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누그러지는 마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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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감옥을 경비하는 간수 마물이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소머리를 한 미노타우로스. 나름 강인한 힘을 가진 듯한 마물이었다.
지구로 따지자면 D에서 C급 정도는 될 법한.
유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지하 10층 특실에 계십니다. 안내해드립니까?”
마물의 말을 무시한 유리아는 인간들 몇 명이 잡혀있는 지하감옥의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여기 아론도 있을까? 일단 지하 1층에는 없다.
“유... 유리아 왕녀님...! 왕녀님이 맞으십니까?”
감옥에 갇힌 몇몇 인간들이 유리아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유리아는 자신을 부른 백성을 바라보았다.
핼쑥한 얼굴, 온몸엔 말라붙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상처가 가득했다.
불쌍한 백성을 보고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더러워.’
였다.
감옥에 가까이 다가간 그녀.
왕녀의 이름을 부른 백성은 유리아가 입은 드레스를 보고 숨을 훅 들이켰다.
쭉쭉 뻗은 몸매를 드러내는 야한 드레스. 남자라면 누구나 눈알이 돌아갈 만했다.
“왕국 백성이야?”
그에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낸 백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예... 찰스라고 합니다.”
“내 얼굴은 어떻게 알았지?”
“전 기사단에 검을 납품하는 대장장이입니다. 먼발치에서 한 번 뵀었지요. 왕녀님의 머리색이 달라 알아보는데 힘들었습니다만... 어쨌거나 간수가 깍듯한 것을 보니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찰스는 유리아 자신을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포로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일국의 왕녀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실제로 대우도 괜찮고.
그나저나 힘도 없는 주제에 남 걱정이라? 정말 같잖았다.
“괜찮아. 혹시 아론이 여기 잡혀있어?”
“아론이라 하심은... 기사단장님을 말씀하시는...”
“맞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구나. 알았어. 마왕과 협상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잘 될 것 같으니까 조금만 참아. 여기서 나가게 해줄게.”
“예...! 예! 감사합니다, 왕녀님!”
찰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눈빛에 희망이 감돌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아는 그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띠워주고는 복도를 지나쳤다.
얼마 후 뒤에서 찰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께서 마왕과 협상을 하신다! 조금만 참으면 나가게 해주신다고 하셨다!”
그러자 감옥의 인간들이 반응을 보였다.
생존에 대한 희망을 받았는지 환호성을 내지르며 왕녀의 이름을 연호한다.
유리아는 간신히 인상을 편 상태로 의연한 척 걸었다.
저 백성들이 너무나도 병신 같았다.
거짓말에 간단히 속아 넘어가는 하찮은 것들. 심지어 찰스는 자신을 바라볼 때 눈에 욕망마저 띠우고 있었다.
그런 인간들을 구해줄 생각? 당연히 없다.
타이라트는 자신을 봐서 왕국의 침략을 중지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자신을 여왕 자리에 앉혀 속국으로 삼겠다는 뜻인데, 그럴 경우 여기 있던 백성 몇을 데려가 자신의 공적을 부풀리는 선동가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여왕감이라고 해도 혼자 왕국을 다스릴 수는 없잖은가.
무식한 노예들에게 적절한 채찍과 당근을 주며 자신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생각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살아있으니 백성들과 함께 지구로 넘어가도 되고, 아니면 지혁을 초대해 왕국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어도 되고.
어떤 선택지이든 지혁과 함께 산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타이라트가 지혁일 수도 있다는 것.
아직 가설이지만 점점 진실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었다.
‘난 어떻게 해야 될까...?’
타이라트와 지혁에 대한 온갖 추측들이 머릿속에 난무했다.
유리아는 고개를 털어버렸다.
일단 어머니부터 설득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복도 끝에 도착한 그녀는 어둑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지하 9층까진 그냥 자신이 알던 감옥의 모습과 같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어두운.
그러나 10층부터는 달랐다.
청결한 건 둘째치고서라도 은은하고 달콤한 과일 향기가 풍겼다.
‘이게 무슨...’
철창이 없는 방이 여러 개였으며, 복도엔 주황색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카펫까지 좌르륵 깔려 있는 것이 그냥 최고급 저택의 거실 같았다.
