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아이테르가...?
멕시코 유카탄의 수많은 천연 우물, 통칭 세노테 중에선 익킬이라는 아름다운 곳이 있다.
근처에 치첸이트사가 있어 그곳을 보러 갈 때 관광객들이 거치는 코스이기도 하다.
이 익킬의 벽면 어딘가엔 공간이 하나 숨어있었다.
아이테르가 발견되기 전까진 세계의 그 어떤 사람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다.
부우욱!
허공을 찢은 포탈에서 나온 나와 세화.
익킬 주변을 감시하던 경비원 세 명이 화들짝 놀란다.
스페인어로 무어라 씨부리며 총구를 우리에게 겨누는 그들이었지만, 세화가 손을 한 차례 휘젓자 몸에서 회색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세 명의 몸에서 나온 연기를 손으로 가져간 세화는, 그것을 동그랗게 말고 꽉 쥐었다.
그러자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가루로 변해 세화의 손가락 사이로 떨어졌다.
마치 세월의 풍파를 견디다 못해 바스라진 돌멩이처럼 말이다.
무심한 얼굴로 인간 셋의 영혼을 소멸시켜버린 세화가 달빛이 비춰주는 익킬 내부를 보더니 감탄한다.
“너무 아름다워요... 여기서 수영하고 싶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세화가 고개를 돌리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주인님!”
“왜?”
“여기서 수영하고 싶다구요!”
“하면 되잖아. 옷은 다 벗고 하던가.”
“씨이잉...”
귀찮아하는 듯 한 내 대답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에 마구 휘두르는 세화.
섀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절로 실소가 나올 정도로.
“아이테르 탐지는 더 이상 안 되겠지?”
그 말에 세화가 행동을 멈추고 축 쳐졌다.
“네, 안돼요.”
세화는 그녀에게 귀속된 아이테르가 전혀 다른 물질이 되어버리면서 탐지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아이테르의 위치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죄송해요...”
“뭐가?”
“도움이 못 돼서...”
“별 걸 다 시무룩해하네. 이리와.”
세화가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난 그녀의 이마에 진한 키스를 해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이후 허공을 부유하며 익킬 내부로 들어와 가장 구석의, 물과 맞닿아있는 벽에 손을 대고 마력을 집중했다.
퍼석!
그러자 벽면이 세화가 경비원의 영혼을 소멸시켰던 것과 비슷하게 바스라지더니, 내부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내 뒤에서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는 세화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들어갈까?”
“여기서 기다리면 안돼요? 무서워요.”
무섭긴 무슨...
“그럼 여기 있어.”
“음... 그냥 주인님이랑 같이 갈래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하자는 건지.
힘 빠진 한숨을 내뱉은 나는 앞장서서 공간에 진입했다.
세화는 내 옷자락을 꼭 쥔 채로 따라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시력을 집중하니 선명하게 보였다.
그곳을 가로질러가길 얼마 후, 길이 넓어지면서 앞이 막혀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그러세요...?”
세화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시력을 더욱 집중했다.
분명 무지개색의, 로제를 위한 아이테르가 있어야하는데... 왜 없지?
이 장소는 분명 맞다. 익킬 벽에 있는 공간은 여기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왜 없는 거지?
‘침착하자.’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해. 그래야만 한다.
난 오랜 시간동안 익킬 전체를 훑으며 아이테르를 찾아나갔다.
**
지금까지의 내 계획은, 조금은 틀어질지언정 구상한 대로 갔다.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틀어져도 너무 틀어져버렸다.
“이... 런 말도 안 되는...!”
벽을 파괴하면서 공간을 두 배, 세 배 넓혀 봐도...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관광객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익킬 전체를 아예 드러내 봐도 로제의 아이테르가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꽉 쥔 주먹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세화는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안심시켜줄 상황이 아니다.
당장 나부터 당황스러워 뒤질 것 같은데, 이 상태로 어떻게 세화를 안심시켜주겠는가?
유리아의 아이테르는 내가 기억하는 정확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로제의 것도 여기 있어야 하는데... 왜 없는 걸까?
누군가가 가져간 흔적은 분명히 없었다.
가져갈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된다.”
“주... 인님... 뭐가요...?”
입술을 파리하게 떠는 세화.
내 이런 모습이 어지간히 무섭나보다.
좋아... 진정하자. 로제의 아이테르는 없다고 치고...
캐롤라인과 셀린의 아이테르 먼저 찾아보자.
“다른 곳에 가보도록 하지.”
저도 모르게 마왕의 말투가 튀어나오는구나.
지금은 송지혁 연기를 할 때가 아니다.
“네... 네!”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거리는 세화.
난 그녀를 데리고 포탈을 탔다.
목적지는 포르투갈, 그리고 그리스였다.
**
콰앙! 쩌저적!
“꺄악!”
애꿎은 기지의 벽을 박살낸 내 오른손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고, 파편이 살에 박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런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행위에, 세화가 비명을 지르더니 옆에 있던 마르셀라에게 말한다.
“당장 치료해. 어서!”
“와, 왕비님... 의료기기는 여기 없습니다.”
“마법이든 뭐든 써서 치료하란 말이야!”
“황... 송하오나 저는 치료마법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다른 마물들도 마찬가지에요...”
세화의 표정이 마치 지옥의 악마처럼 변했다.
“쓸모없는 년. 당장 꺼져.”
“네... 넷!”
