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4 번민하는 세화 #4
실험실 안엔 사내 몇 명이 죽어있었다.
그냥 죽어있는 게 아니라 눈이 튀어나오거나, 피부가 검게 변한 상태거나, 아니면 팔이 기이할 정도로 굵어져있는 상태로.
레오나는 시체들에게서 마물들의 기운을 느끼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 그녀가 물었다.
“이게 무슨... 일... 대체 왜...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정색한 얼굴을 고수하던 나는 레오나의 머리에 착용한 통신기를 벗기고 그것을 껐다.
“네가 지키고자하는 인간들이 벌인 짓이야. 따라와.”
난 레오나의 팔을 잡아끌고 다른 실험실 문을 열었다.
거기는 더 심했다.
온몸이 녹아내려 얼굴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있었고, 심지어는 말머리를 꿰매 붙인 듯 한, 소형 암두시아스를 만들려고 했던 시체까지 존재했다.
레오나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 아니야... 아니라구... 이건... 이건 잘못됐어...!”
난 실험실 안의 서류를 집어 들고 레오나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하단에 독수리 모양의 표식을 가리켰다.
“네 말대로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 이게 뭔 줄 알아? 시리아 정부의 국장이야. 정부가 테러리스트를 키우고 있다는 뜻이지.”
“거,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맞아. 이 서류가 뭔지는 나도 모르거든.
근데 넌 내 말을 철석같이 믿잖아?
“거짓말이 아니야. 나도 여기 와서 믿기지 않았어. 내가 잡혀있을 때, 군인들의 보호를 받던 사람 한 명이 여기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더라. 그놈은 세계연합의 시리아 측 사람이었어. 확실해.”
“.....”
입을 앙다문 레오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현재 레오나는 인간들을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살아있는 상태다.
여기서 범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인간들이 이런 인륜을 져버린 짓을 벌였다는 걸 안다면 침식되는 속도가 무척 빨라질 터였다.
그리고 나의 이런 예상은 적중했다.
스으으...!
레오나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존에 봐왔던 것과는 달리, 지금 레오나에게서 나오는 악의는 일반인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짙었다.
“하아... 하아아...”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하는 그녀가 양손을 교차해 자신의 몸을 감싼다.
가슴이 답답하지? 몸에서 넘실거리는 악의 때문에 정신도 못 차리겠고.
이 틈을 탄 나는 목소리를 증폭했다.
레오나의 머릿속에 내 말이 똑똑히 들어가도록 말이다.
“인간들은 원래 이래. 상종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
“흐윽...! 흐아아아...!”
부정하려는 듯 몸을 뒤트는 레오나.
뜨뜻미지근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번민하며 버둥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차라리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마물들이 더 낫다고 봐.”
“아니... 아니야앗...!”
“아니라고?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인류를 구원해주는 널 보고 인간들이 뭐라고 했지? 어떤 국가와 뒷거래를 했다고 했잖아. 그 때문에 일부러 오지 않는 거라고도 했고.”
“그, 그거언...!”
“익명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널 비난하거나 희롱하고, 위선이라는 가면을 쓴 채 착한 척을 하면서, 뒤에선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었지.”
“아아아악!”
레오나가 머리를 감싸 쥐며 얼굴을 마구 흔든다.
부정하려고 하지 마. 순응해.
“이런 놈들을 지켜줄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없는 편이 세계평화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
“.....”
“지금까지 네가 해왔던 일들은 모두 쓸모가 없었던 거야.”
화아악!
레오나의 몸을 감싼 악의가 훨씬 짙어졌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것이 이젠 넘실거리고 있다.
겉으론 틀리다고 말하지만, 내 말에 공감하며 인간들을 증오하기 시작한다는 증거다.
“캐시 박사도 똑같아. 널 이용해먹으려고 했지. 마물들을 물리치느라 몸도 마음도 힘든데 범죄자까지 처리하라고 했었잖아. 유승현도 마찬가지야. 말로는 널 사랑한다면서 트윙클을 보고 자위나 해대는 병신이지. 자기만족을 위해 레오나의 이름을 들먹이는 쓰레기라고. 세상엔 널 진정으로 위해주는 사람이 없어.”
