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99화 (99/471)

EP.99 박사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난 무척 편안한 마음으로 세화와 데이트를 즐겼다.

비밀기지나 오피스텔이 아닌, 밖에서 그녀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외출에 신이 난 세화는 거리를 발랄하게 돌아다녔는데, 그녀의 나풀거리는 테니스 치마 사이로 팬티가 보일까 걱정이었다.

“지혁아! 나 이거!”

들뜬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세화가 즉석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검지를 쫙 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행동에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한 가지 거슬리는 건 날씨.

우중충한 비가 왔으면 아주 좋았으련만... 너무 화사하니 짜증난다.

아이스크림가게로 걸어간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얼마에요?”

“바닐라는 오천 원이고... 초코 코팅은 육천 원입니다.”

이런 씨발. 바가지를 씌우네?

아무리 관광객이 많은 장소라도 그렇지 콘 아이스크림 하나가 오천 원이라니...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깨끗한 소상공인들이 욕을 처먹는 거 아니야.

이래서 인간은 구제가 안 돼요.

“하나 주세요. 초코 코팅된 걸로.”

“예. 감사합니다.”

돈을 지불한 나는 세화가 팔에 착 달라붙어오자 피식했다.

기분이 좋아도 너무 좋은 모양이다.

금방 나온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그녀는, 그걸 내게 내밀었다.

먼저 먹으라는 뜻.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아이스크림의 절반 이상을 먹어 삼켜버렸다.

“어...?”

멍하니 반 이상이 사라진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던 세화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해...?”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화의 허탈한 얼굴이 걸작이었기 때문.

너네 쪼개면 세화가 기억해뒀다가 다 죽일 텐데... 그냥 갈 길 가지...

어깨를 으쓱한 내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비싸서 그런가? 맛있네.”

“하... 진짜 밉상...”

투덜거리던 세화는 이내 내 입술에 묻은 초코시럽을 손가락으로 닦아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쪽 빨았다.

그 대담한 행동에 몇몇 남자들이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부럽냐? 부러우면 마왕해서 꼬시던가.

그나저나 실종된 아이테르가 조금 신경 쓰인다.

지금 마르셀라가 온 지구를 뒤적거리고, 다시 한 번 탐색을 하고 있는데도 존재가 전혀 없다.

6탄이라 스토리라인은 다르다고 애써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사람... 아니, 마왕 마음이란 게 있잖은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핵까지 탐사해야하나 나오려나...

“지혁아.”

“응?”

“지금 딴생각하는 거야?”

어느 샌가 뾰로통해있던 세화가 날 타박했다.

간만의 데이트인데 내가 너무 소홀했구나.

“미안해.”

세화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은 난 거리를 돌아다녔다.

쭉 펼쳐진 마천루의 꼭대기 전광판엔 화베이에서 찍힌 유리아의 사진이 매우 많았다.

세화도 마찬가지, 두 사람이 함께 무기를 들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실제로 찍힌 사진은 몇 개 없었고, 저명한 극사실주의 화가가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세화에게 전광판들을 가리킨 내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지구의 영웅이래.”

그러자 세화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속삭인다.

“지구의 적이겠지.”

그리 말한 세화는 내 귀에 바람을 후 불었다.

간질간질하고 야릇한 느낌. 고간이 서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히죽 웃은 나는 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음... 지구의 주인.”

“오늘 신났네? 까부는 거 보니까.”

“히히...”

배시시 웃는 그녀.

오늘은 세화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줘야겠다.

**

다음 날, 박사의 연구실.

나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간 상태로 연구실 안에 들어왔다.

여전히 일을 하고 있던 박사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쏭, 너 괜찮아...?”

“예...? 뭐가요?”

“얼굴이 퀭하잖아. 잠을 못 잔 거야?”

“아... 이거... 괜찮아요. 세수만 하고 올게요.”

“그, 그래...”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고 얼굴을 푹 담갔다.

이제야 정신이 드네. 어제 세화에게 정기를 다 빨려서 힘들다.

