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카페에 들어선 나는 유리아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오른팔을 살짝 30도 각도로 틀고 손을 흔든다.
내 모습을 본 유리아의 얼굴이 굳었다가 펴졌다.
아론이 보여주었던 습관. 그걸 또 유승현이 아닌 내게서 보게 되니 마음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리라.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 아뇨... 저도 여기 온지 얼마 안 됐어요.”
온지 30분은 훌쩍 넘어놓고 무슨.
“가실까요?”
“네.”
난 유리아를 데리고 한대거리에 있는 괜찮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유리아가 돌연 자신이 김태곤과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 방금 뭐라고... 같이 사신다고요?”
입을 쩍 벌린 나.
유리아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쑥스러워했다.
“네... 완전히 환생하셨거든요.”
나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음식이 나오고, 김을 모락모락 풍기는 스테이크를 주시하던 나는 다시 유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려 속삭였다.
“그 말씀은 한낱 인간인 제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아시죠?”
“저도 인간인데요?”
“아니, 당황해서 말을 잘못했습니다. 지구인인 저로선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유리아 씨는 꾸준히 김태곤 씨가 환생했다고 주장하셨으니까... 믿을게요. 그러고 보니 김태곤 씨가 오늘 희한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유리아 씨의 말처럼 완전히 환생이 끝나셔서 그런 건가?”
유리아가 침을 삼켰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요?”
“만약 자신에게 딸이 있다면 어떨 것 같냐고요. 그게 유리아 씨를 지칭하는 말이었나 보다.”
“아... 진짜... 주책...”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상당히 쪽팔린 듯 양팔을 무릎 사이에 끼워놓고 고개를 푹 숙이는 유리아였다.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먹을까요?”
“아, 네... 근데... 지혁 씨.”
“예?”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궁금하긴 한가보네.
나는 유리아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준 채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러자 유리아가 안달이 난 듯 다시 날 재촉한다.
“뭐라고 하셨냐니까요?”
“김태곤 씨 딸이라면 예쁠 거라고 했습니다.”
조금 김이 새는 대답이지? 얼굴이 풀리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스테이크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 나는, 그걸 천천히 씹어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전 그게 무슨 심리테스트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무난하게 답한 거고요. 만약 유리아 씨가 하셨던 이야기를 들은 상태에서 그 질문을 받았다면... 다르게 답변했겠죠.”
“어떻게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요.”
“.....”
예상치 못한 답변인 듯, 유리아가 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내가 씨익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저도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뭐가요?”
“디바이스 충전 일로 민폐만 끼쳐서...”
“아닙니다. 저 같았으면 아예 도망쳤을 거에요. 그런 숙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을 테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혁 씨는 훌륭하게 연구실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여러 회사에서 자금을 지원해주기까지...”
내가 아니라 박사가 운영하는 건데, 걔는 안중에도 없냐?
하긴, 지금까지 박사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에요. 머리 굴리는 거랑... 돈 지원. 특히 후자는 자신 있죠.”
유리아가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며 입가로 손을 가져가 웃는다.
초승달처럼 변하는 그녀의 눈매.
고작 한 살 차이지만 세화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뭔가 어른스럽고 도도한, 그런 매력이.
“지혁 씨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아요. 아스타로트가 나타났을 때 상당히 침착하셨고 결단력도 있던데요? 허벅지를 찌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심지어 서해에서는 박사님의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만드셨고...”
“지금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저 곤란하라고.”
웃는 낯으로 그리 말하니, 유리아가 황급히 손사래를 친다.
“아니에요. 전 진짜로 칭찬을 하려고...”
“농담입니다. 그리고 입가에 소스 묻었어요.”
“네? 아...!”
화들짝 놀라 냅킨을 입가로 가져가는 유리아.
나는 그녀를 놀렸다.
“저번에 카페에서도 그러시더니 칠칠맞은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러자 입가를 다 닦은 유리아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가 봐요.”
“보기 좋습니다. 사람이 완벽하면 매력이 없거든요.”
은근슬쩍 관심을 표시하니, 유리아의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졌다.
띠링!
그와 동시에 울리는 내 휴대폰.
문자를 확인한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유리아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나는 말없이 휴대폰 화면을 띄워 보여주었다.
[나 외박할래. 친구 집에서 자고 갈 거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지?]