“흐으으윽... 괴로워...! 너무... 슬퍼어...!”
“마왕 타이라트는 이런 흉악한 인간들의 속내를 알아차렸겠지. 그래서 지구로 마물을 보내는 거고. 어쩌면 그는 너와 싸우길 원치 않을지도 몰라. 아니, 원치 않는다고 확신해.”
레오나가 고개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 표정. 그녀가 힘겹게 물었다.
“저엉... 마알...?”
“그래. 오히려 너와 같은 편에 서서 이기적이고 추악한,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 할 걸? 이렇게 말이야.”
난 총을 들고 기절해있는 연구원 한 명의 머리에 겨눴다.
그리고...
탕!
방아쇠를 당겨 그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본래라면 날 말려야할 레오나는, 그저 괴로워하며 내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아니,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희미하게나마 통쾌한 얼굴을 지었다.
추악한 일을 저지른 인간이 뒈지자 시원한 감정을 느낀 듯했다.
“저번에 아스타로트가 무릎을 꿇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고 했지?”
“마... 마자아... 기분... 조았...”
“그 마물들의 목적과 네 목적이 같아서 그래.”
“목적... 내 목저억... 마물들의...”
점점 이지를 잃어가는 레오나.
푸화악!
악의가 복도 전체를 감싼다.
이 지하시설을 가득 채운 거뭇한 내 기운이 다시금 세화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스스스...
그러자 레오나의 겉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밝은 하늘색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끝부분부터 연보라색으로 칠해지고, 이내 온 머리카락을 감싼다.
저번처럼 홍채가 보라색으로 물들고,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지면서 가로 부분이 좁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매도 살짝 치켜 올라가 조금 매섭게 바뀌었다.
마르셀라만큼 길진 않지만 날카로워진 손톱이 장갑을 뚫고 일부 튀어나왔다.
살색 피부가 더 하얘지며 하복부에 자리한 음문이 시뻘겋게 빛난다.
“하아아아악...!”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세운 레오나는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비명을 내질렀다.
시선은 날 향해있다.
구원을 내려달라는 듯 한 간절한 눈빛.
레오나의 머리맡으로 걸어간 내가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널 속이려 하는 그런 인간들 틈에서, 유일하게 널 사랑하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 너어... 너야아... 지혁이... 송지혀억...”
“맞아.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송지혁이지.”
레오나의 얼굴이 몽롱하게 변한다.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나에 대한 사랑만큼은 제대로 느끼는 중이라는 방증이었다.
여기서 충성심을 더 증폭시켜놓자.
“마... 자아... 지혁이느은... 나만을... 위해애...”
“날 제외한 인간들은 다 널 이용하려는 쓰레기들뿐이야. 재활용도 못하는 쓰레기.”
“흐으윽...! 흐으으윽...!”
흐느끼기 시작하는 레오나.
더 해야 한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밀어붙여야 해.
“나는 네게 옳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야. 내 말만 따르면 네가 이렇게 고통 받을 일도 없어. 다른 인간들의 현혹에 넘어가지 말고 오직 내 말만 믿어. 넌 그래야 돼.”
“지혁이... 말마안... 믿어야대애...”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레오나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준 내가 말을 이었다.
“내게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영혼까지도 전부 바쳐. 내게 충성을 다해. 그러면 편해져.”
“.... 흐으읏...! 전부... 전부 바쳐야대... 그러며언... 편해져어...”
“사랑해.”
“하아악...♡”
간드러지는 교성을 내뱉은 레오나.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몸 안으로 순식간에 죄다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레오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쳤다.
바로 그 때, 내 뒤에서 포탈이 열리더니 마르셀라가 나왔다.
중요부위만 간신히 가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누가 봐도 매혹적인 몽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한 채였다.
그 뒤로 여러 마물들이 튀어나와 자리를 채워 원을 만들었다.
선두에 선 마르셀라는 멍하니 자신을 보는 레오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그러고선 내게로 몸을 돌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타이라트 님께 영원한 충성을...”
그러자 마물들 모두 마르셀라와 똑같은 행동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레오나가 의아해한다.
