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교육 #2
나는 박사와 연구실에서 유리아를 위한 활을 제작 중이었다.
아니, 거의 다 만들어졌는데 박사가 도움을 요청해 컨설턴트를 하러 왔다고 해야 옳았다.
“활시위만 만들면 되는데... 이건 뭘로 하지?”
곤란한 표정의 박사.
내가 회사에서 끌어와 다달이 내어주는 돈이 떨어진 모양이다.
하긴, 좋은 활을 만들기 위해 비싼 재료를 투입해야 했으니 모두 소진할 만도 하지.
“폴리머스로 해야죠.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물질인데. 박사님이 이걸 생각하지 못할 리는 없고... 혹시 돈이 다 떨어졌나요?”
“그...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한 번 더 끌어올게요.”
“아냐, 다음 달로 미뤄도 돼.”
“빨리 만들어줘야죠. 마물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유리아 씨를 맨몸으로 나서게 하려고요?”
“.... 맞는 말이야. 고마워, 쏭.”
난 방긋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밖으로 나가 마르셀라에게 자금을 적당히 빼라고 연락한 나는, 다시 돌아와 박사에게 말했다.
“내일 중으로 입금될 거에요.”
“고맙다. 진심이야.”
“됐어요. 우리사이에 무슨... 일하느라 힘들죠?”
은근슬쩍 특별한 사이인 것처럼 말을 하고,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드렸다.
박사는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식하지 못하면서 거북해하고는 있었다.
사별한 남편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해있고,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기에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힘들지는 않아. 요새 세화는 어때?”
박사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낸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늘 똑같죠. 맨날 투정만 부립니다.”
“진짜 의지할 만한 사람이 생기니까 그러는 거겠지. 나도 남편한테 자주 그랬었어.”
“남편 분이 박사님에게 의지하지 않고요? 의왼데... 박사님의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글쎄... 어떤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좀 튀는 구석이 많아서... 그래도 의젓한 사람이었지.”
박사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남편을 생각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다.
“살아있었다면 너와 잘 맞았을 텐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쉽네.”
“아이는... 없으셨어요?”
“내가 난임이어서 없었어. 노력했지만 생기지 않았지. 근데 쏭, 유리아가 만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혹시 알아?”
그거 난데.
“저도 잘 몰라요. 왜요?”
“아니... 만약 유리아가 상대를 가볍게 만나는 거라면, 헤어졌을 때 디바이스 충전을 하기 힘들어지잖아.”
괜한 걱정을 하는구만. 내가 타락시키고 영원히 곁에 둘 건데.
“직접 한 번 말씀해보세요.”
“아직 사적인 부분을 건드릴 만큼 유리아와 친해지지는 않았으니까... 잡담은 이쯤하고 일이나 할까?”
“일이요? 활시위는 폴리머스를 구해야 만들 수 있을 테고... 나머지 장비나 소모품은 다 준비만전이고... 전투기나 수송기, 구조선 점검까지 다 끝내놨는데 무슨 일이요? 연구실 청소라도 할까요?”
그 말에 박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의 이마를 툭툭 때렸다.
“기계가 손에 없으면 뭔가 불안해서... 내가 미쳤지.”
“그거 일 중독입니다. 푹 쉬어야 해요. 같이 돌아가죠.”
“난 됐어. 집에 가봐야 혼자고...”
“일어나요. 저랑 술이라도 한 잔 하게.”
“술?”
“할 일도 없는데 여기서 뭐하시려고? 돈이 입금되려면 멀었고, 오늘은 저도 시간이 남으니까... 스트레스나 풀죠. 어때요?”
박사가 으음... 하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탐탁치 않는 눈빛. 하지만 내가 도움을 준 일들도 있으니 고민이 깊은 듯했다.
“나중에... 나중에 하자. 오늘은 기분이 좀 그러네.”
“그래요?”
“네가 껄끄러운 건 절대 아냐. 오늘 술을 마신다면 남편 생각이 날 것 같아서 그래. 대신 조만간 꼭 마시자. 약속할게.”
흠... 남편을 언급한 건 실책이었나.
그래, 이런 시행착오도 있어야 하는 거지.
고집부리지 말고 물러나자.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돌아가 볼게요. 폴리머스를 구하시면 연락주세요.”
“알았어. 고마워.”
**
다음 날 저녁, 난 한대거리에서 유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찍이서 양손에 커피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그녀가 보인다.
오늘의 패션은... 탐스런 다리가 드러나는 핫팬츠 차림이로군.
거기에 속이 살짝 비치는 흰색 셔츠까지... 야해졌구나, 야해졌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내게 달려온 유리아가 헉헉거렸다.
힘들지도 않으면서 그런 척하긴.
“죄송해요... 늦었죠?”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아... 시간을 착각해버려서요... 커피를 사고 나서야 눈치챘어요.”
방금 잠깐 유승현을 만나고 온 주제에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그래, 계속해라.
나중에 유승현과 네 관계가 크게 발전하면, 그놈과 같이 있는 널 발견해주지.
“커피나 가져와.”
“네에... 여기요.”
당연한 듯 유리아의 커피를 받은 나는 빨대 끄트머리 부분에 입을 대고 쪽 빨았다.
“용서해주세요...”
태연하게 커피를 빨고 있는 내게 속눈썹을 내리깔며 사과한 유리아.
난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1분만 더 늦었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봐줄게.”
“고마워요... 일단 좀 걸으면 안 될까요?”
“방금까지 뛰어왔잖아. 숨이나 돌려.”
“.... 네...”
유리아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거리 전체를 살핀다.
혹시라도 퇴근하고 있는 유승현이 널 볼까봐 무섭냐?
걱정하지 마. 걔 지금 자취방에 도착했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정말 웃겼다.
