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84화 (84/471)

EP.84 1박 2일 #2

꿀꺽.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의 목덜미에 있는 키스마크를 보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할리우드 배우의 뺨따구를 올려치고도 남을 유리아의 얼굴도 한몫했다.

남자도 잘생겼다, 배우 커플, 신혼부부, 같은 말들이 들린다.

유리아도 그런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뷔페에서 음식을 푸다 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입가엔 희미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커플, 부부라는 단어들이 듣기 좋은 모양.

난 태연하게 음식을 푸고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뒤, 음료까지 챙긴 유리아가 내 앞에 앉았다.

‘세화와 함께 강화도에서 뷔페를 먹었을 때와 비슷하군.’

여긴 강화도가 아니지만 인천은 맞다.

노린 건 아닌데 공교롭게도 상황이 비슷하다.

예전 일이 생각나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으니, 유리아가 묻는다.

“지혁 씨, 음료수는 안 드세요?”

“알아서 가지고 와요.”

“아, 네. 잠시만요.”

유리아가 얼른 일어나더니 음료 코너로 갔다.

그리고는 깊은 고민 끝에 석류 주스를 받는다.

그녀는 행여나 주스가 넘칠세라 천천히 걸어와서 컵을 내 접시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마치 상전을 모시는 것 같은 모습에 주변 남자들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뭘 봐? 꼬우면 마왕하라니까?

“맛있게 드세요.”

내가 방긋 웃으며 그리 말하자, 유리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쑥스러움을 표시한다.

“네에...”

포크로 새우를 집어 입에 천천히 가져가는 그녀.

조신한 숙녀마냥 우물우물 거리는 모습을 보니 속으로 피식 웃게 된다.

유리아가 내숭을 떨고 있기 때문.

김태곤 앞에선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아빠는 참 슬퍼요.

“지혁 씨, 안 드세요...?”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동안 새우를 씹어 삼킨 유리아의 질문이었다.

“지금 내숭 떨고 있죠?”

대놓고 물으니 유리아의 얼굴이 홍시처럼 변한다.

“아, 아닌데요...?”

“정말 아니에요?”

“.....”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볼만하다.

원래라면 실례되는 말임이 분명함에도, 나에게 따지려거나 실망한 기색이 전혀 없다.

자존감이 높은 유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여줄 줄이야.

첫 단추를 잘 꿰어도 너무 잘 꿴 것 같았다.

“농담이에요. 식사하세요.”

“네...”

곤란한 질문이 넘어가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유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내 말을 의식한 건지 애써 털털한 척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난 이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묵묵히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금세 비워진 접시, 유리아가 고기를 먹으려다 말고 묻는다.

“벌써 다 드셨어요? 제가 퍼올까요?”

기특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특별히 내가 퍼와주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 코너로 갔다.

음식을 전부 풀 때까지, 유리아는 하라는 식사를 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네 소녀.

두 번째 접시를 내려놓은 난, 자리에 앉지 않고 샐러드 코너로 갔다.

거기서 정성을 다해 샐러드를 만들고 유리아의 옆에 내려놓았다.

“음식 다 먹고 드세요.”

“아...”

유리아가 짧은 탄성을 터뜨리더니 감격에 겨워한다.

샐러드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감사해요...”

“세화한테도 안 하던 일인데...”

지나가는 말투로 그리 중얼거리자 유리아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며 기뻐한다.

거봐, 착한 짓하면 상 준다니까?

그러니까 말 잘 들으라고.

@@

그날 밤, 지혁과 호텔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 유리아는 스위트룸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네, 아뇨. 장식을 보호구로 바꾸는 거에요. 다리 전체를 감쌀 수 있도록이요. 네, 그렇게 하시면 돼요. 먼저…….”

침실에 있던 지혁과 캐시 박사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던 유리아가 의자에 뒤통수를 기대고 흔들어대며 생각에 잠겼다.