스포츠선수들이 아내와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사진을 종종 접할 때면, 선수의 얼굴이 십중팔구 핼쑥해져있었다.

오늘은 나도 그들과 같았다.

어제 세화는 내가 온갖 아양과 어리광을 다 받아주니 물 만난 고기마냥 날뛰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서울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고, 저녁부턴 오피스텔에 들어가 몸을 섞었다.

밤새 해달라는 애무와 체위를 전부 해줬고, 정액이 동날 정도로 쥐어짜내졌었다.

내 정기는 물론 육체와 영혼까지 다 가져갈까봐 쫄아있었지.

물론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만큼 무서웠다는 얘기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기지개를 쫙 펴고 박사 옆에 앉았다.

그러자 박사가 살포시 웃음을 짓는다.

“세화랑 좋은 일 있었구나?”

“네. 섹스했어요.”

“.....”

벙 쪄버린 박사의 얼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왜요? 박사님도 그 말을 하시려고 했잖아요.”

“아, 아니... 그걸 대놓고 말하니까 조금...”

“개방적인 나라 출신이시면서... 이 정도는 양반 아닙니까?”

내 말에 박사가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그나저나 나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한국에 오래 있다 보니 한국인이 되는 기분이야.”

“말하시는 것만 들어보면 한국인이랑 구분이 안 되긴 해요. 잠깐만...”

말끝을 흐린 나는 박사의 이마에 묻은 주황색 방울을 떼어냈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해하는 박사.

나는 태연한 얼굴로 손가락에 번지기 시작하는 주황색 액체를 보았다.

“뭐 묻어서요. 이게 뭐에요?”

“아, 그거... 새로 만든 화살에 색 입히고 있었거든. 색소가 조금 튀었던 것 같네. 고마워.”

화살에 색을 입혀? 왜 그따위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아...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구나.

뭐라도 하지 않으면 외로우니까 그런 것 같다.

방금 섹스를 언급했을 때 당황한 것도 그 심정과 연관이 조금 있겠지.

고플 텐데 하지 못하니까.

참... 정조관념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오늘 좀 꼬셔야겠다.

“색은 다 입히셨어요?”

“응. 일곱 개 만들었는데, 무지개색으로 입혀봤어.”

“아이테르가 무지개색이라서 그런 건가요?”

“맞아. 정확히 알고 있네. 나중에 세화한테 디바이스를 받아서 검도 이렇게 칠해볼까?”

세화의 아이테르는 이미 시꺼먼데... 무지개의 무 자도 찾아볼 수 없단다.

“그거야 박사님 마음이죠. 그나저나 뭐 수상한 소식 같은 건 없나요? 시리아 때처럼.”

그 말에 박사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묻는다.

“너 괜찮아?”

“이젠 다 잊었어요. 홀가분하기도 하고...”

“다행이네... 시리아의 그 사건 이후 나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수상한 소식은 없어. 반길 만한 소식도 없고.”

난 수상한 단체가 생기던 말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박사에게 이걸 물은 이유는, 혹시나 그녀가 아이테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아예 모르는 눈치다.

“그래요? 그럼 전 여기서 한숨 잘 테니까... 저녁 되면 깨워줘요.”

“그럴게. 근데 왜 집에서 자지 않고 여기서 자?”

“박사님이랑 술 한 잔 해야죠. 저번에 말했잖아요. 언제 꼭 같이 술 먹자고.”

“아... 그랬지... 그래서 온 거야?”

“네.”

“난 또 일거리라도 찾으러 온 줄 알았네.”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요.”

“그럼 난 미쳤다는 소리야?”

“그거야 뭐... 박사님이 생각하기 나름이죠.”

내 농담에 박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꽤나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하긴, 오늘은 남편 언급도 안 했고, 한동안 혼자 일만 하는 박사를 챙겨주는 사람은 나뿐일 테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하지.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인 나는, 연구실 구석에 마련된 휴게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세화한테 다 빨린 기운을 좀 복구시켜놓자.

**

“쏭, 일어나.”

