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아빠는 슬프다
한대거리 외곽의 유흥주점 앞.
발걸음을 멈춘 난, 시노페라는 이름의 주점 간판을 황당한 표정으로 읽고 있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여기란다.”
“여긴... 유흥주점이잖아요. 여기에 아론이 있다고요?”
“일단 저 안에서 느껴지긴 하는구나.”
“설마 아론이 여자로 환생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냐.
“나도 잘 모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지하 계단에서 유승현이 올라오더니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손엔 종량제 쓰레기 봉투가 한가득이었다.
버리러 가는 모양인데, 오랜만이다 승현아.
추적용 마물로 보는 거 외에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건 두 번째겠지?
세화와 파전집에서 만났는데 기억하니.
어제 세화가 네 혼을 쏙 빼놓더라. 웃음이 튀어나오더라고.
아, 지금 난 김태곤의 모습이지.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입니다.”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어 중년 신사처럼 인사를 한 나에게, 유승현이 친절한 말투로 말한다.
“여기는 유흥주점이고, 아직 영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약주를 하시려면 여기서 좀만 아래로 내려가시면 돼요.”
난 방긋 웃으며 감사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채 유리아를 데리고 주점에서 조금 벗어났다.
그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딸아.”
“네?”
“방금 우리에게 인사를 한 친구에게서 아론의 느낌이 강하게 났단다.”
“뭐... 라고요...?”
고개를 홱 돌려 유승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
표정이 보이지 않아 읽을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상이 좋다? 아니면 별로?
그도 아니라면 그저 아론의 기운이 풍긴다고 하니 그리워하는 걸까?
우린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돌아오는 유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고개인사로만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그.
얼굴엔 의아함을 가득 품고 있다.
외국인 미녀와 수염이 풍성한 미중년이 뚫어지게 쳐다보니 그럴 만도 하지.
머리를 긁적거린 유승현은 다소 빠른 걸음으로 주점 안에 들어갔다.
이제 감상을 한 번 들어보자.
“너도 무언가가 느껴지느냐?”
“.... 아뇨.”
유리아의 시선은 주점 계단에 향해있었다.
마치 유승현의 얼굴을 본 여운을 곱씹는 듯한 느낌.
좋아,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놈의 면상을 보도록 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론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것뿐이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며칠 더 지난다면 확실해질 테니, 그 전까지는 함부로 접근하지 말도록 해라. 다짜고짜 민폐를 끼쳐선 아니 되잖느냐.”
“네...”
“만약 저 친구가 아론이 확실하다면 어떨 것 같으냐?”
“잘... 모르겠어요. 너무 낯설어요.”
“며칠 전엔 꼭 되찾아오겠다고 말했잖니.”
“그건 맞아요. 만약 아론이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그와 함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스스로 아론이라고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가가는 게 맞는 일일까요? 아까 보니까 반지도 끼고 있던데...”
그건 걱정하지 마. 조만간 세화와 헤어지면 빼게 될 테니까.
“운명은 같은 운명과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디바이스 때문이라도 걱정이 돼요. 언제 또 마물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너도 다 큰 성인이니만큼 알아서 할 거라 믿는다.”
“네, 아버지.”
“돌아가자.”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유리아가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삐빅! 삐빅-!
디바이스에서 이블리언 게이지 경고음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들으니 울림이 아주 좋구나.
그와 동시에 울리는 유리아의 휴대폰.
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네, 박사님.”
-디바이스 충전은 아직 못했지?
“아직요. 하지만 지금 바로 가겠...”
-아니, 넌 연구실에서 모니터링만 부탁할게.
유리아가 숨을 훅 하고 들이켰다.
화가 났구나. 이거 박사도 본의 아니게 날 도와주는군.
전화가 끊기자, 유리아가 황당한 얼굴로 휴대폰을 주시한다.
“뭐 이런...”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유리아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방금 그 소리는 또 뭐고?”
“아버지, 저 잠깐 급한 약속이 잡혀서 어디 좀 다녀올게요. 먼저 집에 돌아가 있으세요. 아셨죠?”
“아, 알겠다.”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어준 유리아가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이제 난 송지혁이 될 때군.
바쁘다 바빠.
인적이 없는 골목에서 변신을 하고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니, 박사의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와있었다.
박사가 유리아에게 전화를 건 직후 내게 곧바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다.
세화는 미리 가있겠지.
나는 박사에게 전화를 걸면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
캐나다의 로키 산맥으로 날아가는 전투기 안.
왜 전화기를 꺼놓았냐는 박사의 꾸중을 대충 넘긴 난, 모니터를 통해 미리 포탈을 타고 캐나다에 도착해있던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이블 발키리가 되기 전의 비스트 슬레이어 슈트를 입고 있던 그녀는 지금 가만히 서서 마물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비밀기지에서 죽기 직전까지 만들었던, 그 덩치 큰 사자 마물 말이다.
그 모습을 본 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하니? 왜 가만히 있는 건데?”
귀여운 애완동물을 죽이기 싫어서 그래.
-저 마물도 가만히 있는데요? 그냥 손바닥만 핥고 있어요.
그 말마따나 사자 마물은 사람 키만한 자신의 앞발을 핥아대고 있었다.
세화에게 당한 상처가 쑤셔오니 저러는 거다.
심지어 눈이 쌓인 단단한 땅을 파고 다른쪽 발을 넣으며, 마치 온천에 온 듯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나를 볼 땐 여리여리한 눈동자로 동정을 구걸하기까지 했다.
이런 귀여운 사자 마물의 행동은 안중에도 없었던 박사는 헛웃음을 켰다.
“마물이잖아.”
-알아요.
“근데 왜 죽이지 않고 있...”
-착한 마물이면 어떡해요?
