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9 고성에서 만난 인연 #2
고성의 널따란 식탁에 앉은 유리아와 메릴.
유리아는 약간 의심스런 눈초리로 메릴이 만든 빵을 집어 살펴보았다.
일단 냄새는 괜찮다. 끝까지 지켜봤는데 약을 탄 기색도 없었고.
그냥 먹어보자. 죽기라도 하겠어?
생각을 마친 유리아가 빵을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마... 맛있네...?”
그 말처럼 메릴이 만든 빵은 정말 맛있었다.
빵집을 차린다면 대성할 정도로.
속이 꽉 차있었으며 부드러웠고, 간도 잘 되어 있었다.
“그쵸? 맛있죠? 헤헤...”
칭찬에 입이 헤벌쭉해진 메릴이 상체를 들썩거리며 빵을 가져가 먹었다.
유리아는 그런 메릴을 보며 피식 웃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여섯 개의 빵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접시는 금방 비워졌다.
세 개의 빵을 먹은 유리아는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리는 메릴을 보고 식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후아... 배불러엉...”
저 자그마한 몸에 큰 빵이 세 개나 들어가다니, 다 크면 서른 개 정도 먹겠다 싶었다.
이제 정보를 캐내보자고 생각한 유리아가 메릴을 불렀다.
“메릴.”
“네에?”
“넌 날 정중하게 모셔야 하지? 묻는 말에도 대답해야 하고?”
“맞아요.”
“이 성에 누가 살아? 밖을 지키는 마물을 빼놓고 말해봐.”
그 말에 메릴이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고, 이름을 나열하며 하나씩 접는다.
“마왕님하구... 유리아 님하구... 우웅... 시종들도 얘기해야 돼요?”
“아니. 시종은 빼고.”
“감옥의 포로들은요?”
“포로? 어디 한 번 말해봐.”
“인간 기사 몇 명하구... 예쁜 여자 한 명하구...”
예쁜 여자.
유리아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 마가렛일 거라는 생각이 톡톡히 들었다.
잔뜩 긴장한 유리아가 메릴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 예쁜 여자의 이름이 뭐야?”
“저도 잘 몰라요.”
“그럼 어떻게 생겼어?”
“우웅...”
메릴이 귀엽게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기다가, 유리아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유리아 님이랑 닮은 것 같아요!”
어머니가 확실했다.
자신과 닮은 여자는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마물이 즐비한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어머니밖에 없다.
유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지하감옥은 어디 있어?”
메릴이 화들짝 놀라 식탁 아래로 숨어 벌벌 떨었다.
그러자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유리아가 표정을 풀고 쪼그려 앉았다.
“메릴.”
“유리아 님... 무서워요... 절 죽이지 마세요...”
“내가 널 왜 죽여?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주방에서 제 입을 막으셨을 때 그러셨잖아요... 히잉...”
“그냥 해본 말이었어.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불안해서... 미안해.”
무척 부드러워진 말투에 메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유리아 님... 너무 무서웠어요...”
유리아는 자신의 가슴속에 무언가 기이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마물들을 피에 미친 살인귀이자 악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말을 잘 믿고 따르는,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메릴을 보니 그 생각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네...? 무슨 말씀이에요?”
어리둥절한 메릴의 물음.
머리를 털어낸 유리아가 반문했다.
“아무것도 아냐. 지하감옥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래?”
“성 밖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보여요.”
타이라트는 성 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지만,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경고를 어기고 나가면 어머니의 머리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유리아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직 어머니를 구출하는 건 무리. 기회를 보자.
“고마워 메릴. 하나 더 물어봐도 돼?”
“네. 얼마든지요.”
“감옥에 있다는 그 예쁜 여자 말이야... 혹시 몸에 상처는 없었니?”
“전혀요. 마물들이 잘 모시고 있는데요?”
어머니인 마가렛은 자신처럼 육체능력이 뛰어났다.
그럼 마물들이 인정해주는 것일까? 아니다.
아무리 육체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마물들에 비하지는 못할 터.
이건 타이라트의 명령 때문임이 확실했다.
“마왕이 명령한 거야? 극진히 모시라고?”
“맞아요.”
“그런데 왜 지하감옥에 있어?”
“그분이 거기 있는 걸 원하신다고 들었어요.”
“누구한테?”
“주방장님한테요. 근데 가끔 여기서 식사도 하세요.”
