
“이건... 통역기인가요?”
“맞아. 내 행성에서 사용하던 기계야. 이 행성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언어가 학습된 상태고, 우리 쪽 언어와 합성이 완료된 상태지. 네가 우릴 빼내오면서 짐을 찾아주지 않았더라면 답답할 뻔했어.”
뭐 이런 사기 아이템이 다 있냐?
실비아가 사는 곳의 문명은 내 예상보다 훨씬 발달한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선 편하니 다행이다.
“혹시 기술력이 뛰어난 행성에서 오신 건가요?”
“맞아.”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쓰지...”
“이해해줬으면 해. 믿을 사람이 없었거든. 이 행성에 떨어지자마자 괴물과 싸웠고, 심지어는 인간이 폭발하기까지 했어. 그 다음엔 어떤 국가에서 우릴 체포하려고 했지. 모두 적대적이었어.”
“그럼 왜 저한테는...”
“우릴 보호하려는 행동을 했고 에테르에 대한 영상을 보여줬잖아. 우리가 찾고 있던 여자들의 영상도 보여줬고, 우호적인데다 거주지까지 구해줘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어. 아델도 네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그러더라. 악의가 전혀 없대.”
판단력 한 번 구리군.
음흉한 속내는 감지하지 못하나보지?
“허... 그래도 허탈하네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해해줬으면 해.”
“예... 일단 그 에테르라는 건, 이 지구에선 아이테르라고 불려요. 아이테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요. 이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시죠? 어디 가서 언급하지 마세요. 절대로요.”
“그럴 생각 따윈 전혀 없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어때?”
“제가 원하는 바죠. 앉으실까요?”
나는 실비아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아델라인이 다가오더니 실비아에게 통역기를 받아 작동시켰다.
잠시 후, 그녀가 발랄한 목소리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지혁 씨? 아델라인이라고 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반갑습니다, 아델라인.”
“아델이라고 불러주세요.”
“예, 뭐... 일단 앉으시죠.”
“네!”
냅다 앉은 아델이 날 향해 생긋 웃더니 묻는다.
“제가 그린 그림은 이해하기 쉬웠나요?”
“대충 알겠더군요. 신탁을 받으셨나봅니다?”
“맞아요! 다행이다! 먼저 저희가 여기 오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릴게요.”
난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죠. 두 분을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두.”
나의 이 말에 실비아의 표정이 더 풀렸다.
먼저 다 오픈해서 믿음을 주려는 판단이 제대로 적중했구나.
속으로 킥킥 쪼갠 내가 입을 열었다.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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