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96화 (96/471)

EP.96 동화, 음문

한대거리의 어느 카페.

세화와 유리아는 아침 일찍 만났다.

-세화야. 잘 지냈어?

-네, 언니.

카운터와 아주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선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싸우고 화해를 했는데 감정의 골이 아직 남아있는 친구들처럼.

세화야, 그냥 연기만 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언니. 어디 불편해요?

세화의 물음.

유리아가 앉을 때 어물쩡댔었기에 그걸 지적하는 것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리 묻다니... 여우가 따로 없다니까.

숨이 턱 막힌다 막혀.

-아니? 왜?

-아니에요. 근데 왜 부르셨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내가 조금 실례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네. 언니니까 대답해드릴게요.

-고마워. 바로 물어볼게.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세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이요?

-응.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에요?

-아... 인터넷을 보니까 성희롱적인 댓글들이 많더라고. 그래서 혹시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어서...

연구실에서 몰래 대화를 엿들었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엄청 싫어요.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유리아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플 때문이야?

-네. 지금 누구 때문에 평화가 지켜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댓글만 달아대고... 한심해요.

세화는 커피를 쪽 빨며 분개했다.

유리아는 그런 세화를 보며 이해한다는 얼굴을 했고 말이다.

세화가 말을 이었다.

-또 있어요. 세계연합의 몇몇 사람들이 지혁이와 박사님에게 접근했어요. 자기네들 나라에서 각종 혜택을 줄 테니 마물이 나타나면 우선적으로 처리해달라고 말이에요.

-저, 정말...?

-정말이에요. 하지만 이 두 가지 때문에 제가 인간들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니에요. 세상엔 착한 사람들도 많았었으니까요.

-그럼...? 왜 마음이 바뀐 거야?

-시리아에서의 일... 아세요?

-시리아? 거기가 왜?

세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아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고, 말문을 열었다.

시리아의 테러단체가 인체실험을 자행했던 일.

그걸 전부 유리아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유리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중반부쯤, 지혁이 실험체가 될 뻔했다는 대목에선 질겁했고, 후반부엔 주먹을 꽉 쥐며 분통을 터뜨렸다.

모든 사정을 말해준 세화는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셨다.

유리아가 충분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시간을 주려는 행동이었다.

-.....

완전히 얼어버린 유리아는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인간들이 그런 천륜을 져버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 같다.

한참동안 커피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가 입을 연다.

-네가 인간들을 싫어하게 된 이유가 시리아에서의 사건 때문이었구나...

-네.

-하지만 아직...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남아있지? 아이테르는 그런 힘이잖아. 만약 네 마음이 꺾인다면 다시는 변신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뇨. 아이테르는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관계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악을 처단하는 힘이에요. 제 마음만 굳건하면 변신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인간들이 다시는 저희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오호라, 유리아가 숙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다니.

예뻐 죽겠다. 상이라도 줘야겠어.

세화의 눈에선 다소 사악해 보이는 안광이 흘렀다.

그 눈빛을 읽어낸 유리아가 경악한다.

-자, 잠깐만...! 설마...

-전 이만 일어나볼래요. 그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죄송해요, 언니.

의자를 뒤로 드르륵 민 세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이지도 않고 카페를 나갔다.

유리아는 그런 세화의 뒷모습을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하아...”

연구실로 가던 유리아는 답답했는지 자신의 가슴을 쳤다.

카페에서 세화는 인간들을 악으로 규정하려고 했다.

아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이미 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희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지배해야한다는 말을 했을 땐, ‘저희’라는 단어가 왠지 마물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원래라면 그런 말을 했던 세화를 따끔하게 혼내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 또한 인간들을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이었던 건 시리아 사건이었다.

마물들의 신체부위를 인간들에게 이식하려 했던 사람들.

