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1 유리아 공략개시 #2
“아론... 그가 지구에 있다구요?”
떨려오는 유리아의 입술.
연분홍색 립스틱이 몹시 어울린다.
침이 바짝 마르지? 마음이 조급해지고 그럴 거다.
“그래. 지구에 있다. 어디 있는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조만간 알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마. 음... 아비가 된 입장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아론이라면 네가 그 디바이스를 충전하는데 부담이 없을 게다.”
“아론...!”
애처로워진 목소리.
어지간히 사랑했나보구나. 보수적인 왕국의 법이 내겐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진다.
“진정하거라.”
다소 엄한 내 말투에 유리아의 떨림이 멎어갔다.
하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만큼은 진정시킬 수 없었는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한다.
“후우... 후...”
난 인내심을 가지고 유리아를 기다려주었다.
얼마 후, 마지막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유리아가 간절한 눈으로 묻는다.
“곧... 아론을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리 되리라고 장담하마.”
“아론은... 절 기억할까요?”
“모르겠구나. 나처럼 환생이 잘 이루어졌다면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뒷말은 너도 예상하고 있겠지?
“영영 모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로군요...”
“.... 그래.”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아론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든 제가 꼭 되찾아올 테니까.”
의지가 느껴지는군. 열심히 해봐라.
유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스타로트가 죽은 이후 타이라트가 경각심을 가졌는지 숨어만 있어요. 마물이 통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러다 큰일이 나는 거 아니겠죠?”
세간에서도 이걸 의아해하는 중이었다.
벌써부터 외계인이 물러났다느니, 비스트 슬레이어와 세계연합의 승리라느니 뭐니 하며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겁대가리 없는 것들... 일부러 봐주고 있는 줄도 모르고...
“타이라트는 음흉한 놈이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아버지께선 항상 혜안이 있으셨죠. 그럴 거에요. 그런데...”
“그런데?”
“디... 바이스가 문제에요. 충전은 해야겠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아론을 빨리 찾는다 해도, 만약 그가 아무런 기억을 못하고 있다면 제게 마음이 생길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뭐래. 너 같은 여자가 접근하면 모든 남자들이 홀라당 넘어가겠지.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난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유리아를 한 번 떠보기로 했다.
“확실히 문제긴 하구나. 정말 급하다면 그... 송지혁 씨는 어떠냐?”
“네?”
흠칫 놀라 고개를 드는 유리아.
그녀의 얇고 긴 눈썹이 찌푸려진다.
그 정도로 싫어? 아니잖아.
“아버지는 제가 아론을 두고 다른 사람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하실 거라 생각하세요? 게다가 송지혁 씨는 제 동료인 세화와 사귀고 있다구요.”
“디바이스 충전방식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좋아하는 마음이잖느냐. 정말 네가 타이라트를 없애고 이 행성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싶다면...”
“전 송지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할 생각도 없고요. 물론 유능한 동료라고는 생각하고 있긴 한데, 이건 세화에 대한 배신이에요.”
세화도 이해했는데 좀 봐줘라.
“알았다. 그나저나 흐음... 좋아하는 마음이라...”
말끝을 흐린 내가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리아가 입을 살짝 벌리고 어깨를 위로 당겨 올렸다.
행동거지를 보니 어이를 상실한 것 같다.
“아버지... 설마...”
경악하는 유리아.
반응을 보니 앞날이 훤히 보이는구나. 처녀를 가져가려면 고생을 좀 해야겠어.
“왜 그러는 게야?”
태연한 내 물음에 유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사실 네가 생각하고 있던 그게 맞는데.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아버지를 연구실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내가 연구실에 있어봐야 짐덩이밖에 더 되겠느냐? 난 기존에 하던 사업이나 계속할 생각이란다. 그래야 그 연구실이라는 곳에 지원도 좀 해주고 하지.”