문자내용을 확인한 유리아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발신자가 아침이... 그리고 하트... 세화에요?”
“네.”
“원래도 그날에 저렇게 민감했나요?”
“그건 아닌데... 아마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해서 삐쳐있나 봐요. 돌아오면 잘 해줘야죠. 그나저나 술이 너무 당기는데... 식사 마치고 칵테일 바라도 가실래요?”
그 말에 유리아가 머뭇거렸다.
승낙해. 김태곤도 회식 때문에 늦잖아.
게다가 유승현보다 더 아론다운 나라고.
“전... 좋아요.”
그렇지. 잘했어.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다소곳하게 입으로 고기를 가져가는 유리아.
이번엔 소스를 묻히지 않으려는 듯, 의도적으로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린다.
**
석류 시럽으로 예쁜 그라데이션을 먹은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켠 유리아가 말한다.
“아버지를 잘 부탁해요.”
일자 테이블에서 유리아를 향해 몸을 돌린 상태였던 나는, 그녀의 부탁에 씨익 웃었다.
“제가 할 말입니다. 사업가로서의 김태곤 씨는 대단하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에요. 함께 파트너로 기업을 일궈나가면 연구실을 더 지원할 수 있게 돼요.”
“.... 그게 가장 큰 목적이에요?”
어때? 김태곤이 한 말과 비슷하지?
감동 좀 먹었을 거다.
“예. 타이라트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잖아요. 자금 운용 폭이 높아지면 수색도 가능할 겁니다.”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네요. 마물들을 처리하고 타이라트를 찾아 없애야 하는데... 고작 디바이스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니까... 지혁 씨는 이런 제가 한심하시죠?”
“전혀요. 레스토랑에서도 말씀드렸듯, 저 같았으면 도망쳤을 겁니다.”
유리아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의자를 내 쪽으로 조금 더 돌렸다.
호감이 더 올랐구나. 좋다, 좋아.
유리아 공략은 무척 조심해야 된다.
지구인보다 훨씬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끽하면 한 대 얻어맞을 수 있어서였다.
유리아의 돔 성향도 저 육체에 기인했다.
힘을 주면 남들이 알아서 꼬리를 내리니까 상대방을 마음껏 주무른다.
내 앞에선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저 성향은 유승현에게 넘기고, 내 앞에선 색다른 플레이로 새로운 성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나를 놓치지 못하게끔, 더 빠져들게끔 말이다.
얼핏 보면 어려워 보이고 실제로도 어렵지만, 난 유리아의 모든 성감대를 아는 상태.
까불지 못하게 몇 군데 주물러주면 알아서 내게 꼬리를 흔들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유리아의 나긋한 물음에, 상념을 떨쳐낸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유리아가 내 눈을 피하며 묻는다.
“세화 생각하고 계셨죠?”
“.... 아뇨.”
“그러면요?”
“여러 가지 생각이요.”
난 대답을 하고 유리아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신경이 쓰이는 척 말이다.
유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을 바닥에 두고 의자를 이리저리 회전시킨다.
그렇게 우린 말없이 칵테일만 들이켰다.
그녀의 잔이 전부 비워졌을 때쯤, 내가 물었다.
“돌아가실래요?”
“.... 네.”
조금 아쉬워하고 있구나. 걱정하지 마라.
나도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디바이스를 50프로 정도는 충전시켜줘야 만족할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린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인도를 걸었다.
쌩쌩 지나다니는 차를 바라보던 나는, 근처에 마련된 작은 공원을 바라보았다.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술도 깰 겸.”
“어... 네.”
잠시 간을 보다 승낙한 그녀에게, 난 예의 그 아론의 미소를 보여주었다.
꿀꺽.
유리아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난 그녀와 보폭을 맞추고, 좌우간격도 좁힌 상태로 공원을 거닐었다.
주황색 가로등이 비추는 돌길.
좌우로 산재한 나무가 분위기를 돋워준다.
밀회를 즐기기엔 괜찮은 장소. 왕복 8차선 차도 근처에 위치한 공원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다.
“예쁜 공원이네요. 위치 때문인지 사람은 없지만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짧은 대화를 나눈 우린 계속 돌길을 걸었다.
나는 가로등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 벤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 완전히 그렇고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자리로군.