잠시 그러고 있던 유리아가 자신의 손으로 허벅지를 툭툭 때리면서 묻는다.
“그... 지혁 씨, 오늘은 어디 가실 거에요? 저 모레까지 집에 안 들어가도 돼요.”
하자고 들이대네.
저번 일이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다.
“김태곤 씨는? 걱정하시지 않아?”
“괜찮아요.”
“아, 김태곤 씨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너...”
뒷말을 흐리자 유리아가 불안한 듯 입술을 핥았다.
“뭔데요...?”
“아니다. 차에 타. 가서 말할게.”
“아, 네...”
내가 유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의정부에 있는 자그마한 단독주택이었다.
주변 경치가 예쁘고 사람들도 별로 없어 산책하기 좋은 주택단지.
은퇴한 사업가가 살 만한, 그런 아담한 곳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은 나는 유리아에게 내리라고 했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나는 차키를 소파 위에 휙 던져놓았다.
“여긴 어디에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저리 물어오는 유리아의 목소리는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여길 무슨 용도로 사용할 건지 예상한 것 같다.
“앞으로 여기서 만나자.”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유리아가 묻는다.
“그... 사신 거에요...?”
“맞아. 한참 전에 사놨는데, 너랑 여행가기 전에 생각했지. 여길 우리 집으로 쓰면 괜찮을 것 같다고.”
대놓고 널 노려왔다 말을 했음에도 유리아는 격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주뼛거리기만 할뿐.
“.....”
“불만이라도 있어?”
“아, 아뇨... 그럴 리가요... 흐아... 자, 잠깐만요...!”
내가 성큼 다가오자 뒷걸음질을 치는 유리아.
긴장을 한 것처럼 보여도 눈빛엔 기대감이 서려있다.
슬슬 놀라게 해줄 예정인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어제 김태곤 씨를 만났거든?”
“왜요...?”
“왜긴. 사업 이야기 때문이지. 근데 김태곤 씨가 그러시더라? 딸내미랑 싸웠다고.”
“.....”
“왜 싸웠어? 낚시 때문이야?”
입술을 잔뜩 오므린 유리아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 정색한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연다.
“네... 지혁 씨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아빠가 못 가게 해서... 화났어요.”
“너 애잖아? 어른 말 안 들을 거야?”
“하, 하지만 저번에 지혁 씨가... 지혁 씨 말만 들어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오랜 시간 끝에 겨우 만난, 피가 섞인 아버지 말은 안 듣겠다?”
“그건 아니에요...”
“버릇이 없네?”
“아니라고 했잖... 흡!”
유리아가 숨을 훅 삼켰다.
손을 뻗은 내가 그녀의 턱을 확 잡았기 때문.
유리아의 눈이 금세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 심지어 불도 제대로 켜지 않아 어둡다.
투숙객들이 있는 호텔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겼기에 유리아가 바들바들 떨었다.
“잘했어.”
“....?”
의문이 섞여가는 유리아의 눈동자.
버릇이 없다고 말하며 벌을 줄 것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칭찬을 하니 혼란스러운 듯했다.
“자, 잘했다구요...?”
“그래. 잘했어.”
“.....”
“앞으로도 그럴 거지?”
“후으으...”
툭!
호텔에서처럼 뺨을 툭 치니 유리아가 햐악!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버지... 말도 잘 들어야 돼요...”
“아버지 말? 물론 잘 들어야지. 그냥 내 말을 더 우선시하기만 하면 돼.”
“.....”
툭!
“그럴 거지?”
“흐윽...!”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간 유리아.
너그러운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방금도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 말만 들어야 된다고.”
“그... 그건...”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려고? 못할 걸?
침을 꼴깍 삼킨 유리아가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그럼 내 말을 최우선 순위로 둘 거지?”
“그럴... 거에요...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네 입으로 직접 말해볼까? 맹세해봐.”
“전...”
머뭇거리는 그녀.
하지만 내 얼굴이 서서히 악하게 변하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냉큼 말한다.
“저... 유리아 엘레나르는... 아버지 말씀보다... 지혁 씨의 말씀을 우선할 것임을 맹세해요...”
짜릿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은하계 너머에서 환생한 아비마저 내 아래로 깔리는 순간.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다.
물론 막상 이지선다의 상황이 닥치면 냅다 내 말을 따르진 않겠지.
유리아는 혈육을 냉정하게 버릴 정도까지 타락한 상태가 아니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맹세를 하도록 만든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유리아의 심리는 서서히 바뀌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지금은 두려움에 의해 강제로 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녀는 이 맹세를 마음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섭 성향이 상당해지고 타락이 유의미하게 진행되었을 즈음엔 내 상을 받기 위해 진심으로 맹세할 테지. 그거면 됐다.
“잘했어.”
“후으으...”
유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김태곤에게 미안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예쁜 짓 했으니까 상을 줘야겠네?”
“감... 사해요...”
“어려운 일을 한 만큼, 오늘은 특별한 상을 줘볼까 해.”
“특별한... 상...?”
난 유리아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불을 켰고, 옷장 문을 연 다음 그 안의 내용물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훌쩍거리면서 옷장 안을 살피던 유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옷장엔 여러 SM 도구들이 있었다.
개목걸이부터 시작해서 밴디지, 패들, 니플 체인, 핑거링용 콘돔, 귀갑묶기용 밧줄, 전기가 통하는 채찍, 심지어는 팬티처럼 입고 그 안에 로터를 넣는 로터 홀더까지.
시중에 존재하는 모든 BDSM용품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 보고 기억하고 있다가 유승현한테 써먹으려무나.
“지... 지혁 씨...”
수치스러운 듯 몸을 벌벌 떠는 유리아를 지나쳐 방울이 달린 개목걸이를 꺼낸 난, 그걸 유리아의 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가까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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