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동화, 음문 #2
‘달라졌군.’
유리아를 본 내 생각이었다.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
정의가 뒤바뀌었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노력에 대한 결실이 맺히는 순간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유리아에게 음문이 생겼다는 건 나도 느껴서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서 생성되지 않은 건 조금 아쉽지만, 어쨌든 예상대로 됐다.
나는 내 앞에서 얼른 말을 하고 싶어 입을 오물거리는 유리아를 잠시 주시했다.
그러자 유리아가 몸을 들썩거리며 말한다.
“지혁 씨... 저... 숙제 끝냈어요...”
“알아. 톡 봤어.”
“그럼...”
말끝을 흐린 유리아가 카펫에 무릎을 꿇고 소파에 옆으로 누운 날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내가 물었다.
“세상엔 문제가 많지?”
“네! 엄청 많아요!”
“권력자들은 부패했고, 각 나라의 수장들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데 주저하지 않아. 앞에선 평화를 부르짖지만 뒤에선 음흉한 간계를 꾸미고 있어.”
“네.”
“범죄자들도 그래.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잡힌다 해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놈들이 한가득이지. 그런 놈들을 지켜주겠답시고 우리가 나서는데 돌아오는 건 희롱과 비난이야.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없어. 정말 고맙다면 앞에 나서서 비난을 막지, 왜 숨어있겠어?”
“맞아요. 그깟 인간들을 아무런 보답 없이 지켜주는 건 잘못된 거에요. 지금까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로 인해 뒤바뀐 정의를 진실 된 마음이라고 믿는 유리아를 보니 자지가 빳빳하게 선다.
내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니, 유리아가 말을 잇는다.
“전 지혁 씨의 정의에 따를 거에요.”
유리아는 진정한 평화가 오려면 인간들을 찍어 눌러 힘으로 지배한 다음, 한마음 한뜻으로 마물들을 상대해야한다고 생각 중일 터다.
마물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인간들도 악이라고 규정하며 날 절대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
이제 마음 편하게 유리아를 능욕하면서 타이라트에 대한 원망을 지워나가고, 도덕심을 붕괴시켜 타락하도록 만들면 된다.
“잘했어. 정답이야.”
유리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자, 그녀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네...”
“상을 줘야겠네?”
“흐으응...♡”
기대감 어린 눈. 빨리 상을 받고 싶나보다.
그냥 내주면 재미없잖아. 미션을 하나 줄게.
“그 전에... 내게 조금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 네가 해결해줄 수 있는데.”
“그게 뭔가요? 어떠한 일이든 할래요.”
“김태곤 씨와의 사업 이야기가 틀어졌어.”
“.....”
유리아가 흠칫했다.
불안한 눈동자를 데굴 굴린 그녀가 묻는다.
“왜요...?”
“나는 김태곤 씨보다 능력이 좋아. 그건 그 아저씨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고.”
유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태곤이 했던 송지혁에 대한 칭찬을 상기했구나.
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내 턱을 쓰다듬었다.
“각자 회사를 경영하는 것으로 합의까지 완료된 상태고, 계약서까지 썼는데 김태곤 씨가 우리 쪽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내비치더라.”
유리아의 얼굴에 짜증이 스쳐지나갔다.
왜 굳이 일을 벌여선 상을 못 받게 하는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난 말이야... 나보다 능력도 없는 늙다리가 기어오르는 걸 참지 못하겠거든?”
“.... 느, 늙다리요...?”
“응. 늙다리. 왜? 내가 말실수라도 했어?”
당연히 했다.
딸 앞에서 아비를 두고 늙다리에, 기어오른다니.
예전의 유리아였더만 분개하며 내게 죽통이라도 날렸을 터였다.
하지만 유리아는 본질적인 마음이 변한 상태다.
절대갑이 지배해야한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김태곤이라는 ‘을’이 송지혁이라는 ‘갑’에게 기어오르다니 웃기지도 않다고 생각할 테지.
“아니요...”
다만 내가 아비를 욕하는 걸 거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쩔 건데? 네가 감히 내게 반항이라도 하려고?
못할 거다. 오히려 아양을 떨었으면 떨었지.
“제가... 제가 해결할게요. 아빠를 용서해주세요...”
“내가 용서할 거라 생각해?”
“지혁 씨... 다시는 아빠가 말을 바꾸지 않도록 설득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흐음...”
고민에 빠진 척한 나.
유리아는 내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옷을 훌러덩 벗었다.
“아빠가 마음에 안 드시면... 절 대신 벌해주세요...”
기특하구나, 기특해.
“효녀네? 숙제도 마쳤는데 그럴 수야 없지. 제대로 해결하면 널 봐서라도 특별히 용서해줄게.”
“네...! 네!”
유리아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지혁 씨... 정말 고마워요...”
“내일까지 해결하고 와.”
“알았어요...”
**
그날 밤, 김태곤으로 변장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유리아의 격한 환대를 받았다.
“아빠! 대체 뭐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상황판단이 안 돼요?”
다짜고짜 저리 말해오는 유리아였다.
음... 은하를 넘어 환생한 아버지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람?
“뜬금없이 무슨 소리니?”
“회사 병합이요! 지혁 씨랑 계약서까지 썼는데도 그분 회사의 경영권을 갖겠다고 했다면서요?”
“네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게냐?”
“지혁 씨한테 들었으니까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경영권은 당장 지혁 씨한테 넘겨요! 다 합의해놓고 이러는 건 이해가 안 가요! 연구실 지원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눈싸움을 받아주었다.
예전이었다면 찔끔해서 눈을 내리깔 것을... 슬프다 슬퍼.