“연구실 돈은 많아요. 송지혁 씨가 회사의 자금을 당겨왔거든요.”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느냐. 마침 이것도 인연이겠다... 송지혁 씨와 한 번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어.”
그 말에 유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여기에 완전히 적응하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김태곤의 기억이 오롯이 있어서 적응이 어렵진 않더구나.”
“다행이에요. 그리고 아버지, 서울로... 이사 오시면 안 될까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기억을 되찾은 내가 너와 떨어져있어서야 되겠느냐? 집을 하나 구할 테니 너도 호텔에서 나와 들어올 준비를 하거라.”
유리아의 안색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아졌다.
“네, 아버지.”
이제부터 육아... 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이 숙녀를 돌봐줄 시간이군.
유리아는 간단하게만 보자면 세화보다 어려운 여자였다.
세화보다 고작 한 살밖에 많지 않은데 비극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제 앞가림도 잘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나는 유리아의 공략이 세화보다 쉽다고 봤다.
처음엔 덤벙대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면서 엄한 아버지라는 껍질을 서서히 벗겨가는 거다.
유리아가 날 편하게 생각할 수 있게끔.
그리고 간단한 마물들을 내보내며 세화 혼자 막도록 만들고, 유리아에게 디바이스를 충전해야한다는 강박을 되새겨주자.
초반 계획을 정리한 내가 말했다.
“며칠간은 여기 있어라.”
“아버지는요?”
“집을 한 번 알아볼 생각이다.”
“같이 가요.”
“어리광을 피울 나이는 지났잖니. 아비 걱정은 말아라.”
유리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오랜만에 본 아빠의 말에 반박하기는 싫지?
“.... 알겠어요.”
**
기지로 돌아온 나는 세화가 성을 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지금 내가 유리아와 함께 살겠다고 말하니 화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게 따지지는 못하겠고, 가만히 화를 삭이자니 안 되고...
때문에 애꿎은 C급 마물 하나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사자의 모습을 한 거대한 마물이었는데, C급인만큼 비스트 슬레이어를 빼면 지구에 적수가 없는 놈이고, 공격적이기도 한 놈이다.
하지만 세화의 악의에 기가 죽은 녀석은 그워어엉! 하고 울부짖기만 할뿐, 그녀에게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죽어! 죽엇!”
콰직! 콰직!
긴 손톱으로 마물의 온몸을 난도질하는 그녀.
그 모습이 귀여웠던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동안 놈을 괴롭히던 세화는, 피투성이가 된 마물의 엉덩이를 걷어차 철창으로 보내고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다시 한 번 생각해주세요...!”
“화가 난 건 이해한다. 허나 필요한 일이지. 내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일. 이블 발키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마법의 단어다.
세화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나는 내 옷으로 세화의 손에 묻은 피를 깨끗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러니 세화가 누그러진 말투로 날 말리려고 한다.
“.... 주인님... 옷이 더러워져요... 제가 그냥 마법으로...”
“시끄럽다.”
잘 닦이지 않는 끈적한 마물의 피.
세화를 번쩍 안아든 나는 화장실로 가 수돗물을 틀었고, 세화의 손을 천천히 씻겨주기 시작했다.
“아...!”
그러자 야릇한 콧바람을 내뱉은 세화.
씨익 웃은 내가 물었다.
“예전 생각이 난 모양이지?”
“네에...”
이때가 분명... 유승현이 길거리에서 레오나의 이름을 들먹인 이후, 세화가 놈의 뺨을 후려치고 엉엉 울었을 때다.
벽에 긁혀 상처가 난 그녀의 손을 씻겨주다 엄살을 받아준 것도 기억이 난다.
어리광을 거듭 부리던 네가 지금 이렇게 변하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구나.
물론 지금도 어리광을 부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아이테르도 찾아야 하고, 네 무기를 만들고 슈트도 개량해줘야 하니 매일 유리아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차 나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자주 비울 테고, 그때 널 만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변명할 필요도 없지만 세화를 생각해서 해줬다.
