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 포악한 수컷에게 굴복하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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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후...”
유리아는 상기된 얼굴로 한대거리를 걸었다.
이틀간 시도 때도 없이 섹스만 해댔고, 하루를 쉬었음에도 성욕이 끓어오르는 상태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파...’
엉덩이엔 이미 새파란 멍이 든 상태.
그럼에도 지혁이 자신을 거칠게 다뤄줄 때마다 아랫도리가 젖어왔었다.
상상을 해도 마찬가지, 절로 자신의 음부를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자신을 보며 어디 아프냐고 물어왔었다.
버럭 성을 내며 그날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게 못내 죄송스러웠던 유리아였다.
‘지혁 씨... 후아앙...’
오늘은 승현과의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지혁의 얼굴을 생각하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자위라도 하고 싶었다.
약속을 취소할까? 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하지만 승현은 아론의 환생.
더군다나 약속시간은 이미 다가와 있는 시점이었다.
곤란해 하던 유리아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생각했다.
승현의 얼굴만 보고, 오늘은 아프니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하는 거다.
그리 다짐한 유리아는 시노페가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유리아 씨! 오셨어요?”
커피를 들고 자신을 반기는 승현의 모습이 보인다.
유리아는 들끓는 성욕을 어떻게든 밀어 넣고 승현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승현 씨.”
“목마르죠? 이거 받으세요.”
“가, 감사해요...”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빨간데?”
“아, 아니에요... 감사히 마실게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린 승현은 커피를 쪽 빨아 마시는 유리아의 전신을 살폈다.
흰색 매듭 티셔츠를 묶어 비대칭 크롭티처럼 만들었고, 밑단이 헐렁한 밝은 데님 핫팬츠를 입었다.
팬츠의 찢어진 부분에서 그녀의 탄력적인 허벅지가 얼핏얼핏 보이는데다 잘록한 허리라인이 드러나서 눈을 제대로 둘 수가 없었다.
붉은색 주얼 귀걸이를 착용한 얼굴을 보자니 너무나도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남자들을 꼬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자신에게 들이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승현이었다.
기분은 당연히 좋았다.
세화와 헤어져 슬픈 와중인데, 진심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매일 안부를 물어줬으니까.
자신의 검지로 볼을 긁은 승현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 오늘 저녁은 어디서 드실래요? 연락 드렸던 대로 피자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게...”
“예?”
“오늘은... 그...”
곤란한 표정의 유리아.
승현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했다.
“다음에 만날까요?”
저 친절한 말에 유리아의 마음이 다잡혔다.
그래, 승현은 아론의 환생. 그와 약속을 했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음... 아뇨. 그냥 피자 먹으러 가요.”
“전 다음도 정말 괜찮은데...”
“그냥 가자니까요?”
“아, 예... 그럼 가실까요?”
“네.”
머리를 긁적인 승현은 유리아와 함께 피자집으로 향했다.
인파가 많은 한대거리를 걷던 두 사람.
유리아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저... 승현 씨.”
“예?”
“혹시... 환생을 믿어요?”
“환생이요?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환생?”
“맞아요.”
“으음...”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유리아가 만족해할까?
갑자기 환생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 이쪽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승현은 정말 깊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답은...
“예,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불멸할 거라 믿어요.”
였다.
유리아의 안색이 제법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본 승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자신의 대답이 아주 옳았다고 확신했다.
“승현 씨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글쎄요. 아마 좋은 사람이었겠죠.”
“왜요?”
이세화라는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헤어졌지만 유리아라는 여자와 썸을 탄다.
지구를 구한 영웅. 만약 자신의 전생이 있다면 그 정도 급은 되었을 거라고 승현은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합니다.”
승현은 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겸손한 대답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이번 대답도 만족스러웠다는 의미.
내심 뿌듯해한 승현이 물었다.
“이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에요?”
“음... 아니에요. 그냥 이런 쪽으로 흥미가 있어서...”
“그래요?”
홀 테이블이 별로 없는 피자집에 도착한 승현은, 유리아가 이런 곳을 좋아할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세화와는 돈이 없어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해도 서로 즐거워했는데... 유리아는 딱 봐도 부잣집 규수였다.
만약 유리아와 계속 만난다면 돈 좀 깨질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승현이 자리에 앉았다.
유리아는 엉덩이의 멍 때문에 걱정이 들었지만, 태연하게 승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애써 고통을 감내한 유리아가 메뉴판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긴 뭐가 맛있어요?”
“음... 좋아하시는 피자 있으세요? 불고기피자 같은 건... 한국적이어서 싫어하실까요?”
유리아가 눈을 새침하게 떴다.
“편견 같은 건 갖지 말아주실래요? 저 한국음식 잘 먹어요.”
“아, 죄송합니다.”
“알아서 골라주세요.”
쩔쩔매던 승현은 메뉴판에 얼굴을 묻으면서 유리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새침데기 같은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승현은 종업원을 불러 피자를 주문했다.
그렇게 둘은 음식이 만들어지는 동안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기사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또 뜬금없는 질문. 승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기사도요?”
“네.”
‘미치겠네...’
승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삼켰다.