마르셀라가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자, 세화가 왕좌에서 부들부들 떠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한다.
“주인님... 제발 진정하세요...”
세 개의 아이테르가 죄다 없는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
하지만 세화의 말대로, 억지로라도 진정해야 한다.
분노만 해대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했으니까.
“후...”
내가 크게 심호흡을 하자, 세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지금 의료기기에 들어가셔서...”
“자연스럽게 회복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아프지도 않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네...”
왕좌의 팔걸이에 왼팔을 얹고 턱을 괸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남은 세 명이 6탄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무려 개발사 공인으로 5명의 히로인들이 나온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3탄 히로인인 로제... 즉, 스텔라 헤일리는 지금 지구에서 잘 살고 있다.
물론 마왕이 된 내가 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스토리라인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서라도 등장해야 한다. 지금 스텔라는 실존하고 있잖아?
무조건 등장해야만 해.
박사나 마르셀라가 아이테르를 가져갔다? 이것도 말이 안 됐다.
박사의 경우 내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고, 마르셀라는 내게 충성을 다 바친다.
아이테르를 회수했다면 미리 말을 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전부 확신이 불가능했다.
생각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세화를 공략하기 직전부터 모든 아이테르를 확인해보았어야 하는 건데, 내 실책이다.
너무 안일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초조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가져간 흔적은 아예 없다.
익킬에서도 없었고, 포르투갈과 그리스는 더 꼼꼼하게 파악해봤다.
또 아이테르를 직접 회수하지 않았다 뿐이지, 있는 위치의 감시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 말인 즉, 아이테르 3개는 원래 그 자리에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 그냥 유리아를 타락시키고 로제를 주시하며 기다리면 된다.
나도 알고 있잖은가? 6탄 스토리가 1 ~ 5탄처럼 흘러가리란 보장은 없다는 걸.
계획대로 하자. 바꿀 필요는 없다.
그래, 괜찮다. 캐롤라인과 셀린이 변신한 채로 두둥! 하고 등장해도 세화와 유리아라면 상대가 가능하다.
“마르셀라!”
내 쩌렁쩌렁한 외침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르셀라가 헐레벌떡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네, 마왕님.”
“아이테르 복제연구는 당분간 중지다. 내가 유리아에게 집중하는 동안 넌 기존의 아이테르를 찾아봐라. 혹시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전 우주를 뒤져 캐롤라인과 셀린도 찾아보라고 하고 싶지만 저 드넓은 곳을 어찌 찾겠는가?
그들이 사는 은하계의 위치만 알고 있다면 일이 쉬워질 터.
그러나 뽕빨물 야겜 특성상 정확한 위치 따윈 알 리 만무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캐롤라인과 셀린은 저 먼 은하의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뿐이다.
이걸로는 택도 없다.
우웅!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유리아.
김태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아빠, 어디에요? 어제 왜 안 들어왔어요? 전화는 왜 안 돼?]
[미안하구나. 갑작스럽게 출장 일정이 잡혀서... 밤새 바빴단다.]
[지혁 씨와 관련된 일이에요?]
[다른 사업이란다. 오늘은 꼭 들어가마.]
[네.]
이런저런 계획을 점검하고, 다시 획책하고 나니 손목뼈가 붙여졌다.
박힌 파편이 밀려나면서 깨끗해지기까지 했고.
마왕의 몸이 좋긴 좋다 이거지.
왕좌에서 일어난 나는, 세화에게 인자한 웃음을 지어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미안해.”
부드러운 송지혁의 말투까지 나오니 그제야 세화가 안심한다.
그리고는 내게 눈을 흘긴다.
서슬 퍼런 눈빛이 무섭구나.
“돌아가자.”
“네...”
흔들려선 안 된다. 내가 할 일을 하는 거야.
**
딸깍!
“끝났습니다.”
디바이스 용량 증축을 마친 나는 땀을 닦아냈다.
유리아가 어색한 말투로 답한다.
“고... 마워요.”
지금 연구실엔 나와 세화, 유리아, 그리고 박사까지 있는 상태.
세화가 내 권속이라는 걸 모르는 유리아로선,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
“별 말씀을요.”
방긋 웃어준 나는 세화에게 신호를 보냈다.
박사와 따로 자리를 마련하라고 말이다.
그러자 세화가 장비 개발을 하고 있는 박사에게 다가가 수줍은 듯 말한다.
“박사님.”
“응?”
“저...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저번 일을 사과드리려고...”
“알았어.”
진심으로 반성하는 말투와 자세... 훌륭한 연기다.
캐나다에선 노심초사했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박사는 밝은 얼굴로 세화를 데리고 방 안에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난, 디바이스를 들고 유리아의 팔목에 채워주었다.
“지혁 씨... 연구실에서까지 이러면 안돼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날 나무라는 그녀.
세화가 가까이 있는데도 저러는 것이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다.
뭘 이러면 안 돼. 채워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으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의심만 더 살 겁니다.”
“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아까 세화랑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데, 세화가 뭐랬어요?”
“디바이스... 어떻게 충전했냐고...”
“뭐라고 대답했죠?”
“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어요...”
“잘했어요. 이틀 뒤 잊지 말고요.”
“네...”
쑥스러워하며 자리를 피하는 유리아.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은 내가 생각했다.
송지혁, 김태곤, 그리고 세화가 한마음 한뜻으로 널 속이고 있는데, 네가 안 속고 배기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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