“타이... 라트...? 지혁이가아...?”
마르셀라는 레오나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로 몸을 돌려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예를 취했다.
“레오나 왕비님께 영원한 충성을 바치어요.”
마물들 또한 방금처럼 레오나를 향해 복종을 표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자신의 얼굴을 감싼 레오나가 혼란스러워한다.
마물들이 충성을 바치니 기쁘기도 하고, 성질이 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한 모양이다.
마르셀라와 마물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인 나를 바라보았다.
답을 갈구하는 얼굴. 나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현실로 꺼내고 싶은 달콤한 꿈을.”
“.... 꾸움... 달콤해애...”
“송지혁은 네 주인인 마왕 타이라트야. 인간들에게서부터 널 구원해주기 위해 내려온 구원자.”
“지혁이... 타이라트... 내 주이인... 날... 구원해줘써어...”
“마음이 아플 때마다 나를 떠올리고, 내게 복종해. 내가 원하는 것이 곧 네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후아아... 네에에...”
눈이 완전히 풀린 레오나.
나는 마르셀라에게 손짓해 그녀와 마물들을 기지로 돌려보냈다.
레오나에게 다가간 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휘청거리는 레오나를 부축한 나는, 그녀가 꽉 쥐고 있는 팔을 잡고 움직였다.
그리곤 혼절해있는 다른 연구원의 목을 지그시 베었다.
스으윽...
부드럽게 살점을 파고들어가는 검.
흠칫한 레오나가 팔을 빼냈지만, 내가 꿈이라고 말한 것을 상기했는지 곧 내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나는 레오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연구원의 목을 완전히 잘라냈다.
서거억...!
뼈까지 멀끔하게 베어지면서 몸과 분리된 연구원의 머리.
레오나가 몸서리를 쳤다.
인간을 죽였다는 배덕감 때문에 죄책감이 들었겠지만, 쾌감도 느낀 게 분명하다.
몸에 힘을 빼고 아래가 살짝 젖어오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레오나의 몸을 내 쪽으로 돌린 내가 방긋 웃었다.
“기분이 어때?”
축 늘어뜨린 몸으로, 그녀가 답한다.
“시러어... 기분 나빠아아...”
“솔직하게 말해야지.”
짤그랑!
검을 떨어뜨린 레오나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과 목, 가슴을 순서대로 만지작거렸다.
끈적한 손길이었다.
마치 스스로 애무라도 하는 듯 한.
슈트의 봉긋한 가슴 윗부분이 꾹 눌리는 게 너무나도 관능적으로 보인다.
“.... 조아아... 기분 죠아요...♡”
“기분 좋아? 이런 기분 좋은 일을 누가 알려줬지?”
“지혁이... 타이라트... 니임... 주힌니임... 하아앙...♡ 이거... 주인님이... 알려줘써...”
“맞아. 이 기분을 기억해. 알았지?”
“네혜에...♡”
“착하다. 이제 변신을 풀어. 그리고 한숨 자. 자고 일어나면 상쾌할 거야.”
그 말에 안심한 레오나는 즉시 변신을 풀고 세화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이내 내 품으로 쓰러진다.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어보니 제대로 잠들었다.
세화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우웅!
그러니 포탈이 열리면서 마르셀라가 다시 튀어나왔다.
“경축드리옵니다, 마왕님. 드디어 레오나를...”
“축하하기엔 이르다. 아직 아이테르는 전부 침식되지 않았으니까.”
“네.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 떠돌고 있는 박사를 데리고 돌아가야겠다. 여기 있는 모든 놈들을 남김없이 없애놓아라. 그리고 남극기지의 방을 하나 비워놓도록. 조만간 세화와 들르마.”
“알겠습니다.”
세화를 안아들은 나는 천천히 지하시설을 벗어났다.
지금은 조각난 레오나의 정신 사이사이에 내 존재를 각인시켜놓은 것밖엔 되지 않는다.
깨어나면 꿈을 꿨다고 생각할 테지.
이제 마지막 공정으로 조립을 끝내놓으면... 레오나는 영원히 내 것이다.
후덥지근한 햇볕을 온몸으로 느낀 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꿈 꿔라, 세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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