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75화 (75/471)

EP.75 심란해지는 마음 #2

피곤에 찌든 얼굴을 연기하며 집으로 돌아온 난, 유리아가 소파에 앉아 팔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눈에 이채를 띠웠다.

“오셨어요?”

힘없이 날 반기는 그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중인 건가?

아니면 송지혁, 유승현을 생각하고 있나?

셋 다겠지.

여름용 정장 외투를 벗은 나는, 그것을 현관문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어놓고 말했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잠이 안 와서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아무 일 없었어요... 일은 어때요?”

의연하게 반문했다.

여기서 송지혁과의 연결고리를 또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잘 되지 않는구나.”

“왜요?”

“송지혁 씨 외에도 여러 파트너를 알아보고 있는데, 다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유리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런 반응을 보는 게 진짜 재미있다는 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유리아의 마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게 재밌다.

“그럼 지혁 씨랑 하시면 되잖아요.”

“사업은 의리로만 하면 안 되지만...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싶다. 젊은 친구가 능력도 좋고 똑똑하기도 하고... 마음만 같아선 사위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아빠... 아니, 아버지. 저에겐 아론이...”

아론의 환생이 널 확 끌어당기는 느낌이라도 풍겼냐? 아니잖아.

오히려 점수만 깎았을 테지.

“그냥 해본 말이란다. 송지혁 씨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니? 같은 연구실 동료.”

“맞아요... 세화요. 이세화.”

“아쉽게 됐구나.”

“아쉽다뇨...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농담 좀 해봤다. 난 피곤하니까 먼저 자마.”

“네... 주무세요.”

몇 시간 뒤 동이 트자, 난 거실 식탁에 일이 바쁘다는 쪽지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송지혁으로 변한 내가 간 곳은 요식업 프랜차이즈.

거기 사장실에 앉아 세화를 위한 낫을 제작하는데 열중하던 나는, 노크소리가 들리자 장비를 집어넣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여전히 단정한 차림의 아람이 들어와 내게 꾸벅 인사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니, 단정하긴 한데 묘하게 색기를 풍겼다.

정장 스커트가 짧아졌고, 구두 굽이 높아진 상태.

외투마저 딱 달라붙은 슬림핏이었다.

대놓고 그녀의 외관을 훑어보던 내가 물었다.

“김 전무한테 붙었었어?”

“네.”

“일은 어때?”

“어렵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어요.”

“힘들지?”

“아니에요. 사장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녀는 날 향해 존경의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김 전무로 위장한 마르셀라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한 모양.

마르셀라는 약물이나 개조의 도움 없이 아람의 머릿속을 바꿔놓고 있는 중이다.

날 점점 신격화시키도록 말이다.

마치 사람을 점점 가스라이팅하여 조종하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처럼.

지금은 그저 날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자일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를 떠받들어 모셔야할 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신탁처럼 들릴 것이고, 명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이든 서슴없이 하는 그런 신도가 될 테지.

세화가 직접 타락했다면, 아람은 간접적으로 타락하는 중이다.

좋은 전략을 짰구나, 마르셀라.

내가 방긋 웃고 있으니 아람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요새 회사에 잘 들르지 않으시던데... 많이 바쁘세요? 다크서클도 내려와 있는 것 같아요.”

바빴지. 바빴고말고.

밖에선 유리아를 공략하느라 힘들고, 집에선 아내가 은근슬쩍 바가지를 긁어댄다.

가장의 무게란 참 무겁단 말이야.

“그냥저냥. 커피나 좀 타올래? 진하게. 소파 테이블에 올려놔.”

“네.”

아람이 간이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타는 사이, 난 유리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리아 씨, 좋은 아침입니다. 세화와 화해했다고 알려드리려 문자했어요. 유리아 씨 말씀대로 그날이었더라고요.]

너 휴대폰 무음모드 아니지? 잠귀도 밝잖아.

어디 한 번 바로 답장을 보내나 실험해보자.

띠링!

[축히해요.]

바로 왔군. 심지어 급하게 보낸 듯 오타까지 냈다.

킥킥 웃은 내가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는데, 유리아의 문자가 이어서 도착했다.

[죄송해요. 뒤에 할 말이 더 있었는데 실수로 보내기를 눌러버렸네요. 축하해요. 세화는 어때요?]

뭘 보내기를 눌러. 핑계도 참 유리아답다.

단답으로 보내면 대화가 끊길 확률이 높으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화해는 했는데 그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네요. 오늘도 친구 만난다고 나갔어요.]

[아... 진짜요?]

[그래서 말인데... 저녁에 식사하실래요? 사업차 회의가 있는데 한 일곱 시 정도에 끝날 것 같습니다. 여덟 시쯤 만날 수 있어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이번엔 답장이 바로 오지 않는다.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커피를 타고 온 아람이 소파 앞 커피테이블에 소형 쟁반을 내려놓을 때쯤, 유리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뇨. 한대거리에서 만나죠. 저번에 그 카페는 어때요?]

유승현도 보고, 겸사겸사 나도 보시겠다?

나야 좋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네, 일 열심히 하세요.]

쉽다. 너무 쉽다.

긴장감이 없는 수준.

로제를 공략할 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접근해볼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쉽다.

휴대폰을 집어넣은 나는 소파로 움직였고, 거기 멀뚱하게 서있는 아람의 팔을 잡아끌어 내 옆에 앉혔다.

철푸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소파에 엉덩이를 댄 아람이 부끄러워한다.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내가 물었다.

“남자친구는? 헤어졌어?”

“네... 헤어졌어요.”

“걔가 뭐래?”

