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7 자각몽 #2
카앙!
“젠장...!”
조종당하고 있는 기사의 검격을 막아낸 아론이 침음을 삼켰다.
유리아는 그런 아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죽이면 시간도 낭비되지 않고 좋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동료애가 있다고 해도 너무 무르다.
저딴 인물이 기사단장이라니... 참 어이가 없었다.
“도와드려요?”
카가각!
유리아의 귀찮은 듯 한 물음에 기사와 검을 맞대고 미끄러지듯 자리를 바꾼 아론이 외친다.
“됐어! 너 먼저 가!”
바라던 대답이었다.
어떠한 대답이 튀어나오든 먼저 가려고 했지만 말이다.
유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요.”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린 유리아는 침소로 향했다.
엄청난 속도로 왕의 관저에 도착한 유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처럼 쌓인 시체, 모두 검상을 당해 죽어있었다.
아몬에게 조종당한 기사들의 소행은 아니다.
자신이 아는 그들의 실력이라면 저토록 깔끔하게 사람의 몸을 벨 수 없었다.
그렇다면...
‘4기사인가?’
4기사의 소행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관저는 초고위 마물인 발록이 내뿜는 지옥불에 불타 재도 남기지 못하고 타올랐다.
그냥 입에서 불길만 내뱉으면 될 것을,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다니?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생각은 나중에 하자. 일단 엄마부터 찾아야 해.’
유리아가 2층으로 점프하려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억!
널따란 1층 관저의 중앙에서 마물의 아가리 네 개가 확 튀어나와 입을 벌렸다.
거기서 나온 마물은 네 명의 기사였다.
각각 적색, 흰색, 흑색, 청황색 갑주를 입은.
타이라트의 호위인 4기사였다.
유리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4기사!”
그녀가 곧바로 시위에 화살을 걸고 네 명에게 화살을 발사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빠르게.
캉!
하지만 4기사는 아주 손쉽게 화살을 쳐냈다.
거리가 짧아 화살이 성장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공할 힘과 속도였는데 간단하게 막아내다니. 과연 S급 마물이라고 할 만하다.
유리아가 다시금 화살을 걸려고 할 때, 청황색의 기사가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4기사의 수장을 맡고 있는 죽음의 기사였다.
-글렌 엘레나르의 딸, 유리아 엘레나르 왕녀여.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런 거짓말쟁이, 기회주의자의 딸이라고 칭하다니... 차라리 마가렛 엘레나르의 딸이라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을 것을.
“닥쳐!”
쐐애액! 쩌엉!
분노한 유리아가 날린 화살을 쳐낸 죽음의 기사는 낮게 웃었다.
-참을성이 없군. 마가렛 엘레나르를 찾고자 하는가?
어머니의 이름이 죽음의 기사의 입에서부터 튀어나왔다.
유리아의 미간이 꿈틀댔다.
“설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 싶다면 우릴 따라오도록.
거짓말이다. 자신이 마물의 말을 믿을 것 같은가?
게다가 따라오라니... 아랫것을 대하는 것처럼 말하니 기분이 나쁘다.
협상결렬, 벌을 내려줘야겠다.
콰앙!
천장을 박살내고 공중에 우뚝 멈춘 유리아.
4기사가 자신들의 애마를 소환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를 다른 곳으로 납치한 듯했으니, 한 놈만 빼고 다 죽이자.
남은 놈에게 누가 우위인지 확실히 보여준 뒤 어머니에게 데려가도록 만들자.
그녀의 의지가 불타오르는 순간,
철컹!
활의 양쪽 끝부분에 화려한 문양이 생겼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가 입꼬리를 올린 채 화살을 걸었고,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전쟁의 기사에게 한 발 날렸다.
푸슛!
@@
온 갑주가 반파된 죽음의 기사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지켜보던 유리아는 속으로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진화한 활의 위력은 그야말로 최강.
세 명의 기사를 순식간에 죽였고, 수장인 죽음의 기사는 거의 탈진 직전까지 만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녀 따위가 어떻게 이런 힘을...!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까까지는 만만했어? 무시당해서 기분이 별로네.”
-이년...!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기사는,
콰직!
-컥!
유리아에게 머리를 밟혀 땅에 처박혔다.
마물이라지만 기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굴욕도 이만한 굴욕이 없으리라.
한동안 기사의 머리를 밟고 꾸깃대던 유리아가 발을 놓았다.
그러자 기사가 천천히 머리를 일으켰다.
-.....
이제는 조용해진 죽음의 기사. 제 주제를 파악한 듯 보였다.
유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눈치가 생겼나보지? 그래도 나름 강한 마물이라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 것 같아.”
-죽... 여라...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말하지 않는다면, 방금보다 더 큰 굴욕을 선사해줄게.”
-나는 마왕님의 충실한 종이다. 내가 말할...
“갑옷을 전부 벗기고 알몸인 채로 왕성 밖에 던져버릴 거야. 그럼 고위 마물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타이라트의 호위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받은 마물이 알몸으로 던져진다?
마물들이 동요하는 건 기본이고, 분노한 그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이 악독한...! 너에겐 명예 따윈 없는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마물인 너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약자에게 명예 따윈 통용되지 않는 단어란 것을 말이야.”
뿌드득!
투구 안에서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는 흥분으로 인해 몸을 떨었다.
수많은 마물들 사이에서도 강자로 통하는 죽음의 기사다.
저만한 마물이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부들대기만 하니 기분이 좋았다.
“자, 이제...”
유리아가 본격적으로 죽음의 기사를 협박하려는 순간,
[잘 말했다.]
허공에서 왕성 전체를 울리게 할 정도로 크고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유리아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어느 샌가 마물 포탈이 나타나있었다.
쩌어억!
포탈은 곧 입을 벌렸고, 한 존재를 현신시켰다.
