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74화 (74/471)

EP.74 심란해지는 마음

딸깍! 우우웅!

무지개색 에너지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그런 아이테르의 모습을 확대된 화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가 감탄을 터뜨린다.

“와아... 진짜 신기하다...”

“쉿... 조용히 해주세요.”

“아, 네...!”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고 있던 내 말에, 유리아가 곧바로 입술을 오므렸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그녀.

저런 녀석이 밤엔 도도한 여왕으로 돌변한다니 참 웃겼다.

뭐, 어차피 그 성벽은 내가 받아주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한참동안 용량을 늘리던 나는, 마지막 작업을 끝내고 디바이스를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옆에 놓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용량은 천천히 늘려가야 해요. 아이테르는 성격이 민감한 친구라... 계속 건드리면 화내거든요.”

“살아있는 생명체 같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근데...”

말끝을 흐린 나는 연구실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박사가 있을까 걱정하는 모습처럼 보이려고 말이다.

그런 나를 본 유리아가 의아한 눈을 한 채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세요?”

“그... 혹시 디바이스를 충전하셨습니까? 저번에 박사님이 유리아 씨의 충전량은 3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었는데... 지금은 5퍼센트가 됐네요? 박사님이 착각하실 리는 없을 테고...”

“.....”

침을 꼴깍 삼키는 유리아.

어제 일이 생각나서 부끄러운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이런... 사생활을 존중했어야 하는 건데... 화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냥 잘하셨다고 말해드리고 싶었어요.”

그 말에 유리아가 손사래를 친다.

“화난 건 아니고요... 혹시 아이테르가 힘을 얻는 방법을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좋아하는 사람과의 성적행위라는데...”

“정확히 알고 계시는데요?”

“아니, 제 말은... 그게... 좋아하는 ‘사람’과의 행위면 다 돼요?”

“사람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아... 음... 이게... 뭐라고 해야 할지...”

얼굴이 붉어져선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그녀.

저 모습도 나름 나쁘지 않네.

“동물 같은 생물과의 성적 행위라면 저도 잘...”

유리아가 버럭 화를 내며 내 말을 끊는다.

“누... 누가 동물과 그런 행위를 한다던가요!?”

귀를 막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냥 설명을 해드리는 겁니다. 전 유리아 씨가 동물과 그렇고 그런 짓을 했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오... 오해할 만하게 말하셨잖아요!”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확실하게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제 질문은 말 그대로에요. 좋아하기만 한다면 충전이 되냐는 뜻이죠.”

어제 충전됐잖아. 뭘 자꾸 확인하려 들어.

짜증나게 하지 말고 그냥 수긍하란 말이야.

“확인된 방법은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고요?”

“글쎄요. 여러 실험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네요.”

“네... 용량 개조는 끝난 건가요?”

“오늘은 끝입니다. 착용하시면 돼요.”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유리아가 디바이스를 들어 팔목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디바이스가 시계로 변하더니, 유리아의 팔목에 착 감겼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근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시네요?”

“그냥 좀... 고민거리가 많아서요.”

“저라도 괜찮다면 언제든 상담해드릴게요.”

“아니,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던 유리아가 말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내 표정에서 아론의 느낌을 받았기 때문.

아론 특유의 맑은 눈빛과 비대칭적인 미소.

지금 내 얼굴이 딱 그랬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헷갈리지? 환생한 아론이 보여줄 법한 미소를 내가 보여주고 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쫙 폈다.

“이제 돌아갈까요? 벌써 오후 3시네요.”

“네...? 네...! 돌아가요. 돌아가야죠...”

“출출한데 근처에서 식사라도 한 끼 하고 가실래요? 세화가 오려면 멀었고... 유리아 씨의 그 지인 분도 저녁이 돼서야 출근할 테니까...”

“음...”

고민을 하는 유리아.

세화를 놔두고 나와 둘이서 식사를 하기엔 조금 껄끄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을 걸? 넌 내가 지은 아론의 미소를 봤거든.

잠시 머리를 굴리던 유리아가 결국 승낙했다.

“네... 그럼 그냥 간단하게만...”

“알겠습니다. 가시죠.”

@@

저녁 여섯 시.

유리아는 천천히 한대거리를 가로질러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뭐지...?’

지혁과의 식사자리는 제법 즐거웠다.

취미도 잘 맞는 것 같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희미하게 아론이 아른거릴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연구실에 가기 전 카페에서도 지혁에게서 아론이 보였던 것 같다.

말없이 입가를 두드리는 부분이나, 푸념할 때의 행동이나...

환생했다는 그 사람을 봤을 때도 이러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동시에 세화에게 무척 미안했다.

아무런 얘기도 없이 지혁과 식사를 가졌으니까.

‘하... 미치겠네.’

복잡한 심정을 뒤로하고 시노페에 도착한 그녀는, 와이셔츠와 정장바지를 입은 승현이 가게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제 본 그 사람이 확실하다.

그녀가 황급히 승현을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응?”

고개를 돌린 승현이 유리아를 주시하다가 놀란다.

“아...! 혹시 어제...! 그 남자분과 함께 있으셨던...”

“마, 맞아요. 유리아 엘레나르라고 합니다.”

“유승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근처에 사시나 봐요?”

“그건 아니고요... 혹시 출근하신 건가요?”

“퇴근입니다. 전 매니저라 오전에 일을 보거든요.”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문이라도 두드려볼 걸. 괜히 연구실에 갔다.

‘아냐. 용량 개조는 필요한 일이었어.’

그리고 승현이 퇴근하는 중이라면 오히려 더 잘된 일.

승현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 생각한 유리아가 승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론의 얼굴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못생겼다.

몸도 마찬가지, 매일 훈련을 하는 아론과는 다르게 살이 쪘다.