“.... 정말? 그 예쁜 여자가?”
“네, 진짜에요. 그분이 여기서 스프를 드시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봤어요.”
그렇다면 감옥과 고성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소린데... 혼란스럽다.
그냥 타이라트에게 까놓고 물어볼까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메릴이 묻는다.
“제가 도움이 됐나요?”
유리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 도움이 됐어. 정말 고마워.”
“다행이다! 히히...”
좋아라하는 메릴.
유리아가 절로 흐뭇해했다.
뭐 이렇게 귀여운지... 혹시 귀여운 마물을 보내 자신을 애태워 죽이려는 타이라트의 농간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될 정도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메릴.”
“저도 잘 부탁드려요! 유리아 님!”
“잘 지내보자. 그나저나 너도 여기서 사는 거야?”
“아니요. 저는 산속에서 혼자 살아요.”
“산속?”
“네. 성 밖 산속이요. 요리연습을 할 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요. 마왕님이 특별히 허가해주셨거든요. 가끔 여기서 잘 때도 있어요.”
“그렇구나... 원래 혼자였던 거야? 아니면...”
“원래는 엄마아빠와 같이 살았어요. 근데...”
“근데?”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의연한 척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메릴은 울기 직전이었다.
유리아는 자신이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메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미안해.”
“아니에요... 마왕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말끝을 흐린 메릴의 한쪽 귀가 쫑긋했다.
그녀가 당황해하면서 식당 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메릴의 시선을 따라갔고,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얼마 뒤,
끼이익...
식당 문이 열리고 타이라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아는 놀라고야 말았다.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한 타이라트의 기척을 고작 귀를 한 번 턴 것만으로 알아차리다니.
아무래도 메릴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같은 부류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인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메릴이 타이라트에게 인사한다.
“마, 마왕님! 안녕하세요...”
그러자 타이라트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요리연습을 했었구나.”
“네에... 맞아요... 빵을 만들었는데... 여기 계신 유리아 님과 먹었어요. 마왕님 것도 만들까요?”
“아니다. 늦었으니 오늘은 성에서 자고 가거라.”
“그,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다. 어디인지는 알지?”
“네! 2층 가운데 방이요!”
“맞았다. 나는 유리아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방에 돌아가려무나.”
“알겠습니다아...”
고개를 꾸벅 숙인 메릴은 유리아에게도 인사를 하고는 작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식당을 나갔다.
타이라트는 자신을 향해 경계심을 표출하고 있는 유리아를 바라보며 피식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지?”
그에 유리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괜히 찔끔한 것이다.
“시, 신경 꺼...!”
고개를 주억거린 타이라트는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옆에 앉아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심심하니 말동무나 하자꾸나. 메릴은 입이 싼 아이고, 넌 그 아이에게 여러 정보를 캐물었을 테지. 내게 궁금한 것이 많지 않느냐?”
“.....”
유리아는 자신이 뭘 했는지 정확히 꿰고 있는 타이라트를 보면서 또다시 지혁이 생각났다.
통찰력이 깊은 것도 비슷하다.
보면 볼수록 공격성이 누그러져가는 기분.
‘아, 안 돼...’
애써 정신을 차린 유리아는 천천히 걸어가 상석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
“왜 어머니를... 잘 대접해주는 거지? 직책이 높은 포로라서?”
“직접 물어보아라.”
“말장난하지 마! 감옥에 가뒀잖아! 네가 성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도 했고!”
“호... 내 명을 잘 따르는구나. 의외로군.”
유리아가 당황해했다.
“아, 아니... 이건 네가 협박해서... 대답이나 해! 어떻게 직접 물어보는데?”
“마가렛은 원할 때 성으로 와서 나와 담소를 나눈다. 메릴이 말하지 않았나? 가끔 온다고.”
“그건 들었지만... 어머니가 너와 담소를 나눈다고...?”
“그렇다.”
어머니가 마왕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를 볼모로 잡고 있는데다 힘을 가진 타이라트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설마 아몬 같은 마물에게 최면을 걸라고 시킨 건...”
“원하는 게 있다면 직접 나서고 말지,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야 하지?”
“.....”
확실히...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가졌으니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터.
유리아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붉게 물들었다.
아몬에게 최면을 걸라고 시켰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었다.
“어, 어머니는 언제 오시는데?”