‘통화내용은... 슈트 개조에 관한 내용인가보네.’

지혁의 목소리가 커서인지 통화내용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 캐시 박사는 지혁에게 슈트에 관한 정보와 팁을 듣고 있었다.

디바이스 개발자이자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제니퍼 캐시 박사마저도 지혁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견을 경청할 정도라?

연구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확실하다.

아스타로트와의 결전에서도 그렇고... 캐시 박사보다 훨씬 어리지만 임기응변과 상황판단이 대단하다.

박사는 지혁보고 조수라 칭하지만, 지금 보니 그녀의 보폭을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아니, 지혁이 박사의 보폭을 맞춰주는 걸지도 모른다.

유리아는 그렇게 지혁의 우선순위를 올렸다.

송지혁,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처음엔 아론의 습관을 여러 번 보여줘서 관심이 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송지혁이라는 사람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머리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아론...’

문제는 아론의 환생인 승현이다.

승현과 식사를 하기 전에도 생각했듯, 아론은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각도 여러 이유로 인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백마를 타고 왕국 옆에 있는 크고 넓은 능선을 산책했던 일이나, 그와 민심을 확인해본다며 변장하고 왕도를 시찰했던 일,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추억이 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던 상대.

하지만 아론은 그 추억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동료인 세화와 사귀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오랜 시간동안.

자신은 아론을 잊지 못해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괘씸해...’

물론 지혁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린 자신도 동등하게 괘씸하다.

아니, 자신이 더 나쁘다.

모든 기억이 있는 상태에서 지혁과 만나고 있으니까.

유리아는 혼란스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눈을 감고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다.

아버지는 김태곤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론이 환생할 경우, 그 또한 아버지처럼 승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터.

만약... 만약 승현이 세화와 잘 사귀고 있던 와중에 기억이 모두 되살아났다고 한다면, 그는 과연 자신을 선택할까?

소꿉친구였던 세화를 포기할 수 있을까?

지금 헤어진 것도 세화가 지혁에게 마음을 빼앗겨서였지, 승현이 먼저 세화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저번 식사 때 대화를 나눠보니 미련도 아직 한참 남아있었고.

그런 외골수인데... 정말 세화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올까?

아무리 전생의 연인이었다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눈을 슬쩍 뜨니 침실을 서성거리며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지혁이 보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서서히 움직였다.

왕녀인 자신에게, 그리고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자신을 휘두르는 강압적인 면에 무척 끌렸고, 동시에 선망까지 했다.

따라하고 싶다고 말이다.

저렇게 사람을 휘두르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속에 피어났다.

물론 지혁에겐 아니다.

그는 이런 쪽으론 범접할 수 없는 사람,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다.

대든다면 여태껏 발전한 관계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

그러긴 싫었으니 지혁에겐 순종해야한다.

‘세화는... 지혁 씨의 저런 면을 모르겠지?’

딱 보니 세화에겐 많이 져주는 것 같았다.

그럼 지혁의 비밀은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일까?

지금 그가 보여주는 성격이 더 멋있는데... 흥분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지혁과 딱 붙어있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진다.

유리아는 저번에 연구실에서 지혁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만약 3년 동안 잠들어있었는데, 세화가 지혁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지혁은 이렇게 답했었다.

다시 새로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 접근할 거라고.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사랑’ 이라는 단어에 꽂힌다.

당시 대화의 맥락과는 전혀 관계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도 지혁이 정말 마음에 들어 했고, 오히려 더 아론 같다고 할 정도였다.

“뭐해요?”

두서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 샌가 전화를 마친 지혁이 다가왔다.

깜짝 놀란 유리아가 지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보니 복잡한 생각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가슴속에 봄바람이 분다.

풋풋한 기분. 이 기분을 더 느끼고 싶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요... 어?”

유리아는 지혁의 약지에 반지가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지... 언제 빼셨어요...?”