갑자기 이런 모호한 질문을 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점수는 따야겠고, 기사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런 승현을 바라보던 유리아가 피식하며 힌트를 하나 던져주었다.
“만약 승현 씨가 기사인데, 동료기사가 전장에서 겁을 먹고 후퇴하려고 하면 무슨 기분이 들 것 같아요?”
“흐음... 중세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명예가 실추되는 건 자명한 일이고, 어쩌면 독전대에게 칼침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제 옆에 두고 함께할 겁니다.”
“그래요...? 만약 전황이 크게 불리하다면요?”
“기사인 제가 전장에 나갔다는 건, 왕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잖아요. 옛 한반도엔 신라라는 국가가 있었는데, 거기 세속오계라는 규율이 있어요. 그 중 사군이충, 임전무퇴라는 게 있죠. 사군이충은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긴다, 그리고 임전무퇴는 싸움에 임할 땐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규율은 기사도완 다르겠지만... 비슷하다고 가정해보면 물러나진 않을 것 같네요.”
“임금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을 따르기 위해 죽음마저 각오하시겠다고요?”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유리아의 표정이 매우 화사해졌다.
승현은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보고 눈치챘다.
유리아는 규범을 잘 따르는 정의로운 사람을 좋아한다고.
이건 자신의 장점 아니던가? 지금까지 법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왠지 느낌이 좋았기에, 승현도 그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피자가 나왔다.
두 사람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피자를 먹었고, 대화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승현은 이어지는 유리아의 질문 속에서 80 ~ 100점짜리 대답을 내놓으며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나갔고 말이다.
식사 후, 계산을 마치고 피자집을 나온 승현이 손사래를 쳤다.
뒤따라 나온 유리아가 돈을 꺼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는데?”
“필요 있어요. 오늘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간만에 즐거운 자리여서 꼭 제가 사고 싶어요.”
그 말에 유리아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승현의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
“저도... 저도 엄청 즐거워서요. 그냥 받아주셨으면 해요.”
유리아의 칭찬에 승현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그럼... 서로 즐거웠으니까 더치페이 하는 걸로 할까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내일 또 식사하실래요...?”
유리아의 애프터 신청.
승현이 숨을 훅 삼켰다.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그럼... 내일 뵈어요.”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생각할 게 조금 많아서...”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네... 오늘 재밌었어요.”
서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두 사람은 반대방향으로 찢어졌다.
유리아는 플라잉 택시 정거장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오늘 승현과의 만남은 대단히 유익했다고.
그에게서 규율을 따르고 약자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기사의 모습을 봤다.
그녀는 승현이 조만간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르겠다고 기대를 품었다.
우웅!
그때, 유리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지혁의 간결한 명령이 와있었다.
[지금 의정부로.]
승현과 피자를 먹으면서 지혁이 생각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혁의 톡을 본 직후 다시금 아랫도리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의 명령을 따르는 일에 희열을 느꼈고,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좋았다.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사람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혁은 승현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안하무인하고, 오만불손한.
원래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성격의 남자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싶은 사람.
유리아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1시간 안에 갈게요♥]
[30분.]
[네♥]
30분 안에 의정부로 가려면 지금 플라잉 택시를 타야 한다.
유리아는 자신의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술에 거하게 취한 중년인의 앞으로 은근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중년인이 성을 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내가 먼저 줄 서있었잖아!”
“내가 먼저 서있었는데요?”
“으엉...? 그랬어?”
“네. 신고하기 전에 저리 가세요.”
“으음... 이상하다... 내가 먼저 서있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하며 휘청거리는 중년인.
유리아는 만약 저놈이 박박 우겨댄다면, 주먹을 조금 써서라도 얌전하게 시키리라 다짐했다.
“흐음... 미안해... 내가 착각했나보네. 뒷줄에 서지 뭐.”
“네.”
다행히 중년인은 이상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뒷줄에 섰다.
예전이었다면 폭력을 쓴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까 승현에게 말했던 기사도와는 상충되는 행동.
그러나 유리아는 이런 비도덕적인 일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혁의 명령이 최우선 순위에 자리매김 되어있었고, 악의가 주입되면서 행동도 그와 비슷하게 맞춰지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유리아가 가장 증오하는 타이라트와 닮아있었다.
지혁 또한 타이라트와 아주 비슷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고.
하지만 유리아는 지혁의 지속적인 악의 주입과 조교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면에 변화가 생겼다.
포악한 우두머리에게 굴복하는 건 당연하다고, 약자는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유리아 자신은 지혁의 앞에선 약자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앞에선 강자다.
따르지 않을 경우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알지 못했던 유리아는 택시가 내려오자 밝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목적지를 입력한 유리아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은 또 어떤 식으로 자신을 지배하려고 할까?
유리아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거리는 마음. 지혁을 위해서라면 어떤 플레이든 할 수 있다.
어쩌면... 어쩌면 그에게 모든 걸 바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하복부의 쑤심이 강해졌다.
큥큥 하면서 찌르는 듯 한 느낌.
“후으...♡”
나른한 신음소리를 내뱉은 유리아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나타난 거뭇한 기운이 하복부로 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승현과의 즐거웠던 식사자리는 기억 저편 구석으로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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