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8 고성에서 만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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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라트가 유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어딘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고성이었다.
온갖 마물들이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고성 안으로 들어간 그는, 자그마한 방에 유리아를 던져놓았다.
“꺄악!”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유리아의 비명.
이대로 가다간 이도저도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가 젖 먹던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으읏...!”
타이라트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리를 오므리고 철푸덕 주저앉은 유리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타이라트가 말했다.
“편하게 있거라. 성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허나 탈출하려는 생각은 말도록. 어미의 머리통이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
“.....”
유리아는 표독스런 표정으로 타이라트를 노려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운을 차리면 내게 다시 덤벼들어도 되느니라. 나는 항상 오른쪽 복도 끝의 알현실에 있다. 언제든 환영하지.”
무기력감에 몸을 떤 유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타이라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왕국을 공격하던 마물들은 널 봐서 특별히 물려놓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마탑의 마법사들만 죽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모두 뒈져도 상관이 없었지만, 유리아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중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부릴 노예들은 있어야 하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덜컥!
타이라트가 문을 닫고 나가자 온몸을 잠식하던 포악한 기운이 일시에 쭉 빠져나갔다.
“후아아...”
힘 빠진 목소리를 내뱉은 유리아는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풍스런 분위기의 방.
제법 푹신해 보이는 침대까지 있었다.
자신을 왜 감옥이 아닌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모른다.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게다가 친절하게 자신이 있는 장소도 알려주면서 언제든 덤비라니... 굴욕적이었다.
‘분해...!’
정말 분했다.
동시에 포악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자비를 베풀어주는 그에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가 좋아졌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 통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을 뿐.
어쨌든 타이라트는 디바이스에 대해선 모르는 것 같았다.
유리아는 팔목을 바라보았다.
충전량은 여전히 백 퍼센트. 예상대로 무한대였다.
활과 화살통이 박살났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
‘엄마도 여기 계신 거겠지?’
그렇다면 어머니를 구출하고 곧바로 탈출하기 위해 고성의 지리를 익혀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타이라트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으니 과하게 들쑤시지만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온 유리아는 눈을 두어 번 끔벅였다.
어머니는 무사하다고, 괜찮다고 그가 말했으니... 조금만 자두자.
자신도 모르게 타이라트의 말을 믿은 유리아가 침대에 누웠다.
무척 푹신한 침대. 바람도 선선하게 들어와서 좋다.
그나저나 타이라트는 왜 자신을 봐서 마물들을 물렸다고 했을까?
왕위에 올려놓고 속국의 지도자로 부리려고? 아마 그럴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우으...’
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한 유리아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타이라트의 엄청난 힘. 그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또 지혁과 상당히 닮아있는 그를 생각하니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혁 씨...”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지혁의 이름을 부른 유리아는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장갑을 벗은 뒤 아랫도리에 손을 올렸다.
젖어있는 레오타드. 보고 싶은 지혁의 얼굴을 상상하니 흥분했나보다.
유리아는 중지손가락을 세워 레오타드를 슬쩍 젖혔다.
이후 가랑이를 천천히 비비기 시작했다.
“흐아앙...♡”
적지에서 시작된 자위.
유리아는 오랜 시간동안 지혁을 생각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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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한참을 내리 잤다.
정신이 피로하기도 했거니와 타이라트와의 대결, 그리고 자위로 인해 힘이 쫙 빠졌기 때문이다.
“으응...”
풀벌레소리에 눈을 뜬 유리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변신해있는 상태. 그녀는 이 고성을 나가기 전까지 절대 변신을 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문으로 걸어가 아주 조심히 열어보니, 어두컴컴한 복도가 보였다.
‘배고파...’
지금은 딱 봐도 새벽.
그렇다면 누군가 있다 해도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마물들도 수면을 해야 하니까.
복도로 나온 유리아는 아주 살살 문을 닫고, 날아다니면서 주방을 찾았다.
뭐라도 훔쳐 먹기 위해서였다.
밥을 먹어야 힘도 내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녀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복도를 뒤적거리다가, 은은하게 과일 향기가 감도는 거대한 문에서 멈췄다.
식당은 여기가 분명하다.
유리아는 행여나 누가 들을까 우려해 아주아주 약한 힘으로 문을 밀었다.
주황색 불빛이 내리쬐는 식당 안엔 무척 기다란 식탁과 수많은 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상석엔 화려한 왕좌가 자리했다.
타이라트가 앉는 자리인 모양.
유리아는 상석 반대편 벽난로 옆에 있는 작은 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을 열자 과일 냄새가 강해졌고, 유리아는 흠칫한 채 몸을 숨겼다.
누군가가 헥헥거리며 무언가를 치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살짝 뜬 채로 코너 모서리에서 고개를 빼곰 내민 그녀는, 세 개의 꼬리가 달린 수인 마물이 힘겹게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밝은 갈색 여우귀, 같은 색의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리고 자그마한 신장.
옆모습을 보니 깜찍한 여자아이였다. 그것도 뺨에 세 갈래로 여우수염 문양이 나있는.
큼지막한 귤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 수인은, 발받침에 올라간 상태로 반죽통을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에! 힘드러...”
그 귀여운 모습에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푸훗...”
그러자 수인 마물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아를 발견한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꺄아...!”
하지만 순식간에 달려 나온 유리아가 입을 막자 온몸을 버둥거렸다.
“읍! 우읍!”
퍽! 퍽!