그 존재는 바로...
-마왕님!
타이라트였다.
유리아는 그의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했다.
타이라트의 얼굴을 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
그건 다름 아닌 지혁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닮아도 무척 닮았다.
눈매, 콧대, 그리고 턱선까지...
‘무슨...?’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무심한 눈으로 포탈에서 내려온 타이라트가 먼발치에서 손을 휘저었다.
스으으...
그러자 유리아의 발치에 있던 죽음의 기사의 신형이 먼지처럼 화해 사라졌다.
죽인 건지 다른 곳으로 보낸 건지 모를 행동.
타이라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유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약자에게 명예 따윈 통용되지 않는 단어라... 그 말에 깊이 공감하노라.”
“....!”
평소 목소리마저 지혁 특유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붙잡아야 한다.
저놈은 지혁이 아니라 타이라트다. 가만히 놔두면 왕국이 멸망하고 어머니가 죽임을 당한다.
고개를 한 차례 흔든 유리아가 소리쳤다.
“타이라트!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마가렛 엘레나르라면 무사하다. 지금 내 별채 근처에 있지.”
“어머니가 털끝 하나라도 다쳤다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마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네 어미는 괜찮다. 그나저나 흥미롭군. 내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네가 감히?”
유리아는 속으로 타이라트를 비웃었다.
놈은 마왕이라는 이름값만 있을 뿐, 일신의 무력은 약한 존재라고 알고 있다.
그런 놈이 유리아 자신에게 위엄을 보이는 척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목소리를 키우는 걸 보면 한 수는 있나본데, 지금의 자신에겐 비할 수 없을 터.
유리아가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어머니를 돌려주지 않으면...”
“흐음... 글쎄... 내가 보내준다 해도 돌아가려고 할런지 모르겠구나.”
“무슨 소리야!?”
“그건 알아서 생각하도록 하고... 한 가지 제안을 하마.”
“제안...?”
“모든 힘을 다해 내게 덤벼보아라. 이 몸에 작은 상처 하나라도 입힐 수만 있다면 네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유리아는 기가 찼다.
제까짓 게 뭔데 그런 제안을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타이라트가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태.
여기 잠시 어울려주다가 어머니를 되찾자마자 놈을 죽이면 된다.
그 뒤 왕위에 올라 평화를 누리리라.
머리를 굴린 유리아가 타이라트에게 물었다.
“거짓말이 아니란 걸 어떻게 믿지?”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다. 어쩔 테냐?”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팟!
땅을 몇 번 차면서 거리를 벌린 유리아는 타이라트에게 활을 겨눴다.
“후회하게 해주지...!”
“마음대로 해보니라. 나는 이 자리에서 가만히 있겠다.”
오만한 놈이었다.
화살 한 방을 얻어맞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자신의 발밑에서 살려달라고 빌게 해주겠다.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정신을 집중했다.
우웅!
연두색 빛무리가 화살에 모이면서 힘이 농축되기 시작했다.
일단 가증스런 저놈의 팔 한 짝을 날려버려야지.
유리아는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며 화살에 힘을 모았고, 준비가 끝나자마자 시위를 놓았다.
철썩!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타이라트의 어깨를 정확히 노렸다.
유리아는 저놈의 어깻죽지가 떨어져나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콰악!
타이라트가 들어 올린 손바닥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화살은 곧 푸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유리아가 입을 벌렸다.
“말도 안 돼...!”
4기사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많은 기운을 넣어놓고 날린 화살이다.
그런데 타이라트 같은 허접쓰레기가 그걸 간단히 막다니? 이해가 안 됐다.
“이게 전부인가?”
“이익...!”
타이라트의 조롱에 이를 악 문 유리아가 다시금 화살을 걸었다.
제법이다. 과연 마왕. 유리아는 타이라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수정했다.
이번엔 최대한의 힘을 넣어서 쏘자.
오랜 시간 화살에 기운을 불어넣은 유리아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타이라트의 옆구리를 노렸다.
철썩!
시위를 떠난 화살은 마치 혜성처럼 꼬리에 연두색 빛줄기를 줄줄 흘려대며 타이라트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쩌엉!
타이라트가 간단하게 휘두른 손에 의해 막혀 힘없이 떨어졌다.
유리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시간을 들여 엄청난 힘을 때려 박은 공격이었다.
발록의 대가리도 부술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로.
그런데 고작 귀찮은 듯 휘저은 손에 막혀버리다니...?
타이라트가 이 정도로 강하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패닉에 빠진 유리아의 숨이 가빠져왔다.
“더 볼 것도 없겠군.”
혀를 찬 타이라트가 한 발을 성큼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발산되어 지축을 울렸다.
쿠구구구...!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진동.
유리아는 자신의 몸을 옥죄어오는 기이한 힘에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볼품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
천천히 기운을 내뿜으며 유리아에게 다가간 타이라트가 사악하게 웃었다.
“약자에게 명예란 없지. 그렇지 않나?”
“우... 아아...”
“나와 함께 별채로 가지. 네게 선택권은 없다.”
그리 말한 타이라트가 포탈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마물의 입 속을 본 유리아는,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깊디깊은 절망을 느꼈다.
멀리서부터 한 남자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론의 목소리. 하지만 유리아는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타이라트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놈도 데려가면 괜찮을 것 같군. 용기가 있다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그는 유리아의 팔을 확 잡아끌고 강제로 일으켰다.
“꺅!”
짧은 비명을 터뜨린 유리아는 타이라트가 자신의 활과 화살통을 빼앗아 박살을 내는 와중에도 아무런 반항조차 못했다.
그저 삶을 포기한 사람마냥 몸을 축 늘어뜨릴 뿐.
결국 유리아는 타이라트에게 이끌려 포탈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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