“말했잖느냐. 내킬 때 온다고.”
“네 말을 믿지 못하겠어. 어머니가 무사한지 볼 테니까 지금 당장 날 지하감옥으로 안내해.”
그 말에 타이라트의 눈이 가라앉았다.
“네가 그랬잖나. 약자에겐 명예 따윈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약자인 네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있다. 부탁이 있다면 공손히 해라.”
“이...!”
유구무언. 유리아는 부들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동안 타이라트를 노려보기만 하던 유리아가 쥐어짜내듯 말한다.
“날... 지하감옥으로... 안내해줬으면... 좋겠어...”
“더 공손하게.”
“.... 못해...”
“못한다? 마가렛을 걱정하고 있는 게 맞나 의심이 드는군.”
“네가 감히...!”
“감히? 그런 오만한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다.”
패도를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줄 흘리는, 자신감과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패기가 실려 있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 정도로 타이라트의 말에선 무소불위의 힘이 느껴졌다.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읏...!”
인정하긴 싫지만 절로 수긍해버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타이라트에 대항하려는 마음은 공포에 짓눌려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상태.
유리아의 다리가 절로 떨려왔다.
타이라트는 그런 유리아의 몸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피다가, 시선을 식당 밖으로 흘끗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왔군. 오늘은 이쯤하지. 메릴을 잘 대해주면 좋겠구나. 불쌍한 아이이고 외로움을 잘 타니, 심심하다면 같이 있어주던지 해라. 2층 가운데 방이다.”
그 말을 남긴 타이라트가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힘이 풀려버린 유리아는 식당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는, 타이라트가 문밖을 흘끗거렸던 것을 상기하고는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동무를 하잘 땐 언제고 손님이 왔다며 금세 가버렸다. 누굴까?
‘혹시 아론이 왔나...?’
왕성에서 강제로 포탈을 타기 전에 타이라트가 그랬었다.
아론도 데려가면 괜찮을 것 같다고, 용기가 있으면 알아서 들어올 거라고.
자신이 아는 아론은 용기가 가득한 남자였다.
힘은 약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그가 죽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유리아는 혹시나 아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식당을 나섰다.
만약 아론이 왔다면 그는 성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을 터.
밖으로 나갈 경우 타이라트가 진노할 테니 2층 창문에서 구경해보자.
뭣하면 세간살이라도 던져 아론을 도와주던가.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 아응! .... 니임!-
‘응?’
오른쪽 복도의 끝에 있는 타이라트의 알현실에서 여성의 교태 섞인 앙탈이 들렸다.
유리아는 마왕이 나온 이유가 저것이라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켰다.
아론이 와서가 아니라, 여성형 마물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하려고 나간 것이다.
더러운 놈... 그러나 이해할 만도 하다.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는 욕구를 풀고 싶다면 언제든 풀 수 있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 유리아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저 포악한 마왕은 어떤 섹스를 할까? 라는 궁금증이.
유리아의 전신을 장악한 호기심은 그녀를 알현실로 이끌었다.
-아앙♡ 마왕님...! 너무 세요...!-
여자의 교성이 점점 선명해졌다.
알현실의 거대하고 화려한 잿빛 문 근처까지 도달한 유리아는, 문이 조금 열려있자 침을 꼴깍 삼켰다.
‘들키지는 않겠지...?’
분명 섹스에 정신이 팔려있을 테니 괜찮을 것이다.
용기를 낸 유리아는 틈을 엿보았다.
알현실은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틈이 좁은 것도 한몫했기에, 유리아는 눈으로 보는 대신 귀를 문틈에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팡팡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흐야아...! 꺄아앙...♡ 저어... 벌써 갈 것 같아요...!”
신음이 점점 높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격한 섹스를 하고 있는 듯했다.
교성을 듣고 돌연 지혁과 함께 하던 섹스가 생각나버린 유리아의 목이 한 차례 크게 울렁거렸다.
머리를 털어내 상념을 날려버린 유리아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목소리가 익숙한데...’
톤이 너무 높아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익숙했다.
유리아는 청각을 최대한 집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마왕니임...♡ 마가렛의 보지... 마음에 드시나요...? 마왕님의 형태로 변해버린... 흐아앙! 유부녀 보지의 안에... 마왕님의 씨앗을... 가득 채워주세요...♡ 천박한 제 몸을... 정화시켜주세요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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