유리아는 조막만한 손으로 자신의 온몸을 때리고 있는 수인을 보며 눈에 호선을 그렸다.
수인이 귀엽기도 했거니와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웃겼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인의 큼지막한 눈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가 엄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손을 뗐을 때 소리를 지른다면... 죽일 거야.”
살벌한 말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수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유리아는 입을 막은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
“우우...”
입이 자유로워지자 울음을 터뜨리려 하는 수인.
하지만 이내 유리아의 경고를 상기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심지어 밀가루가 가득 묻은 자신의 양손으로 입을 막기까지 한다.
코를 훌쩍이던 수인은, 밀가루가 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재채기를 했다.
“으에에... 엣취이!”
유리아가 허헙! 하며 웃음을 참아냈다.
뭐 저리 귀여운지... 마물만 아니었다면 데리고 가서 기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유리아의 그런 모습에 경계심을 푼 수인은, 재채기가 멎자 코에 찔끔 삐져나온 콧물을 닦아내고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누구세요오...? 어?”
혼자 그리 질문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감탄사를 터뜨린 수인이었다.
그녀가 유리아의 연두색 머리카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유리아 엘레나르 님이죠!? 맞죠!?”
제법 큼지막한 목소리였다.
유리아가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해...!”
“아... 쉿...!”
찔끔한 수인이 유리아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제야 안심한 유리아가 물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우음... 마왕님께서 알려주셨어요. 연두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라고...”
“타, 타이라트가 그런 말을 했다고?”
“타이라트 님인데요...?”
그 말에 유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입장에선 찢어 죽여도 모자란 놈이야. 그런 놈에게 존칭을 붙이라고? 절대 안 돼.”
“히익!”
잔뜩 쫄아버린 수인이 구석자리로 우다다다 달려가 몸을 떨었다.
인간 꼬마보다 겁보인 마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유리아가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말이 좀 험했지?”
“.....”
“네 이름은 뭐야? 하위마물에게 이름이 있긴 한가...”
그에 수인이 볼을 부풀렸다.
“있거든요!? 하위마물도 아니에요! 저 엄청 세요!”
“쉿! 조용히 하랬지?”
“아... 네... 저 이름 있어요...”
“뭔데?”
“메릴이에요.”
“메릴? 예쁜 이름이네.”
“정말요...?”
칭찬 한 마디에 다시 경계를 푼 메릴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사탕이라도 준다고 하면 따라올 기세.
헛웃음을 켠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이야.”
부끄러워하며 히히 웃는 메릴.
유리아가 다시 물었다.
“몇 살이니?”
“일곱 살이에요.”
“일곱 살...? 인간들과 비슷하게 성장하는 마물이구나?”
“맞아요. 하지만 전 어른이에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근데 네가 하위마물이 아니라면 뭐야? 엄청 약하던데...”
“우이씨...”
무시받았다는 생각에 메릴이 양팔을 쫙 내리고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아가 황급히 사과한다.
“아, 알았어. 미안해.”
“저 화나면 엄청 무섭거든요? 한 번만 용서해 드릴게요.”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귀엽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낸 유리아가 쪼그려 앉아 메릴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마왕이 나에 대해서 또 뭐라고 했어?”
“우웅... 뭐라고 하셨더라아... 아! 강력한 힘을 가지신 유리아 엘레나르 님을 정중하게 모시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왕이라고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당연히 그래야지.
앙칼지게 팔짱을 낀 유리아가 말했다.
“너희 마물들은 인간인 날 어떻게 생각해?”
“저희는 강한 자를 따라요. 유리아 엘레나르 님은...”
“유리아라고 불러. 길게 부르면 귀찮으니까.”
“아, 넷! 유리아 님은 인간들 중에선 대적할 자가 없고, 저희들 사이에서도 마왕님을 제외하고 가장 강하시니... 존경해야 해요.”
“그래...? 내 손에 동료가 죽었는데도 존경한다고?”
“네. 그게 이상한가요?”
확실히 마물들은 피라미드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면이 있었다.
이것만큼은 마물이 인간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 유리아는, 자신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얼굴을 붉혔다.
유리아의 반응을 본 메릴이 해맑게 웃었다.
“배고파서 오신 거죠?”
“그... 맞아.”
“빵 만들 건데 드실래요?”
“밀가루를 치대긴 하던데... 만들 줄은 알아?”
“물론이에요. 전 요리사니까요!”
“네가...?”
“아직 견습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자꾸 무시하실래요?”
씩씩대는 메릴은 정말 깜찍했다.
더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미안해. 근데 혹시... 안에 벌레 같은 걸 넣는 건 아니겠지...?”
“유리아 님은 빵에 벌레를 넣고 드세요? 인간들은 다 그래요?”
“.....”
유리아가 벙 쪘다.
자승자박.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메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면 일부러 자신을 맥이는 건 아니었다.
꼬맹이의 순수한 일격에 한 방 먹은 유리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이었어. 그럼... 여기서 기다릴까?”
“네! 금방 만들 테니까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기대가 되는 듯 눈을 반짝인 메릴은, 발받침 위로 올라가 다시 밀가루를 치덕대기 시작했다.
빨리 어머니를 찾아야 하지만... 타이라트가 아무 일 없다며 마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 배부터 채우고 찾자.
아니면 메릴에게 물어봐도 된다. 어머니를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생각한 유리아는 한켠에 마련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마왕의 고성에 있는 마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순수하고 여린 메릴이 으쌰으쌰 반죽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그녀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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