그녀도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럼 됐어요...”
“화가 좀 풀렸나?”
“네...”
난 그녀의 연보라색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곤 송지혁으로 변신해 그의 말투를 사용했다.
“심심하면 네가 좋아하는 떡볶이라도 먹을까?”
“앗...!”
녹아내린 표정을 보니 무척 좋아하는구나.
그럴 줄 알았지. 기지 밖에선 이렇게 해야겠다.
“조만간 방금 네가 신나게 패죽이던 마물을 내보낼게. 그러니까 잘 처리해. 알았지?”
“응... 아, 네! 주인님...!”
저도 모르게 반말을 해서인지 화들짝 놀라는 세화.
낄낄대던 내가 오피스텔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당부하겠지만 기지 밖에선 평소의 네 모습을 보여줘야 해. 변신할 때도 마찬가지고.”
“아... 알아요...”
“가자. 늦었다.”
“네...”
**
이틀 뒤, 내 소유의 오피스텔에서 두 블록 떨어진 아파트.
삐빅! 덜컥!
도어락이 해제되며 열리는 문.
우리가 살 집의 내부를 살펴본 유리아가 감탄을 터뜨린다.
“와... 빨리 구한 것치고는 집이 상당히... 좋네요? 두 명이서 살기엔 조금 큰 것 같지만요.”
“나름 고심해서 골랐단다. 네 방은 저쪽이다.”
화장실 옆에 닫혀있는 방을 가리키니, 유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말을 이었다.
“구경이라도 한 번 해봐라.”
“구경이요? 가구도 없을 텐데?”
“기본적인 것들은 다 들여놓았다. 필요한 건 네가 따로 사고.”
“흐응... 그래요?”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본 유리아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감이 서려있던 눈이 순식간에 와장창 구겨졌다.
“이... 이게 대체...”
온통 핑크빛으로 둘러싸인 방 안.
침대도, 이불과 베개도, 책상도, 옷장도 전부 분홍색이었다.
어때? 내 센스가. 정말 끔찍하지 않냐?
약간 모자라 보이지?
“아버지...! 이게 뭐에요?”
“별로니?”
“별로가 아니라 너무 끔찍한...”
언성을 높이려던 유리아가 흠칫했다.
내 표정에 드리운 그림자를 봤기 때문.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라요...”
“왕녀로서의 품위를 유지시키고자 어렸을 때부터 널 엄하게 키워왔다. 네가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이 아빠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특별히 신경을 써봤어.
여자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방으로.
얼른 고맙다고 말해.
“.... 감사해요.”
그래야 내 딸답지.
“따로 시간을 내서 네가 바꿔보아라.”
“아니, 아니에요. 그냥... 이대로 쓸게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난 정말 괜찮다만...”
“저도 정말 괜찮아요.”
“정 그렇다면 알았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마.”
유리아의 얼굴이 바짝 긴장한 듯 빨개진다.
몸은 가만히 있질 못했으며,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그러는 거지?
네 예상이 맞단다.
“운명의 장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우릴 돕는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나와 함께 나갈 데가 있다. 아론이 이 근처에 있는 게 느껴져.”
그 말에 유리아가 신발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자신의 플랫 슈즈를 신었다.
그리고는 날 바라본다.
얼른 안 오고 뭐하냐는 표정.
헛웃음을 켠 내가 그녀의 곁으로 가며 생각했다.
내가 만든 상황은 하나씩 잘라서 따지고 보면 자연스럽지만, 붙여놓으면 너무 작위적이다.
생각해보라. 환생한 아버지가 딸을 한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딸의 피앙세였던 사람도 환생하여 한국에 있다?
심지어 그 피앙세는 세화의 남자친구.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일이다.
다행인 점은, 유리아는 날 철석같이 믿는 상태에다 유승현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점.
세화와 사귀었었다는 정보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무척 쫄깃하구나.
최대한 들키지 않는 쪽으로, 베스트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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