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88화 (88/471)

EP.88 교육

서울로 돌아가는 길엔 비가 내렸다.

다소 굵은 빗방울이 차 앞유리에 닿아 후두둑! 하는 소리를 냈다.

우중충한 하늘을 보니 내 밝은 앞날을 축복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유리아는 조수석에서 곤히 잠든 상태였다.

어제 하루 종일 악의를 주입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근데 억울하네? 넌 가만히 있었잖아.

몸을 움직인 건 나라고.

“우응... 지혀... 아파앙...”

몸을 옆으로 뉘며 잠꼬대를 하니 웃기기도 하고 예뻤다.

저 입에서 아론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이 튀어나오니 기쁘기도 했고.

묵묵히 운전을 하던 나는 자동운행으로 시스템을 돌려놓고 등받이를 내렸다.

그리곤 생각에 잠겼다.

박사는 유리아의 활을 거의 다 만들었다고 했다.

활이 완성되면 슬슬 마물을 내보내볼까 하는데... 어떤 마물을 내지?

아스타로트처럼 A등급? 아니면 곧바로 S등급을 보내 세화와 유리아, 두 명이서 싸우도록 해볼까?

아니, 아이테르가 실종된 지금은 고등급 마물을 내놓기엔 조금 아까울지도 모른다.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D등급 이하 마물들을 물량으로 쏟아내자.

간간히 C등급도 섞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리아가 잠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 그녀가 흠칫 놀라고,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돌린다.

피식한 내가 물었다.

“일어났어?”

“네...”

“배는 안 고프고?”

“조금... 고파요...”

“휴게소 들려서 뭐라도 먹고 갈래?”

“그래도 돼요?”

이 정도까지 날 따르란 얘기는 아니었어 이년아.

일상적인 부분에선 적극적으로 의견을 어필하란 말이야.

나중엔 ‘쉬해도 돼요?’ 라고 물어보겠네. 아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물론이지.”

난 목적지를 가까운 휴게소로 변경하고 다시 누웠다.

“배는 어때?”

“아파요...”

“많이?”

“.....”

눈알을 데굴 굴리면서 날 쳐다보는 그녀.

아픈데 말을 못하는 것 같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많이... 아파요...”

그럴 만도 하다.

대물을 열 번 이상 받았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손을 뻗어 유리아의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세화에게 해주던 건데, 너한테도 특별히 해준다.

내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유리아가 긴 콧바람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어때? 괜찮아져?”

“네에... 기분 조아요...”

남들 앞에선 도도한 모습을 보여주고, 내 앞에선 이렇게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아양을 떠는 게 뿌듯하다.

유리아는 내게로 완전히 몸을 돌리고 힘을 뺐다.

그렇게 그녀의 아랫배를 마사지해주고 있는데, 세화에게 전화가 왔다.

타이밍 한 번 끝내주는구나.

난 전화를 받으며 일부러 소리를 크게 키웠다.

유리아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주... 지혁아! 나야.

허, 또 이러네.

-어디야? 일 끝났어?

“끝났어. 인천에서 돌아가는 중이야.”

-빨리 와. 보고 싶어.

“알았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전화를 끊은 난 휴대폰을 가운데 컵 홀더에 던져놓고 룸미러로 유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명백한 질투의 시선을 휴대폰에 보내고 있었다.

“.... 지금... 랑... 있어...”

유리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지금은 나랑 있어.’

분명히 저렇게 말했다.

그걸로 위안을 삼으려는 모양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보자니 조만간 캣파이트라도 할 지경인데? 재밌겠다.

“저... 지혁 씨.”

“왜.”

“뽀뽀해주시면 안 돼요?”

용기 한 번 제대로 냈군.

“왜 이렇게 주제넘어?”

“.....”

시무룩해진 유리아.

그녀의 입이 오므려지는 순간, 나는 얼굴을 가져가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었다.

그러자 유리아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몸을 배배 꼰다.

“감사해요...”

“어제 고생했으니까.”

