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번민하는 유리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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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환생을 써먹을 계획은 아니었다. 헌데 네가 스스로 모가지를 들이대더구나. 그때 카페에서 그랬지? 환생에 대한 것을 믿냐고. 난 이걸 이용해먹기로 했지.”
유리아는 자신의 코앞에서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지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심리상태는 불안정했다.
지혁이 그런 유리아를 비웃고는 말을 잇는다.
“나는 네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네 부모는 물론 아론도, 백성들도 어떻게 뒈졌는지 정확히 꿰고 있는 존재지. 그래서 글렌 엘레나르로 변신하고, 환생에 대한 꿈을 꾸는 척하며 왕국이 멸망할 당시의 상황을 몇 번 설명해주니 잘도 속아 넘어가더구나.”
“.... 우아아...”
후들후들 떨려오는 유리아의 몸.
이 상황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이후엔 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환생이 끝난 척 접근하고, 너와 함께 산다는, 그리고 널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아파트를 구해 같이 살았지. 점점 철이 없어지는 네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웠다. 마치 진짜 딸을 키우는 것 같더군.”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끔찍한 악몽 같다. 개운한 상태로 깨어나고 싶다.
유리아는 몇 번이나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신을 놓지 마라.”
지혁의 명령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완전히 몽롱하게 된 상태였지만 지혁의 말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송지혁의 몸으로, 그리고 글렌의 몸으로 너와 함께하느라 참 바빴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아라.”
유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지혁의 명을 따랐다.
그녀의 의식 속에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지난날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맞... 아... 나는 아빠와 지혁 씨가 만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어...’
그건 둘째치더라도 지구에 있을 당시,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딱딱 알맞은 상황만이 주어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인위적인... 그런 상황만이.
한참동안 기억들을 되돌려보던 유리아는, 이어지는 지혁의 말에 다시금 충격을 먹었다.
“아론의 환생이라는 말을 믿는 것도 웃겼다. 열심히 유승현에게 꼬리를 치더군. 송지혁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말이야.”
“.....”
“다만 유승현이 예상외로 성장해서 조금 짜증났다. 놈은 내가 변장한 인물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너와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 놈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오던 널 발견하도록 수를 썼다.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났다.
그 후 의정부에서 채찍질을 당하다가, 절대 승현을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까지 전부.
“아아아...”
백지장처럼 하얘진 자신의 얼굴을 감싼 유리아가 절망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의 반응에 킥킥거리던 지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타이라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린 인천으로 여행을 갔지. 난 거기서 네 처녀를 앗아갔다. 네가 영원히 날 잊지 못하게끔 만든 거다.”
“흐아아아아아...”
“다음 날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시중을 들려고 하더구나. 처녀를 바친 사람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정말 웃겼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인데 말이야.”
속았다. 완전히 속았다.
유리아 자신은 지금 지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패닉 그 자체. 당장 혼절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 뒤엔 탄탄대로더군. 네 심리를 서서히 바꿔놓았고, 내 패도에 동화되도록, 날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말하는 모든 명령을 따르도록 내 색으로 물들였지. 그 결실은 이미 맺은 상태다. 폭력성은 기본이고 사랑을 약속했던 약혼자마저 네 손으로 죽였지.”
말을 마친 지혁이 유리아의 드레스 프릴을 확 들췄다.
그리고는 팬티를 옆으로 젖혀 그녀의 보지를 살살 문질렀다.
“흐얏...?”
익숙한 손길이 느껴지자 다리를 살짝 벌리는 유리아.
지혁이 실소를 터뜨렸다.
“보아라. 이런 사실을 듣는 와중에도 내 총애를 받기 위해 가랑이를 벌리잖느냐. 넌 날 떠날 수 없다.”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는 말에 유리아의 정신이 일부 돌아왔다.
마음속을 잠식한 어둠을 밀어낸 그 정신은 유리아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이익...!”
이를 악문 유리아가 지혁을 밀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한 유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혁에게 소리쳤다.