상상조차 못했는데 그런 끔찍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도무지 믿기 싫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말씀대로 압도적인 힘에 의한 지배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래... 마물들은...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곳 어딘가에 있을 타이라트의 명령을 따라.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

타이라트 앞에선 아무리 강대한 마물들이라도 엄청난 충성심을 보인다.

‘마왕’이라는 이름의 힘이 그들의 심신을 묶는 것이다.

인간들도 그렇게 되면 끔찍한 짓을 할 생각 따윈 못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연구실에 도착한 유리아가 고개를 들어 센서에 자신의 얼굴을 찍었다.

그러자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두께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왔니?”

박사는 장비 개발을 하고 있는 도중 유리아를 반겼다.

“네, 안녕하세요?”

“전화했을 땐 목소리가 좋지 않아보였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네? 왜 보자고 한 거야?”

“여쭤볼 게 있어서요.”

박사가 자신의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옆에 놓인 에너지드링크를 한 모금 들이켠 박사가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유리아가 얌전히 자리에 앉자, 박사가 방긋 웃으며 묻는다.

“커피 마실래?”

“아뇨. 마시고 왔어요.”

“그래?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뭐가 궁금해?”

“사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응.”

“만약 박사님이 지구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유리아의 질문에 눈을 크게 뜬 박사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생각만 해도 좋네.”

“정말요...?”

“‘나라’가 아니라 ‘지구’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 강대하다면 적대국도 없을 테고... 정치력 따윈 필요도 없을 테니까... 오랜 시간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지.”

“그래요...?”

“내 생각은 그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유리아는 박사도 이 의견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하지만 유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원래라면 힘에 의한 철권통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박사는 소련 같은 공산국가를 예로 들며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아는 김태곤, 그리고 이세화의 의견을 들으면서 마음가짐이 서서히 바뀌었다.

또 지혁을 경외하고, 그가 지구를 지배하면 어떨까? 라는 가정을 한 채로 질문의 내용을 바꿔 던졌다.

박사는 그저 유리아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문에 대답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했는데?”

“아... 그냥요. 아버지랑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이 주제가 튀어나와서요.”

“그랬구나.”

“그런데... 박사님. 혹시 시리아에서의 인체실험 사건을 아세요?”

그 말에 박사의 웃고 있던 얼굴이 돌연 새파랗게 질렸다.

한숨을 내쉰 박사가 말했다.

“세화한테 들었구나.”

“네.”

“그래... 끔찍한 인체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어. 그쪽을 수상하게 생각한 쏭이 은밀하게 침투했다가 잡혔고, 도움을 요청했지. 하마터면 쏭이 죽을 뻔했어. 다행히 모두 잡아 처넣긴 했는데... 세화가 충격을 받아 며칠간 고생했지.”

박사는 유리아의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모르는 충격적인 일이 더 있구나... 라고 확신했다.

“그렇군요...”

“시리아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이미 끝난 일이야.”

“아, 알겠어요...”

“궁금한 건 더 없니?”

“네. 이만 가볼게요.”

“이 질문을 하려고 연구실까지 온 거야? 너도 약간 사차원적인 구석이 있구나. 쏭처럼.”

지혁과 닮았다고 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유리아였다.

박사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연구실을 나온 유리아는 플라잉 택시를 탔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승현을 제외하면 세 명 모두 힘에 의한 통치를 좋게 보고 있었다.

다만 승현의 경우 이상을 쫒는 면이 있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을 예정이니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면... 만장일치의 결과가 도출된 셈이다.

“후...”

답답한 숨을 내뱉은 유리아는, 자신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다 이 주제를 좋게 보는데... 아무래도 타이라트에 대한 원망으로 생각의 폭이 좁아져버린 것 같다.

그녀는 문득 어제 지혁의 모습이 생각났다.

승현과의 데이트를 들켜버리고, 의정부에서 벌을 받았던 일.

채찍을 들고 자신에게 휘둘렀을 땐 너무 아팠는데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했을 뿐.

