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2 위기를 기회로 #2
“지혀 씨이... 노아주세혀...”
볼을 꽉 눌리고 있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유리아.
잔뜩 겁을 먹은 얼굴, 동시에 이런 내 강압적인 면모에 흥분도 하고 있다.
더 몰아치자.
“너야말로 유승현이랑 짜고 나한테 접근한 거 아니야? 대체 네가 유승현과 어떤 접점이 있는데? 날 벗겨먹으려고 작당한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잖아.”
“아늬야아... 아니헤혀...”
유리아는 양손으로 내 팔을 잡고 떼어내기 위해 낑낑댔다.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
처음엔 일반 여성보다 약하더니, 점점 강해진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볼이 아려오기 시작해서 본능적으로 힘을 주는 것이다.
나는 힘으로 밀리려고 할 때쯤 유리아의 얼굴을 밀어내면서 손을 떼어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 뒤로 간 그녀가 벌겋게 상기된 자신의 볼을 만진다.
표독스런 얼굴로 날 쏘아보지만, 성난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내리깐다.
“오... 오해에요... 지혁 씨...”
소극적으로 변한 유리아의 태도.
도리어 화를 낸 게 주효했구나. 자그마한 조교가 성공했다.
솔직히 볼을 잡았을 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유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그녀가 내 보폭에 맞춰 뒷걸음질을 치다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지혁 씨...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도 지혁 씨 말을 들었잖아요...”
“다짜고짜 화를 낸 주제에 내 말을 들었다고요? 제 멋대로 날 정의해놓고선 내 말을 들었다고?”
다시금 존댓말을 하기 시작하니, 유리아가 얕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정말 죄송해요... 이, 일단 여기 앉아요! 다 말씀드릴게요...”
“됐어요.”
“네...?”
“여기까지만 합시다.”
“여기... 까지라뇨...?”
유리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러니까 불안하면 알아서 기었어야지, 왜 날 이겨먹으려 들어.
“날 믿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고요. 그만 만나자는 얘깁니다.”
난 몸을 돌려 미련 없이 공원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유리아가 황급히 일어나 내 팔을 잡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힘이 너무 세. 뿌리치기 힘들다.
이러다 팔 빠지겠다 씨팔.
“지혁 씨!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놓으세요.”
“싫어...! 싫어요! 일단 제 얘기부터 들어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제가 다 설명 드릴게요...”
나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유리아에게 미련이 남아있는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본 유리아가 안도하면서 말한다.
“저희 커피라도 마실래요? 제가 지금 사올까요? 아니, 그냥 같이 가요. 카페에 가서...”
“앉기나 해요.”
“아, 네!”
횡설수설하던 유리아가 곧바로 벤치에 다시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양손을 위에 얹어 살짝 옆으로 뺀, 아주 다소곳한 자세.
그녀의 옆에 앉은 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니 유리아가 내 눈치를 본다.
“저... 지혁 씨...”
“잠깐만 이러고 있을 테니까 조용히 하세요.”
“네에... 죄송합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유리아였다.
기세를 다시 잡아온 건 다행이지만 유승현 그 씨발놈 때문에 큰일이 날 뻔했다.
아이테르도 없어져서 화나는데... 더 화풀이할까?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데이트에서 마음껏 능욕하자.
머리를 꾹꾹 누른 나는 유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설명해 봐요.”
“그... 절대 중간에 가시면 안돼요?”
“설명이나 하라고요.”
“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유리아는 오랜 시간동안 유승현과의 대화를 상세히 풀어 설명했다.
내게 유승현이 아론의 환생이라는 것까지 오픈했다.
거기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였다.
그만큼 날 좋아하고 믿는다는 의미.
조만간 아이테르를 침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 그래서 지혁 씨가 일부러 승현 씨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화를 낸 건데... 바보는 오히려 저였어요. 아무리 아론의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승현 씨의 말만 믿고 지혁 씨를 의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유리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무표정.
유리아가 안달이 난 듯 엉덩이를 달싹거렸다.
잠시 그녀의 간을 본 내가 입을 열었다.
“또 있죠? 화를 낸 이유.”
“.....”
“전부 설명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또 거짓말을 한 건가요?”
“아니에요! 사실...”
뜸을 들이던 유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혁 씨가 승현 씨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돼서... 그래서 저도 가지고 놀려는 줄 알고... 화가 났어요...”
지금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속으로 킥킥거린 내가 말했다.
“그렇군요.”
“지혁 씨가 제게서 떠나려고 했을 때... 심장이 내려앉았어요. 아무래도 전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나 봐요.”
“기사단장의 환생이라면 저보다 유승현 씨에게 가야 맞는 것 아닙니까?”
“승현 씨는 자신이 아론이었다는 걸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지혁 씨에게 아론의 느낌을 받아서... 아! 그렇다고 제가 지혁 씨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손사래까지 치며 황급히 말을 덧붙이는 그녀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내가 물었다.
“유리아 씨의 입장에서, 유승현 씨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겠네요?”
“.... 네.”
“저와 만나면서 유승현 씨도 만나겠다는 겁니까?”
“지, 지혁 씨도 세화를 만나면서 저도 만나고 있잖아요... 잘못된 건 아니라고 봐요...”
당돌하군.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은하를 넘은 사랑보다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짜릿한 기분을 느낄 때가 기대되기도 한다.
난 말없이 유리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당겼다.