다만 순박한 얼굴은 비슷하다.

얼굴과 몸매는 상관할 일이 아니라 괜찮지만... 가장 중요한 아론의 느낌이 나질 않는다.

“왜... 그러십니까?”

당황해하는 승현의 목소리.

정신을 차린 유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승현의 왼손 약지에 껴진 반지를 보았다.

“그 반지는... 여자친구 건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하...”

돌연 심란한 한숨을 내쉬는 그.

유리아는 승현과 여자친구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저 사람이 아론의 환생이라면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여자친구랑 싸웠다니 잘됐다고 생각한 유리아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연... 락처요...? 아, 혹시 이쪽 일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 말에 유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설마 자신을 술집여자로 본 건가?

기분이 제법 나쁘다.

“아니요.”

“그럼 왜...”

“유승현 씨라고 했죠?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

승현의 목이 거북이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믿어지지 않는 얼굴.

잠시 그러고 있던 그가 말한다.

“뭐 내기에서라도 진 건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저 같은...”

자신감이 결여되어있다.

언제나 당당하던 아론과는 완벽하게 딴판.

유리아는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이 사람이 정녕 아론의 환생이 맞나? 하고.

하지만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설마 다른 사람인가? 아니다. 아버지는 분명 이 사람에게서 아론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아직 확실해진 건 없다고 해도... 환생까지 한 아버지가 받은 느낌이니 맞을 텐데...

이해가 안 가지만 일단 붙잡아야 한다.

“안 되나요?”

“....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안 될 것 같다는 무슨 말인가.

아론은 저리 우유부단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지혁이 아론의 환생이라고 하면 믿어질 정도다.

주먹을 꽉 쥔 유리아가 말한다.

“초면에 죄송해요. 내일 다시 올게요.”

“내일요...?”

“네. 내일 봬요.”

그 말을 남긴 유리아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오랜 시간 승현과 대화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없어져버린 뒤였다.

승현과의 첫 대화 점수는 오십 점 이하.

아론의 환생이 아니었다면 빵점이었을 터였다.

@@

유리아와 유승현, 두 사람의 대화를 추적용 마물을 통해 보고 있던 나는 킥킥 웃었다.

유리아는 지금 세 가지 일로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첫 번째, 아버지의 손길로 흥분해서 디바이스가 충전됐다는 사실.

두 번째, 송지혁에게서 아론의 모습을 어렴풋이 봤다는 사실.

세 번째, 아론의 환생이라 생각되는 유승현이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

나 같아도 유리아의 입장이었으면 복잡했을 터다.

내가 피식피식 쪼개고 있자,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세화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우응... 왜 웃어요...?”

“웃긴 일이 있으니까. 더 자.”

“주인님은 안 자...?”

어쭈? 반말을 해버린다고?

네가 감히? 근데 귀여우니까 봐준다.

“지금은 잘 시간이 아니잖아. 휴대폰이나 줘봐. 김태곤 걸로.”

그 말에 세화가 손을 뻗어 탁상에 있는 휴대폰을 공중에 띄웠고, 내 손으로 옮겼다.

그냥 손으로 갖다 주는 게 더 빨랐겠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모양이구나... 쯔쯔...

좀 늦게 타락시킬 걸 그랬나.

난 택시를 탄 상태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리야. 아빠는 새벽이나 돼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유리아가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가 황급히 화면을 두드린다.

[네. 조심히 들어오세요. 근데 유리야... 라고요? 오타를 내신 거죠?]

나는 답장을 써서 전송하려다가, 뭔가 밋밋하다고 생각해 옆에 이모티콘을 붙였다.

[아니란다. 아빠도 오타 아님. ^^]

이 정도면 적당히 올드해보이고, 친근하게 다가가보겠다는 티도 나겠지.

내 답장을 본 유리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모티콘이 웃긴 모양이다.

작전은 성공이군.

[다른 건 괜찮은데 유리야... 라고 하신 건 조금... 제가 한국인 같잖아요.]

[유리라는 이름이 뭐 어때서? 예쁘고 좋잖니.]

[알겠어요. 아버지가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부르세요.]

[아버지?]

[아빠.]

[땡큐~ 덕분에 힘이 나네! ^^]

이런 씨발. 더 이상은 못해먹겠군.

나는 김태곤의 휴대폰을 홱 던져놓고, 세화의 몸 위로 손을 뻗어 송지혁의 휴대폰을 들었다.

[지인은 잘 만나셨어요?]

문자를 확인한 유리아가 앞좌석 헤드리스트에 머리를 박는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쉰다.

세화를 생각했구나. 그녀에게 미안한 거지?

그냥 밥만 먹었을 뿐인데 왜 그러냐? 거북하면 선을 긋던가.

물론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이 왔다.

[만나긴 했는데 잘... 이라고 하기엔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괜히 언급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세화랑은 화해하셨어요?]

[아뇨. 아직도 안 들어왔고, 제 전화는 받지도 않네요.]

[제가 연락해볼까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더 화낼 것 같네요.]

[아, 그 말도 맞아요. 의외로 섬세하시네?]

[오전엔 맹탕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섬세하다고 했다가... 뭡니까?]

[죄송해요ㅎㅎ]

유리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얘 봐라? 이러다 유승현보다 나한테 먼저 사랑에 빠지겠는데?

난 네 성향을 받아주기가 싫단 말이야.

[다음에 또 식사하실래요?]

화면을 보고 다시 또 한숨을 내쉬는 그녀.

미치겠지? 고민이 깊어져가는 하루지?

5분 가까이 안절부절 못하며 창밖과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녀가 답장을 보낸다.

[전 괜찮아요.]

이유도 묻지 않고 괜찮다고 하네. 이 지조라고는 없는 기집애.

타락하면 세화에게 고생 좀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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