그러니 특별상을 주는 거다.

더 받고 싶으면 날 만족시켜.

이런 뉘앙스를 풀풀 풍기니, 유리아의 눈빛에 결의가 맺혔다.

“박사나 세화 앞에선 평상시대로 해.”

“네...”

지금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지만 유리아는 잘 해낼 것이다.

왜? 내가 친히 내리는 상을 받고 싶으니까.

차는 곧 휴게소에 도착했다.

자동운행이 주차까지 알아서 해주자 나는 곧장 문을 열었고, 차에서 내리고 있는 유리아를 향해 오른팔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유리아가 해맑은 얼굴로 후다닥 달려와 내게 팔짱을 껴온다.

인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 내가 물었다.

“뭐 먹을래?”

“둘러봐도 돼요? 메뉴부터 보고 싶어요.”

“그렇게 해.”

**

자... 이제부터 난 피곤에 찌든 사업가다.

김태곤으로 변장한 상태에서 자기최면을 건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삐빅-!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유리아가 편한 복장을 한 채로 거실에 여러 악세서리를 늘어놓고 신중하게 보고 있었다.

귀걸이부터 시작해서 팔찌, 발찌, 목걸이, 반지 등등...

귀걸이는 몰라도 남은 것들은 원래의 유리아였다면 차지도 않았을 치장품이었다.

“오셨어요?”

아비가 왔는데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는 유리아.

슬프다. 딸내미의 환영도 받지 못하다니.

뒷바라지를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버르장머리 없는 년.

“뭘 하고 있니? 아빠 얼굴은 안 보냐?”

“그냥... 장식품이요. 조금만 이따가 밥 차려드릴게요. 아, 맞다. 아빠.”

유리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나보다.

“응?”

“언제 지혁 씨랑 낚시 가신다며요. 저도 갈래요. 혼자 심심해.”

허, 그럼 마르셀라가 변장을 해야 하는데, 걔는 지금 바쁘단다.

“남자끼리 우정을 다지는 자리인데 네가 껴서 뭐하려고? 안 된다.”

“아! 아빠!”

빼액 소리를 지르다니.

중년인 심장 떨어지겠다.

깜짝 놀란 연기를 한 나는 헛웃음을 켰다.

“깜짝이야... 낮술이라도 한 거냐?”

“아니요! 그냥 가고 싶다니까요? 혼자 집에 있는 거 엄청 심심했다고요!”

“안 된다니까? 친구들이라도 만나던지 해라. 그 왜 연구실 동료 있잖니. 이세화 씨.”

“싫어요.”

갑작스레 정색을 하는 유리아.

속으로 끅끅 쪼갠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냥요... 어쨌든 저도 갈 거에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양말을 툭툭 털고 세탁기에 대충 던져놓았다.

그러자 유리아가 성을 낸다.

“흰색 빨 거에요! 검은색은 바구니에 넣어요!”

“.... 거 참... 대체 요 이틀 사이에 뭔 일이 있었길래 애가 히스테릭해져가지고는...”

“아 빨리요!”

“알았다. 알았어.”

투덜거린 나는 양말을 손가락으로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냅다 안방으로 달려갔다.

누가 봐도 바가지를 긁히기 싫어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소 주책맞은 모습이었다.

유리아가 어이없어할 만큼.

안방 화장실에서 목욕을 하고 나온 나는, 유리아가 방 문틀에 기대고 좀비처럼 멍하니 있자 상당히 놀랐다.

비명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떤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거기서 뭐하는 거냐?”

“아빠아... 저도 낚시 갈래요...”

“글쎄 안 된대도.”

“왜요...”

“네가 있으면 지혁 씨가 어색해서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직 날짜도 잡지 않았다. 낚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상태야.”

“그럼 아예 가지 마세요.”

“허...”

나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글렌이 화가 날 때 보여주는 특유의 행동.

유리아가 찔끔한다.

“.... 죄송해요...”