“날... 날 속였어!”
“당장 내 앞으로 오너라.”
“.....”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그 말에 유리아가 본능적으로 발을 놀렸다.
지혁의 명을 어긴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한 것이다.
‘아, 안 돼...!’
말도 안 된다. 고작 저런 짧은 마디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니.
지혁이 깔아놓은 늪지대에 너무 깊게 빠졌다.
어느새 지혁의 앞까지 다가간 그녀가 생각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상황이 지나가면 정신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혁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단검을 하나 꺼냈다.
그걸 본 유리아가 덜컥 겁을 먹었다.
설마 자신을 죽일 생각인가?
“걱정하지 마라.”
지혁은 유리아의 걱정과는 달리, 단검 손잡이를 휙 돌려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유리아는 말똥말똥한 얼굴로 단검과 지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준 지혁이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말한다.
“내가 원망스럽다면 어디 공격해보아라. 난 이곳에 가만히 서있으마.”
“뭐... 라고...?”
제정신인가?
지금 자신이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래 전부터 날 능욕한 사람인데?
뿌드득!
이빨을 간 유리아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지혁을 향해 돌진했다.
빠른 속도로 짓쳐간 그녀가 기세 좋게 단검을 내밀었다.
목표는 목. 단검은 당장에라도 지혁의 목을 꿰뚫어버릴 듯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읏...!”
단검은 지혁의 목과 미세한 공간만을 남겨두고 우뚝 멈췄다.
지혁이 막아낸 게 아니라, 유리아가 스스로 공격을 멈춘 것이다.
유리아의 본능과 이성 모두 지혁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경종을 울렸다.
보복 당할까봐 두려워서? 아니다.
지혁이 잘못된다는 생각을 하자 슬픔이 온몸을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박수를 치며 기꺼워한 지혁이 말한다.
“넌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왜? 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니까. 날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
저 가증스런 얼굴에 한 방 먹인 다음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데, 여태까지 조교된 그녀의 마음은 공격성조차도 모두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지혁의 늠름한 얼굴을 보니 반발심마저도 중화되어간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변신하자. 모든 전말을 알아차린 상태에서 변신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유리아가 다시 지혁과 거리를 벌리고 디바이스를 두 번 터치했다.
그러자 연두색 빛이 알현실 전체를 화악 비추더니, 유리아가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신했다.
의지가 충만하다. 지금이라면 지혁을...
“흐앗...?”
유리아의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다.
비스트 슬레이어로 변하면서, 안 그래도 좋았던 유리아의 강인한 회복탄력성이 증폭되며 지혁과의 모든 추억을 전부 선명하게 되새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원에서의 키스부터 데이트, 인천에서의 첫 경험, 그 뒤의 모든 일들이 모조리 상세하게 기억났다.
“왜 그러지? 날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가?”
두근!
그 말에 유리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죽... 여? 내가...? 지혁 씨를...?’
단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려오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뺨을 적셨다.
“내가 좀 도와주지.”
지혁이 유리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도와줘? 뭘? 뭘 도와준다는 건데!?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몸은 완전히 굳어 말문조차도 막아버렸다.
유리아의 지척까지 다가온 지혁이 방긋 웃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그리 말한 지혁이 유리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목으로 단검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목덜미를 찔렀다.
퓻!
지혁의 목에 싸늘한 검날이 제법 깊숙이 들어가고, 그곳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곤룡포의 어깨자락을 적신다.
그 순간, 유리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혁이 죽는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
유리아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지혁의 목에서 단검을 빼내 바닥으로 던졌다.
짤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알현실 구석으로 미끄러진 단검.
유리아가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녀는 아까 자신이 보였던 행동을 애써 변명했다.
지혁을 공격하려던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까는 뭔가에 홀려서... 그래, 지혁이 명령해서... 공격을 하라고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단검을 휘두른 거다.
그리고 지금은 지혁이 직접 와서 스스로 자해를 한 거다.