순순히 딸려오는 그녀.
심지어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기까지 한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머리에 키스를 해주자 기분이 좋은 듯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래도 기쁘네요.”
“뭐가요...?”
“아론이라는 사람의 느낌을 저에게 받은 것도 기쁘고, 유리아 씨가 저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기쁘고요.”
“.... 흐응...”
콧바람을 내뱉은 그녀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는다.
애교는 충분히 있네. 근데 감히 어딜.
내가 유리아의 손을 떼어내자 그녀가 무척 당황해했다.
“지혁 씨...”
“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어요.”
“아, 알아요... 앞으로는 지혁 씨의 말도 들어보고...”
어허, 아니지.
내 말만 들어야지.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 마.
“내일 시간 비워놨죠?”
“네...”
“취소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말끝을 흐리니 유리아가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불안하긴 한 모양이지?
내가 말을 이었다.
“봐주는 셈 치겠습니다.”
그에 가슴에 손을 올린 유리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심호흡을 했다.
“가, 감사해요... 어디로 가실 건가요?”
“알 거 없어요.”
“하지만... 어디 가는지 알아야 옷을... 지혁 씨가 예쁘게 입고 나오라고 했잖아요...”
“알 거 없다고요. 준비하고 있다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요.”
“.... 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손을 꼼지락대는 그녀.
유리아의 속내마저도 솔직하게 들었고, 주종관계의 차이를 더 벌렸다.
특히 전자, 유리아가 아론을 들먹일 정도라면 환상적인 결과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여기까지 왔다.
끊임없이 몰아친 게 아주 잘 먹혔다는 뜻이다.
“이만 일어나죠.”
내 말에 깜짝 놀란 유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벌써요...? 시, 싫어요.”
“유리아 씨가 싫다고 하면 내가 들어줄 줄 아십니까? 투정만 부리면 다 되는 줄 알아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역정을 낸 유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낸 그녀가 내 눈치를 살핀다.
“지혁 씨...”
“어이가 없네요. 원래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사람이었나요?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퉁명스런 내 말투에 유리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오늘 감정기복이...”
“핑계 대지 말고.”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네! 네! 약속해요! 다시는 지혁 씨한테 화내지 않을게요!”
용서받을 분위기가 되자 반색하며 언성을 높이는 유리아였다.
아까는 내 말도 들어보고 화낼지 말지 결정하려던 것 같았는데... 크크...
그녀가 반 발자국만 뒤에서 상황을 침착하게 살핀다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없다고 판단이 섰을 터다.
하지만 그녀의 현 상태는 이성보다 감성이 더 앞서있는 상태.
이는 다름 아닌 내가 조절한 거다.
그녀의 불규칙적인 감정선이 높게 올라왔을 때, 딱 맞춰 터뜨려서.
‘쉽다 쉬워.’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짧게 말했다.
“손.”
그러자 유리아가 황급히 내 손을 맞잡아온다.
하지만 깍지는 끼지 않는다.
끼고 싶을 텐데도 내가 화를 낼까봐 참고 있다.
표정만 봐도 답이 나온다.
살포시 웃음을 지어보인 나는 자유로운 손으로 유리아의 턱 밑을 긁었다.
마치 강아지를 칭찬하듯 말이다.
유리아는 이런 내 손길에 처음엔 놀랐으나, 이내 기분 좋은 듯 눈을 슬며시 감았다.
“내일 오전 열 시에 준비 다 끝내고 집 앞에 나와 있으세요.”
‘말을 잘 들은 기념으로 특별히 말해주는 거다.’
내 말투엔 이런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앞으로도 말을 잘 들으면 네가 만족할 만한 보상을 주겠다는 여지를 주는 거다.
“알겠어요...”
“돌아가죠.”
“.....”
머뭇거리던 유리아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은 절대 놓지 않은 채였다.
그래, 말 들어야지? 상 받고 싶잖아.
나는 방긋 웃어주며 유리아와 함께 공원을 나갔다.
그렇게 따로 헤어진 이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톡이 왔다.
[지혁 씨, 오늘 정말 잘못했어요. 내일 꼭 만날 거죠? 진심으로 좋아해요♥]
김태곤으로 변신해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대소를 터뜨렸다.
톡 내용에서 노선을 확실히 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승현과도 만나겠지만 마음은 내게 더 줄 것이다.
아, 몸도 마찬가지지.
저 좋아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게 아닌 건 아쉽지만 내일이면 달라지겠지.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
그러자 귀여운 2등신 캐릭터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이 왔다.
좋아한다는 말이 듣고 싶나보다.
그나저나 저건 또 언제 구매한 거래? 어이가 없네.
조금 더 지나니 화를 내는 이모티콘도 온다.
알았다고. 네가 원하는 대답을 보내줄게.
[나도 좋아해요.]
얼마 뒤, 빨간 하트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이 세 장이나 왔다.
톡을 할 때만큼은 확실히 세화보다 귀엽다. 이건 인정해주마.
피식피식 쪼개던 나는 김태곤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아빠.
“미안하구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다.”
-왜요?
“갑작스럽게 출장이 잡혔다. 한 이틀 걸릴 거야.”
-그래요? 아쉽다... 알겠어요.
전혀 아쉬운 목소리가 아니다.
썸남을 대할 때와 온도차이 좀 보소. 이러니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슬퍼하지.
자식 키워봐야 소용이 없어요.
아, 내가 키운 게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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