“다른 남자 생겼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그래? 너한테 다른 남자도 있었나보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 사장님...”

거의 울먹거리려고 하는 아람이었다.

“농담이야.”

그리 말한 나는 아람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정장 위로 느껴지는 밋밋한 가슴 감촉.

아람은 고개만을 푹 숙인 채 내 손길을 느꼈다.

얘는 너무 수동적이라 손이 가지 않는단 말이야.

세화처럼 타락해도 개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다.

“아람아.”

“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전 괜찮아요...”

이거 봐라. 세화였다면 ‘주인님의 자지를 먹어버릴 거에요!’ 라고 발랄하게 말했을 텐데.

뭐, 조교도 잘 되지 않은 일반인에게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이상하지.

난 말없이 아람을 두른 팔을 빼내고, 사타구니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아람이 침을 꼴깍 삼키며 소파에서 내려와 내가 벌린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이 바짓단에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커피를 홀짝였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야지.

잔을 내려놓고 정장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낸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

유승현은 오늘 출근하기 전 아침에 세화를 만나 강제로 쥐어짜내졌다.

이젠 섭 성향도 적당히 만들어졌겠다, 세화는 디바이스가 충전이 되지 않는다는 걸 빌미로 유승현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이다.

그가 보는 앞에서 반지를 빼고 핸드백에 집어놓은 세화는, 그에게도 반지를 빼달라 부탁했다.

그 때문에 현재 유승현은 멘탈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출근은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평소엔 안 하던 실수를 해서 아가씨들의 볼멘소리를 들었다.

그랬음에도 유승현은 실수에 실수를 거듭했다.

실장 중 한 명이 유승현의 약지에 반지가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정을 봐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저녁 여섯 시가 되고, 여타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는 시간에 퇴근하게 된 유승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주점을 나섰다.

그리고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유리아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승현 씨. 제가 잘 맞춰서 온 것 같네요.

잘 맞춰서? 두 시간 전부터 입구를 서성였으면서 무슨.

휴대폰으로 마물의 화면을 보고 있던 나는 흥미로운 눈을 했다.

과연 오늘 유승현은 유리아에게 연락처를 줄까?

-예... 안녕하세요... 설마 했는데 진짜 오셨네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힘이 없어 보이는데...

-그냥... 오늘따라 의욕이 없네요.

유리아는 유승현의 손에서 반지가 빠져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 유리아가 그걸 유승현에게 내민다.

-이거 드세요.

약국에서 파는 피로회복제였다.

저거 원래 날 주려던 거 아닌가? 서운하네.

-이건 왜...

-드리려고 샀어요.

-.....

복잡한 표정으로 유리아와 피로회복제를 번갈아 바라보던 유승현은, 결국 두 손으로 그걸 받았다.

냉랭한 세화를 보다가 유리아의 부드러운 말투를 들으니 선녀 같아 보이겠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연락처를 달라고 하고 싶은데... 실례일까요?

-아직은... 안 됩니다.

유리아의 눈이 꿈틀했다.

다만 나쁜 쪽이 아닌, 좋은 쪽이었다.

애매모호하게 거절하지 않은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매니저라고 하셨죠? 혹시 일반 회사원들처럼 오전 출근, 저녁 퇴근인가요?

-일단은 그런데...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웨이터를 도와줄 때도 있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관심 있어요. 승현 씨한테.

-고작 한 번... 아니, 그제까지 두 번 봤는데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무슨...

황당해하는 유승현.

유리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한국식 인사법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유승현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유리아에게 묻는다.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유리아 엘레나르에요. 유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예... 안녕히 가세요, 유리아 씨.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유리아는 시노페 앞 카페에서 커피를 시킨 뒤 날 기다렸고, 유승현은...

딸깍!

피로회복제의 병뚜껑을 따고 그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서글픔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미소였다.

세화에게 차이기 직전까지 온 건 슬픈데, 유리아라는 미녀가 관심을 표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이런 줏대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끼. 세화한테 그 얘기를 들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하긴, 1 ~ 5탄의 스토리 초반부를 생각해보면 이게 유승현답긴 했다.

마물을 다시 유리아에게로 돌려보니,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두들기고 있었다.

발신 대상은 김태곤이로군. 한 번 보자.

[아빠, 저 오늘 약속이 있어서 늦을 거에요. 아빠는요?]

여덟시에 보기로 했지만 더 빨리 봐야겠다.

널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난 곧장 답장을 보냈다.

[사업 이야기가 잘 풀려서 지금부터 임원진들끼리 회식을 하기로 했다. 나도 늦을 거야.]

그 뒤 유리아의 답장도 기다리지 않고 송지혁의 휴대폰으로 유리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리아 씨. 저 일찍 끝났는데 혹시 어디세요?]

두 사람을 연기하려니 귀찮구나, 귀찮아.

내 문자를 받은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에 손을 가져갔다.

눈치챘지? 김태곤과 내가 사업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놀란 얼굴을 하던 유리아가 살포시 웃으며 답신을 보낸다.

[전 한대거리에 있어요. 선약이 있어서...]

[그래요? 그럼 예정대로 여덟시까지 갈까요?]

[방금 막 헤어졌는데, 지금 오실 수 있어요?]

[바로 가겠습니다. 카페에 계세요. 20분이면 도착할 거에요.]

[네.]

무릎을 찰싹 두드리며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나체로 잠들어 있는 아람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으음... 아, 사장님...”

“급한 약속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 천천히 쉬다가 집에 가.”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람이도 마르셀라의 부담을 덜어주는 용도 외에 쓸데가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유리아부터다.

그녀와 식사를 마치면 과감하게 들이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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