박사의 얼굴이 벙 쪘다.
레오나의 말투가 냉랭하기도 했거니와, ‘착한 마물’이라는 단어에 어이가 없어진 것이다.
잠깐 동안 침묵하던 박사가 화를 냈다.
“지금 장난해!?”
-.....
“당장...”
조종석에 앉아있던 내가 한손을 들어 박사를 만류했다.
그리고는 레오나에게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공과 사는 구분해.”
아무리 박사가 싫어도 밖에 있을 땐 똑바로 연기를 하라는 의미였다.
-아, 알았어...
겁먹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 레오나가 눈밭을 구르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녀 자신을 바라보는 사자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것으로 끝이었다. 귀여웠던 사자 마물의 최후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눈으로 덮인 상층부에 빨간 핏물이 번져가는 모습을 잠시 주시하던 레오나는, 디바이스에 연동된 포탈을 타고 전투기 안으로 들어왔다.
화악!
변신이 풀려 세화로 돌아온 그녀.
박사가 그런 세화를 향해 성을 냈다.
“넌 대체 생각이 있는 애니? 뭐? 착한 마물? 타이라트가 게이트를 착하게 열고 내보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그 말에 발끈한 세화.
하지만 이내 내 눈치를 보고 눈을 내리깐다.
“죄송해요... 주... 아니, 지혁이랑... 많이 싸워서 기분이...”
싸웠다? 나름 좋은 핑계로군. 내가 전화기를 꺼놓았던 것과 연계할 수도 있겠어.
박사의 표정이 아주아주 약간 누그러졌다.
방금 내가 했던 전화기에 대한 생각을 그녀 또한 한 것이 분명하다.
“하... 그렇다고 해도 쏭 말처럼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왜 이렇게 철이 없어?”
더 있다간 세화가 욱해서 박사의 모가지를 자를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들 하시죠. 돌아갑시다.”
박사는 내 만류에 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고, 더 이상 세화를 꾸짖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려오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그녀.
나는 말없이 사자를 소각시킨 뒤 조종간을 잡고 방향을 돌렸다.
한국 연구실에 도착한 우린, 거기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우릴 기다리고 있던 유리아를 만났다.
정색하고 있는 박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유리아가 이번 일을 따졌다.
“박사님. 대체 왜 절 빼놓으신 거죠?”
“간단해. 디바이스 충전이 안 되어 있으니까.”
“하아...”
유구무언. 할 말 없겠지. 시간을 꽤 줬는데도 아직 제자리걸음이니까.
박사가 묻는다.
“모니터링은 했겠지? 이번 마물은 어떤 것 같아?”
“저도 처음 보는 마물이에요. 상처가 너무 많던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요.”
“알았어. 쏭, 그리고 세화는 수고했고, 이만 돌아가 봐.”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박사가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리아는 박사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이자 세화에게 물었다.
“왜 저러신대?”
“몰라요.”
“넌 또 왜 그래? 말투가 차가워. 화장도 바뀌었네? 스타일 바꾸려고?”
“언니, 나중에 얘기해요. 저 피곤하니까 먼저 돌아가 볼게요.”
“어? 응, 알았어.”
세화는 유리아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날 지나쳐 연구실을 나갔다.
좋아.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한 직후부터 훌륭한 연기를 하는구나.
돌아가서 심하게 나무라려고 했는데 봐준다.
“세화는 왜 저래요? 박사님과 싸웠나...?”
당황해하는 유리아의 물음에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박사님과 싸운 건 아니고, 저랑 크게 다퉜네요. 연구실엔 언제 도착하셨죠?”
“마물이 죽은 직후에요. 그나저나 다투셨다고요...?”
“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만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건 타이라트가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는 방증이니까... 유리아 씨도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해요.”
“준비라면...”
“디바이스. 아시죠? 세화에게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서요. 근데 아직까지 충전이 안 됐다면...”
유리아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타이라트를 물리치고는 싶은데, 아이테르의 특성 때문에 짜증이라도 난 모양이다.
“재촉하고 싶진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네요.”
“네... 최대한 빨리 충전할게요. 그리고... 지혁 씨.”
“예?”
“세화를 사랑하죠?”
“그야 당연합니다.”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나서 지혁 씨가 3년 동안 곤히 잠만 잤는데, 일어나 보니 세화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내게 이런 조언을 구한다? 흠... 이건 예상 못했는데.
내가 턱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유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다툰 상황에선 조금 별로였던 질문이었나요? 미안해요.”
“그건 아닙니다. 재미있는 질문이라 고민을 한 거에요. 기억은 나중에 돌아오는 겁니까? 아니면 영구히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후자라고 생각해주세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군.
좋아.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서 죄의식을 조금 희석시켜주지.
“접근할 거에요. 다시 새로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
“만약 그 사이에 세화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요?”
반지를 신경 쓰는구나.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렇게 되면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야죠.”
“더 적극적으로?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요?”
“사람이 다 그렇죠 뭐. 뜨겁게 사랑한 사이였는데 한순간에 파탄이 나고, 애인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 전 눈 뜨고 볼 생각 없습니다.”
“.... 그렇군요.”
“헌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유리아가 자신의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 같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답변 고마웠어요.”
“도움이 됐나요?”
“상당히요.”
“다행이네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세화랑 잘 화해했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연구실을 나갔다.
디바이스 충전에 대한 강박을 다시 심어준 기념으로 실험을 하나 해봐야겠다.
배덕감이라는 조미료를 뿌려줄 테니까 오늘 새벽을 기대해라, 유리아야.
내가 많이 슬퍼할 건데, 위로해줄 준비하고.
김태곤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편의점에서 도수가 높은 술들을 싸그리 긁어모았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