“나... 난... 잘못하지 않았어...! 네가... 네가 직접 온 거야...!”
“넌 내가 죽길 바라잖느냐. 그래야 심정이 편해질 텐데?”
“아니야! 아니라구!!”
버럭 소리를 지른 유리아.
지혁이 시원하게 웃더니 양팔을 벌렸다.
“아니라면 이리로 오너라.”
유리아의 심장이 좋은 쪽으로 두근거렸다.
몸이 달아오른다. 저 널따란 품 안에 쏙 들어가 얼굴을 부비적거리고 싶다.
복잡하던 심경이 일시에 해소되면서, 그를 향한 애틋한 마음만이 남는다.
“흐응!”
콧소리를 내뱉은 유리아가 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혁의 품은 그녀의 마음속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그녀의 눈에서부터 온갖 감정들이 담긴 눈물이 흘러나온다.
“흐아아앙!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심이 가득한 사과를 연신 내뱉는 유리아의 등을, 지혁이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사과할 필요 없다. 나는 괜찮으니.”
일순 사도에 빠졌던 자신을 보듬어주는 저 믿음직한 목소리를 보라.
이 얼마나 넓은 아량인가.
더욱 서러워진 유리아가 지혁의 허리를 부서져라 안고 엉엉 울었다.
“흐어어엉...! 죄송해요... 흐아앙... 용서해줘... 용서해주세요...!”
“네 잘못은 하나도 없느니라.”
유리아는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감사한 말. 이래서 자신이 지혁을 사랑하는 거다.
자신 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쫓아갈 수 없는 강대한 힘과, 그에 비례한 큰 배포.
그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문득 지혁의 목에 제법 큰 상처가 난 것이 생각났다.
슬쩍 눈을 떠서 시선을 위로 올려서 확인해보니, 지혁의 어깨가 전부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목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는 중이었고.
지혁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낸 유리아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치료... 해야 돼요... 지혁 씨... 목 상처... 너무 위험... 으읍!”
말을 마치지 못한 유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지혁이 유리아 자신의 머리를 당겨와 목에 가져다댔기 때문.
주인의 목에서부터 새어나오는 피가 입 안에 차기 시작한다.
피 특유의 철분이 섞인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왜 이러는 걸까? 벌인가? 공격하려고 해서 자신에게 벌을 주나보다.
‘아, 아냐... 이건...’
그래, 아니다. 이건 주인이 자신에게 내려주는 포상.
주인께선 깨끗한 피로 자신의 부패한 몸을 정화시켜주려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피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달콤하다. 삼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유리아의 눈이 절로 감기면서, 코에선 뜨거운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우움... 하웁...”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갈증에 미친 사람처럼 지혁의 목에 입술을 대고 피를 쪽쪽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만.”
주인의 명령에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유리아가 멍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유리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던 지혁은, 그녀의 피 묻은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 문댔다.
그리고는 묻는다.
“아직 가슴이 답답하지?”
유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주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아주 잘 안다.
“네에...”
“현재 네 마음속에 자리한 가장 큰 하나의 감정만 따라라. 그러면 된다.”
지금 자신의 감정.
분노, 슬픔, 불안 같은 심적 고통들이 뒤섞인 소용돌이를 뚫고 나온 단 하나의 감정은... 사랑이었다.
주인에 대한 사랑, 그것 하나뿐이다.
그가 펼쳐놓은 그물에 걸려 인간을 증오하고, 악을 선으로 생각하게 됐다.
마물의 사회에 적응하고 발을 깊게 담갔다.
죽고 없어진 아버지를 무척 한심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약혼자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완전히 세뇌를 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상관... 없잖아...’
자신은 이미 주인의 색으로 칠해졌다.
그러니 뒈진 아버지를 매도한다거나 약혼자를 죽였다거나 하는 시원찮은 일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만을 품었다.
자신에게 큰 깨달음을 줘서 너무나도 감사하다.
생각을 마친 유리아가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미소로 미천하고 미련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멋지다.
그리 생각한 유리아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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