“저기서 조금 쉴래요?”
“힘드세요?”
“사실 김태곤 씨와 여러 곳을 돌아다녀서 다리가 아프거든요.”
“아... 그럼 미리 말씀하시지... 얼른 앉아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정장 외투를 등받이에 걸었다.
그러자 유리아가 그것을 집어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정장을 곱게 접어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하시네요. 아무렇게나 걸어놓으면 구겨져요. 물론 매일 다른 정장을 입으시겠지만... 겉모습이 단정하면 보기 좋잖아요. 아, 물론 지혁 씨가 단정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더 단정하면 보기 좋다는 소리였어요.”
횡설수설하는구나. 부끄럼을 타는 게 느껴질 정도다.
“감사합니다.”
내 감사에 생긋 웃은 유리아가 돌연 코를 움직였다.
정장 겉에 묻어있는 구스베리 향수의 은은한 향을 맡은 것이다.
어때? 네 왕국에 있던 꽃과 비슷한 냄새지?
유리아의 표정이 밝아진다.
“향수냄새가 좋네요.”
“구스베리 향기인데 마음에 드시나봅니다.”
“네. 엄청요.”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유리아.
이런 미소를 내게 보여준 건 처음이다.
무척 아름답다. 고고한 여기사의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아 너무 신선하고.
아찔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나는, 유리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최근 유리아가 자주 짓던 복잡한 얼굴을 하면서.
그러자 그녀 또한 얼굴이 서서히 굳는다.
“있잖아요.”
깊게 깔린 내 목소리.
유리아가 다시금 침을 삼켰다.
“네?”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다.
좀 오글거리게 말해볼까? 아니면 그냥 들이대?
그냥 두 개 다 합치자. 여기선 그 어떠한 말을 하든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미소가 엄청 아름다우시네요.”
“네에...? 앗!”
놀라 고개를 뒤로 빼는 그녀.
내가 얼굴을 그녀에게 가까이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구나.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엘프처럼.
“다시 보여줄 수 있어요?”
“그게... 지혁 씨, 이건 잘못된 것 같아요.”
잘못된 것 같다고? 너 우유부단한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어제 유승현의 모습을 보고 점수를 깎았고.
근데 그런 우유부단함을 직접 보여준다? 역시 인간들은 내로남불이 기본 패시브라니까.
마치 나처럼.
“다시 보여줄 수 있어요?”
더욱 낮게 깔리는 내 목소리.
재차 강조하니 유리아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다.
“이러지 말아주세요...”
“확실하게 말하세요.”
강압적으로 나가야 돼.
섭 성향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본격적인 공략 시작점부터 내게 매달리도록 해야 해.
“.....”
안절부절 못하며 확답을 내리지 못하는 유리아에게, 난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상체도 마찬가지, 유리아의 어깨에 가슴이 닿을 정도까지 붙었다.
유리아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게 보인다.
머릿속에선 이게 잘못된 거라고, 그만둬야 한다고 경종을 울려대고 있겠지.
하지만 가슴은 다르다.
아론의 모습을 유승현보다 많이 보여준 송지혁에게 상당히 끌리고 있다.
꿀럭.
유리아의 얇고 긴 목이 한 차례 출렁였다.
이성보단 본능에 몸을 맡겨. 그럼 내가 만족시켜줄게.
얼굴을 더더욱 가까이 가져가니, 유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술에 침을 묻힌다.
그때, 나는 유리아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흡...!”
확장된 동공. 하지만 이내 눈이 감기면서 딱딱해진 얼굴이 풀린다.
나는 유리아의 선홍색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핥아대면서, 꽉 닫힌 입술 사이를 살살 훑었다.
오른손은 그녀의 뒷목을 밭치고, 왼손으론 유리아의 팔목을 잡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점점 벌어져가는 그녀의 입술.
틈이 보인 순간, 난 그 안에 공격적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하읍...!”
한 차례 콧바람을 내뱉은 유리아의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유리아의 입 안은 따뜻했고, 아까 마신 석류 칵테일 맛이 은은하게 풍겼다.
그녀의 혀가 마치 주인을 받아들인 것처럼 순종적으로, 내 혀놀림에 맞춰 얽혀온다.
‘됐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고, 그 다음부터는 쉽다.
세화보다 빨리 타락시켜주지.
넌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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