왜 간수가 특실이라 칭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황당한 표정을 지은 유리아는 층마다 있었던 간수도 보이질 않자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부드러운 카펫을 따라 걸어갈 때마다 절로 두근거리는 심장.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마물이 된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생각났다.
“후우...”
가슴이 갑갑해진 그녀가 우뚝 멈춰 서서 긴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왔니?”
유리아의 등 뒤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깜짝 놀란 유리아가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몸을 돌리고 오른쪽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무척 빠른 속도. 하지만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퍼억!
그때, 유리아는 등 뒤에서 굉장히 강한 힘이 자신을 미는 것을 느꼈다.
대못으로 찌르는 것 같은 짜릿한 고통까지 일었다.
동시에 오른쪽 다리에서 둔탁한 느낌이 들었고, 균형이 무너져 볼썽사납게 철퍼덕 쓰러졌다.
“읏...!”
눈썹을 찌푸린 유리아가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본 그녀의 힘이 풀렸다.
마가렛이 긴 혀를 날름거리며 유리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그녀가 야릇한 목소리로 유리아를 비웃었다.
“우리 딸... 약하네?”
자신을 공격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니, 이젠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변한 음마.
빳빳한 검은색 본디지 브라 때문에 안 그래도 풍만한 가슴이 더욱 모아졌고, 하이레그 팬티로 인해 탄력적인 골반 라인이 여실히 드러나는 옷차림이었다.
천박한 모습. 그러나 음마의 입장으로 따지자면 무척 어울렸다.
공격당한 등 뒤가 아려오면서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피가 흐르는 모양.
마가렛이 신은 하이힐의 높은 굽 끝부분이 살짝 진해져있었는데, 굽으로 등을 차면서 살을 뚫어낸 모양이었다.
그 뒤 유연하고 긴 꼬리를 휘둘러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겠지.
아무리 활과 슈트가 없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변신한 자신의 육체에 상처를 입히고,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다니.
어머니의 뛰어났던 평소 육체가 수백 단계는 강화된 느낌이었다.
“끄윽...!”
유리아는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딸인 자신을 단호하게 공격해버린 마가렛에게 너무나도 서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가렛은 그런 유리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먼저 공격해놓고 왜 억울해해? 버릇없는 년...”
서슴지 않고 욕을 하는 마가렛.
유리아의 마음이 찢어진다.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깊은 무저갱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기분.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애탄 목소리로 어미를 불렀다.
“엄마...”
그 말에 마가렛의 얼굴이 환해졌다.
매혹적인 발걸음으로 다가와 양팔을 뻗은 그녀가 딸을 환영했다.
“그래, 내 딸... 이리 오렴.”
“아...”
머뭇거리는 유리아. 마가렛의 창백한 미간이 구겨졌다.
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두어 번 날름거리던 마가렛은, 유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유리아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우니... 울지 마.”
“흐으윽... 엄마아...!”
“난 여기 있단다. 옳지... 착하다.”
유리아는 따뜻하던 어머니의 손길이 얼음장처럼 변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체가 그랬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따스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음마가 되었더라도 자신과의 추억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다.
여태껏 너무나 보고 싶었는데... 앞선 자리에선 타이라트와 함께 있어 제대로 된 상봉을 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단둘이 만나니 감성이 풍부해진 상태.
“엄마아...! 흐아아앙!”
결국 유리아는 마가렛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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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의 방에 있는 푹신한 침대에서 등을 치료받고 있던 유리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등을 살펴주던 마가렛이 상처를 살짝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파요...”
“미안해. 많이 다쳤는지 확인만 한 거야. 며칠 정도면 아물 것 같은데... 많이 따끔하니? 불편해?”
“응... 움직일 때마다 따끔해요...”
“그래? 잠깐만 기다리렴.”
그리 말한 마가렛이 검은 연기를 남긴 채 휙 하고 사라졌다.
당황한 유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마가렛이 다시 나타났다.
퀭한 눈빛의 젊은 여마법사를 한 명 데리고 온 채였다.
때가 타서 누더기처럼 변한 흰색 로브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 불꽃 같은 주황색 머리가 눈에 띈다.
그녀는 이지를 상실한 듯 공허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가렛은 마법사의 머리채를 잡고 유리아의 등 뒤에 앉혔고, 꼬리로 마법사의 목 뒷부분을 툭툭 찔렀다.