지혁이 무서웠고, 존경스러웠다.

존경은 두려움으로 인해 나온다는 말이 무척 공감됐다.

그야말로 폭군의 자태. 힘 있는 지배자의 훌륭한 예시는 먼 곳이 아닌 바로 자신의 옆에 있었다.

‘후아아...♡’

지혁을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랐다.

지혁의 태도를 보고 선망의 감정을 가졌고, 지금에 이르러선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종속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됐다.

포식자에게 굴복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인간들 또한 힘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지배자를 암군이라고 평가하며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성군이라고 칭송할 것 같다.

지금의 자신이 지혁을 떠받드는 것처럼.

유리아는 자신의 입장을 인간들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했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지혁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뿐.

유리아는 눈을 감고 지혁이 내어준 숙제를 정리했다.

타이라트와 지혁은 비슷한 류의 폭군이다.

지혁이 조금 더 자비롭긴 하지만, 본성은 똑같다.

힘에 의한 복종을 원하는 무자비한 지배자.

‘타이라트는 말썽이 많은 왕국을 평화롭게 통치하기 위해서... 침략을 한 걸까?’

생각해보니 몇몇 귀족들이 아버지의 통치에 불만을 갖긴 했다.

겉으론 잘 따르고 있었지만 속으론 분란을 야기할 생각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타이라트는 인간들의 그러한 특성을 알고 에란델 은하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정복을 일으킨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반항하지 않고 굴복했다면, 문제가 많고 속내를 감추는 야비한 인간들만 죽인 뒤 속국으로 삼아줬을 수도 있다.

왕국이 반항한 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아버지는 평화를 추구하며 복종을 원했지만, 음산한 귀족들의 음모에 놀아나 잠시 이지를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겠다.

타이라트가 원망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러 의견을 듣다보니 침략을 한 이유는 이해가 된다.

지구만 봐도 그렇다. 여러 나라가 있고, 그 나라는 앞에서, 혹은 뒤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전쟁도 권력자들의 욕심에 의해 발생했다.

이 일을 방지하려면... 저들이 분란의 씨앗을 심을 수 없게끔 힘으로 내리눌러야 한다.

평화를 추구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지혁처럼, 타이라트처럼 포악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지배해야만 문제가 없어진다.

답답한 안개 속을 해쳐나간 기분이 이러할까? 이제야 확고해지는 느낌이다.

빨리 지혁이 내어준 숙제를 보고해야겠다.

유리아가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쩌적-!

지혁의 안배로 유리아의 마음속에 생겼던 균열이 크기를 불렸다.

그 균열 사이로 악의가 침투하면서 유리아의 깨끗한 심신을 잠식해나갔다.

내면이 엄청난 격동을 하고 있음에도, 유리아는 지혁에 대한 생각으로 몸이 달아오른다고만 생각했다.

스으으...

그때, 거뭇한 악의가 유리아의 몸에서 피어나 하복부로 들어가면서 음문이 생겨났다.

세화의 음문 키워드가 신성시하는 사랑고백이었다면, 유리아의 키워드는 동화였다.

지혁, 타이라트와 대척점에 서있던 마음을 허물고 그의 패도에 동화되면서 이 음란하고 사악한 증표가 나타났다.

지혁이 수작을 부려놓아 보이지 않게 된 이 음문은, 유리아가 배덕한 일을 하면 할수록 짙어질 것이었다.

‘춥다...’

유리아가 자신의 팔을 싹싹 비볐다.

스산한 느낌을 받았을 뿐더러 어디서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뭔가 싶었던 그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택시 위에 있던 송풍구를 발견했다.

후우우웅!

기세 좋게 내뿜어지는 차가운 바람.

에어컨 때문에 추운 거였다.

바람소리도 거슬리고.

유리아는 신경질적으로 송풍구를 닫았다.

그제야 조용해진 택시 안.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지혁에게 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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