“이유라도 들어보자꾸나. 대체 왜 네가 하지도 못하는 낚시를 가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거냐? 심심하다고 핑계를 댈 생각은 마라. 거짓말임을 아니까.”

“그게... 사실은요...”

사실 뭐? 나랑 자서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기라도 하게?

우물쭈물해하던 유리아가 말을 잇는다.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지혁 씨가 좋은 분 같다고. 아빠가 출장 가신 동안 연구실에 자주 갔었는데... 확실히 좋은 분이더라고요... 생각도 어른스럽고... 그래서... 더 만나 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니.

너도 많이 발전했다.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말했다.

“음... 그랬구나.”

“네...”

“아론은 어떻게 하려고?”

“아론도 만날 거에요...”

“두 사람을 재보다가 결정하려는 게냐? 그리고 송지혁 씨에겐 이세화라는 여자친구도 있잖니.”

“그럼 왜 저한테 지혁 씨가 좋은 분이라고 말씀하신 건데요!?”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언성을 높이며 공격적으로 바뀌는 유리아를 보니 내 악의가 아주 잘 섞여가고 있다는 확신이 선다.

“그냥 아쉽다는 뜻에서 말했던 거다.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더냐?”

“.... 씨이...”

“뭐? 씨이? 네가 널 잘못 키웠구나! 어린아이와도 같은 행동을 하다니! 당장 방으로 들어가서 근신하도록 해라!”

“여기가 왕국인줄 아세요!?”

“얼른 들어가지 못할까!?”

침까지 튀겨가며 버럭 소리를 지른 나.

유리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날 노려보다가, 쿵쿵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콰앙!

문까지 세게 닫는 것을 보니 삐쳐도 단단히 삐쳤다.

이거 어디 한 군데 고장 났겠는데? 고치려면 사람 불러야겠네.

유리아의 방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내가 소리쳤다.

“유리아 엘레나르! 지금 반항하는 게냐!?”

“아!! 바람 때문에 그런 거라구요!”

“흡...”

웃음이 튀어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아... 의젓한 유리아가 왜 이렇게 꼬맹이처럼 변해버렸는지.

안타깝도다, 안타까워.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잘했어.

“다시 나와라!”

“싫어요! 잘 거에요! 문 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잠갔으니까!”

“저... 저...”

혀를 끌끌 찬 나는 방에 들어와 편안하게 누웠다.

송지혁과 김태곤이 나인 이상, 유리아는 언제나 내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 부녀다툼 건으로 유리아를 더 가지고 놀 수 있게 됐다.

문을 잠그고 송지혁의 휴대폰을 드니, 그녀의 톡이 와있었다.

[지혁 씨. 주무세요?]

[아니. 왜?]

[아빠가 조만간 지혁 씨한테 낚시를 가자고 할 거래요. 혹시 낚시할 줄 아세요?]

[모르지만 재미있겠네. 항상 해보고 싶었거든.]

[그때 저도 데려가주시면 안 돼요?]

얘 봐라? 이런 식으로 접근하시겠다?

요망한 기집애. 버릇을 고쳐놔야겠구먼!

내 당장 시종장을 불러... 아, 걔는 뒈졌구나.

[상황 봐서.]

[ㅠㅠ]

[사진이나 보내봐.]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수의 사진이 톡방으로 전송되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혀를 쭉 내민 사진, 잠옷 윗부분을 들추고 가슴골을 드러낸 사진, 뽀뽀를 하듯 입을 오므린 사진, 허벅지를 드러내고 다리를 굽힌 사진...

[그만 보내. 세화 왔어.]

[넹♥]

넹? 이런 귀여운 녀석을 봤나.

히죽 웃은 나는 휴대폰을 숨겨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슬슬 다음 시즌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세 개의 아이테르가 없어져서 막간이 길어졌다.

그냥 로제도 공략을 시작할까?

아니, 유리아에게 집중하면서 박사도 살살 꼬셔놓자.

아이테르의 흔적을 발견할 때까지는 얌전히... 최대한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게 맞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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