그나저나 연구실 지원에 차질이라니... 꽤나 좋은 핑계거리를 만들어냈구나.
좋아. 유리아의 함정에 빠져줘야겠다.
“연구실 지원에 차질? 그럴 일은 없다.”
“왜 단언하세요? 지금 지혁 씨와 캐시 박사님이 회사병합 후 어떤 식으로 연구실에 자금을 유통할지 계획을 다 짜놓았다구요!”
“나도 지원해줄 수 있다.”
“아빠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지혁 씨는 겸손하면서도 언동에 자신감이 묻어나있고, 추진력도 빠르고, 사람을 보는 눈 또한 좋고... 주변 사람들이 잘 따를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나다고!”
“허...”
“20년 동안 같이 사업을 하기로 했으면서 왜 욕심을 부리는데요? 아빠의 욕심 때문에 타이라트를 찾는 일이 더 늦어질 수도 있어요!”
“.....”
나는 할 말이 없는 척 입을 앙다물었다.
씩씩대던 유리아가 조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혁 씨와 우리에겐 공통된 목적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빠가 그걸 망치고 있다구요. 그냥 같이 조언하면서 사이좋게 경영해나가면 되지, 왜 이제 와서 답답하게 이러는 거에요?”
“유리야. 난 그저 경영에 도움을 주려고...”
“아빠보단 지혁 씨가 더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요.”
“허... 유리야, 그건 좀 실망이구나. 나 또한 큰 기업을 일군 사람이란다.”
“아니요, 아빠가 아니라 김태곤 아저씨가 일궈놓은 사업이죠. 아빤 그저 숟가락만...”
“유리아 엘레나르!”
내 역정이 담긴 목소리에 유리아가 헉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눈앞에서 날 모욕했으니 그럴 수밖에.
모멸감을 잔뜩 느낀 사람을 연기하던 내가 말했다.
“흥분해서 말이 헛 나왔다고 믿으마.”
“.....”
퉁명스런 표정을 짓는 그녀.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내가 숟가락만 올렸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네 이년! 아빠를 존경해야지!
“대체 송지혁 씨가 뭔데 네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느냐?”
내 물음에 어금니를 꽉 깨물던 유리아가 답한다.
“전... 지혁 씨를 사랑해요.”
“뭣이?”
“지혁 씨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아주 좋은 관계요. 우린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요.”
나는 뒷목을 잡고 끄으응... 하는 소리를 냈다.
송지혁이라는 악마에게 마음을 홀라당 빼앗기다니!
한참 충격에 빠져있던 나는 냉장고에 걸어가 소주를 꺼냈다.
병째로 그걸 꿀꺽꿀꺽 들이켠 내가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오래 됐어요.”
“하, 하지만 네겐 아론이 있잖느냐. 환생한 아론은...”
유리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이 잔뜩 짜증났다는 것을 표현했다.
“이제 안 만나요.”
“어째서?”
“몇 번 만나봤지만 그는 절 기억하지도 못해요. 기억을 억지로 되돌리려 하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포기했어요.”
“허... 유리야. 너야말로 생각이 있는...”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빼액 소리를 지르는 그녀.
나는 벙 쪄선 유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씩씩대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흥분하고 난리야? 유리라고 부른 게 그렇게도 싫었나?
송지혁만 그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인 것 같다.
나는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유리아의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방문을 연 나는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유리아를 보고 피식 웃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서 그럴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내가 말했다.
“딸아. 미안하구나.”
“.....”
“네게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보수적이잖느냐. 너는 그 어떠한 사람도 만날 수 있단다. 그게 송지혁 씨든 누구든.”
“정말요...?”
“그래. 그리고 네 말이 전부 맞다. 내 욕심 때문에 큰 그림을 보지 못했다. 내일 당장 경영권 이야기를 처리하러 가마.”
그 말에 상체를 일으킨 유리아가 묻는다.
“사과도 할 거에요...?”
“사과라...? 굳이 해야 하느냐?”
“아빠가 잘못했잖아요. 하실 거죠? 전 아빠가 지혁 씨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저희 셋이서 같이 살게 될 수도 있잖아요.”
세화랑 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살 예정이긴 하지.
김태곤은 예정에 없단다. 원래 존재가 없는 놈이거든.
“허어... 벌써부터 그런 미래를 그리느냐? 딱 봐도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전 확신해요.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흐음... 송지혁 씨는 이세화 씨와 헤어졌느냐?”
“네.”
거짓말을 한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기고 싶나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승낙했다.
“알았다. 사과하마.”
유리아는 내 대답에 무척 만족했는지, 나를 확 안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빠.”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린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송지혁 씨와 오래 만났으면 좋겠구나.”
“그건 당연해요. 앞으론 지혁 씨가 거슬려하는 일 같은 건 하지 마세요.”
대놓고 저렇게 말하다니... 송지혁의 위치가 그야말로 하늘이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아비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에 관해선 하나도 모르는 딸내미가 아비에게 참견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나이가 두 배는 더 어린 꼬마에게 숙이라니.
보통의 아버지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송지혁이자 김태곤이다.
도덕성이 무너져내려가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유리아에게 수긍해주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알았다.”
“그냥 지혁 씨가 하라는 대로 할 거죠? 절 위해서요.”
“오냐. 그렇게 하마.”
“아빠가 최고에요.”
유리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살짝 성감대를 만져볼까?
아니다. 유리아는 힘이 곧 법도라는 마음가짐이 깊숙이 각인된 상태.
거기다 지금의 내 행동과 대답으로, 유리아는 김태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아래로 두고 있을 것이다.
이 몸으로 괜히 매 맞을 짓을 할 필요는 없다.
난 유리아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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