설마 유리아 자신과 했던 약속 때문에?

그렇다면 정말 감동이다.

“방금요. 오늘 말 잘 들었잖아. 상 줘야죠.”

“아, 그렇죠... 감사해요.”

그렇다. 이건 ‘약속’이 아니라 ‘상’이다.

말을 잘 들었기에 지혁이 특별히 주는 일방적인 상.

주제넘게 약속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부디 지혁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말했다.

“네... 감사해요...”

“감사한 사람 태도가 그래요?”

“네? 아!”

화들짝 놀란 유리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큰맘을 먹고 반지를 빼주셨는데, 예의 없이 앉아서 대충 넘어가듯 말하다니.

실책이다. 감히 그래선 안 되는데...

유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아...”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혁 씨하고... 승현 씨요...”

“유승현 씨? 분명 반지를 빼주면 만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데... 거짓을 말해버렸다.

여기서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텐데... 들키면 지혁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날지도 모른다.

그냥 정말 승현을 만나지 말까? 라고도 생각해보았지만 승현은 아론의 환생.

중요한 사람이니... 들키지 말고 몰래몰래 만나는 거다.

가끔씩만 만나면 괜찮을 거다. 라고 유리아는 생각했다.

“그래요? 정리는 다 끝났고?”

“아, 아직... 이요...”

“힘들면 취소해도 돼요. 마지막 기회를 줄게요.”

유리아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린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기회.

이러면 자신은 당당하게 승현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낸 지혁이 다시 약지에 그걸 끼우려고 하자, 순식간에 질투심이 솟구쳤다.

독점하고 싶다. 남들에게 주기 싫다.

그러한 질시의 감정이 유리아의 전신에 휘몰아쳤다.

“아니요! 전... 지혁 씨가 더 좋아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지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유리아는 저걸 당장 빼앗아 하수구에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깜냥 따윈 없으니까 참아야 했다.

계속 말을 잘 듣는다면 버려준다고 해주실 지도 모른다.

멀뚱멀뚱 가만히 있으니 지혁이 환하게 웃는다.

유리아는 지혁의 저 미소가 너무 멋있다고 느껴졌다.

지금 자신에게 보여주는 미소엔 아론의 느낌은 없었지만... 아론보다 더 괜찮다고 생각이 든다.

입이 귀에 걸린 유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온 지혁이 손을 내밀며 말한다.

“손.”

“네!”

유리아가 곧바로 손을 잡으니, 지혁이 명령한다.

“깍지 껴요.”

유리아는 지혁의 굵직한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자 지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유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아! 큰일 났다! 나도 모르게...’

황급히 힘을 푼 유리아가 사죄한다.

“죄송해요, 지혁 씨...”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할 겁니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힘으로 해결하려고?”

“아니에요! 전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실수다. 너무 좋아서, 긴장이 돼서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버린 거다.

절대 지혁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억울했다.

지혁이 몸을 돌리고는 유리아 자신의 양 볼을 덥석 잡는다.

저 불타오르는 눈빛을 보자니, 유리아는 저분에게 다시금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다시는 안 그럴 거죠?”

“네... 절대... 흐읏!”

다소 거칠게 유리아의 볼을 만지작거리는 지혁.

유리아는 몸을 바르르 떨며 겁을 먹으면서도, 저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자신이 변태인가 깊은 고민을 하면서도, 지혁이 이런 모습을 계속 보여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죄... 송합니다아...”

“뭐가 죄송한데?”

“주제넘게... 힘을 줬어요...”

고개를 끄덕인 지혁이 유리아를 놓아주었다.

“사과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두근!

유리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혁의 표정이 몹시 구겨져있었기 때문.

지혁이 화를 내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자신은 머리보단 몸이 먼저 나가는 멍청이니까.

그리고 맨날 죄송하다고만 지껄여왔기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을 만도 하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저분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울먹거리던 유리아의 입이 열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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