제법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박사의 조곤조곤한 말에 눈을 떴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고 목을 이리저리 꺾은 내가 물었다.

“으음... 지금 몇 시에요...?”

“9시.”

“9시...? 오후 9시요?”

“맞아.”

“그때까지 일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 나도 점심 먹고 한숨 잤는데 일어나보니까 이 시간이더라.”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체조를 했다.

그러자 박사가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스무 살 주제에 하는 짓은 아저씨가 따로 없네.”

“그거 편견입니다.”

“그래, 미안해. 갈까? 아는 술집 있어?”

“그냥 아무데나 들어가면 되죠.”

“흐음... 난 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시고 싶은데...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왜? 나랑 그렇고 그런 일이라도 하려고?

으흐흐...

“조용한 곳이라... 찾아보면 있겠죠.”

“그럼 미리 찾고 가자.”

“아뇨. 그냥 가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리프레쉬라도 하면 좋잖아요.”

“그런가...? 네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린 연구실을 나와 같이 은평구의 거리를 걸었다.

세화의 타락을 앞당기려고 범죄조직을 풀어놓았었는데, 놈들이 망가뜨린 거리 곳곳이 아직 복구가 덜 된 상태여서 인파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권이 밀집된 번화가로 나가니 나름 북적이긴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박사가 말한다.

“사람들이 많네...? 뭔가 어색해.”

“거의 집과 연구실만 왔다갔다 하셨으니까 그럴 만도 하죠. 가끔 혼자라도 나오셔서 바람도 쐬고 그러세요.”

“그래야겠다.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어. 고마워, 쏭.”

“고맙긴요. 저기로 가실래요? 시끄러운 노래주점도 아니고... 룸 완비라는데?”

내가 5층 빌딩의 꼭대기에 있는 술집을 가리키자, 그쪽 간판을 읽어보던 박사가 생긋 웃었다.

“괜찮겠다.”

우린 곧바로 술집에 올라가 인원수를 말한 뒤 방을 배정받았다.

간단한 안주와 여러 술을 주문한 나는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주었다.

종업원이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가자, 박사가 묻는다.

“나한텐 뭐 먹고 싶은지 안 물어봐?”

“잘 모르시잖아요. 좋아할 만한 것들로 시켰어요.”

“그거 편견이야.”

연구실에서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박사였다.

나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사실 네 말대로 잘 몰라. 그냥 골려주고 싶어서 물어봤어.”

“박사님도 이상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런가?”

박사가 살포시 웃어보였다.

직사각형의 검은 뿔테안경이 농염한 외모와 더없이 어울린다.

화장기가 없지만 몸매와 외모가 원체 뛰어나서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미시의 정석이 이러할까?

입는 옷차림도 대부분 정장에, 긴 스커트를 고수한다.

저걸 신도시 미시룩처럼 바꿨으면 좋겠는데...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박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음식이 나오자 씨익 웃었다.

소주병을 흔들고 뚜껑을 딴 내가 물었다.

“오늘 얼마나 마실 거에요?”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좋잖아. 적당히 마시자.”

“박사님이 말씀하시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요? 일이나 적당히 해요.”

“따라줄 거야? 말 거야?”

“따라드려야죠, 예.”

나는 박사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소주병을 기울였다.

그러자 박사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술을 따라준 나는 혼자 자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사가 손을 들어 날 제지했다.

“내가 따라줄게.”

“박사님도 한국에 적응을 완전히 끝내셨네요.”

“사실 병째로 마시려고 했는데, 네 행동 때문에 아차 한 거야.”

그 말에 내가 대소를 터뜨리며 잔을 들었다.

박사는 수전증이라도 있는지 손을 은은하게 떨며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건배할까요?”

“그건 싫어.”

“알겠습니다.”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캬... 하는 소리를 내뱉으니, 박사가 피식 웃더니 술을 홀짝 마셨다.

털털한 줄 알았더니, 여기선 나름 다소곳하네?

“박사님은...”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하며 박사의 사생활을 비롯한 여러 정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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