“앗...! 아앗...!”
찔릴 때마다 몸을 떨며 신음을 터뜨리는 마법사.
그녀는 곧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나타났다.
상처를 치료하는 회복마법이 마법사의 손에서 발현된 것이다.
유리아는 등에서 가려운 느낌이 들자 몸에 힘을 뺐다.
근육이 긴장하면 회복마법의 효과가 더뎌지기 때문.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본 마가렛이 악랄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비아냥거리거나, 소리를 내서 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유리아가 천한 노예의 시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도록 놔두었다.
딸의 치료를 마친 마가렛은 간수를 불러 마법사를 데려가도록 시켰다.
이후 유리아의 앞에 앉아 화사한 미소를 짓는다.
“이젠 안 아프지?”
“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아직도 어미의 모습을 보기 힘든 듯 시선을 가만 두지 못하고 있었다.
“저 마법사는 어떻게 된 거에요...? 최면이에요?”
“아냐. 고문해서 이성을 죽여 놨어. 쓸모 있는 인재라 노예로 부리려고 해.”
무시무시한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마가렛이었다.
유리아 또한 마찬가지로 약한 마법사의 인권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가 유리아 자신의 반응을 보고 서운해 하지 않도록 말을 돌릴 뿐.
“엄마는 왜 타이라트에게...”
떨어졌냐는 뒷말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마가렛이 유리아의 생각을 파악하고는 호호 웃었다.
“우리 같은 암컷은 강한 수컷에게 굴복해야 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너도 알잖아.”
맞다. 분명 지혁을 만나러 가기 위해 플라잉 택시에 탔을 때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어머니는 타이라트의 패도에 동화된 건가?
자신이 지혁의 패도에 동화된 것처럼?
아니... 두 사람은 동일인물일지도 모르니까... 정리하면...
‘으으...!’
인상을 찌푸린 유리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두 사람을 생각하는 건 그만두자.
고개를 털어내고 마가렛을 바라보니,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분의 물건을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난 느꼈단다. 마왕님은 내가 일생을 다 바쳐 모셔야할 주인님이라는 것을 말야.”
“.....”
“너도 조만간 마왕님의 권속이 되었으면 좋겠어. 모녀가 같이 마왕님을 모신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니?”
“전... 절대 그러지 않을 거에요.”
“지금의 내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봐. 여기에 더해서 힘도 증폭됐어. 인간들 중에선 적수가 없을 것 같은 너조차 하찮아 보이고, 실제로도 그랬지.”
힘에 취한 마가렛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긴 혀를 뱀처럼 날름거린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다.
저 관능적인 모습을 본 유리아는, 어쩌면 설득이 요원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지금 이 생활을 무척 만족해하고 있었다.
분하다... 하지만 이해도 되는 것 같다.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되었으니까.
긴 한숨을 내쉰 유리아가 물었다.
“엄마는... 인간인 절 사랑해요?”
“인간시절의 기억과 추억은 모두 버렸지만,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아직 남아있단다. 진심으로 사랑해.”
“만약... 마왕이 절 죽이라고 한다면 어쩌실 거에요?”
“유치한 질문이네. 그건 당연하잖니. 죽일 거야.”
“.....”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
최소한 그래도 설득은 해보겠다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딸을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너무 서러웠다.
“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한 거니? 마물인 내가 마왕님의 명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
마가렛의 대답을 들은 유리아가 약간 안심했다.
그렇다. 마물은 마왕의 명을 무조건 따른다.
항명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슬프다. 방에서 펑펑 울고 싶은 마음.
유리아는 눈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갈래요...”
그 말에 마가렛이 손을 휘저어 포탈을 만들었다.
입을 쩍 벌린 마물의 아가리를 바라보던 마가렛이 말한다.
“들어가렴. 성으로 통하는 포탈이란다.”
마물들이나 사용하는 포탈을 열다니...
다시금 불쾌한 감정이 솟아난 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갈 거에요. 제 발로...”
“그래? 알았어.”
포탈을 닫은 마가렛은 자신도 할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텅 빈 방 안을 둘러본 유리아는 답답한 숨을 내뿜었다.
메릴... 메릴이 보고 싶다. 빨리 안정을 취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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