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번민하는 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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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테일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세화는 오늘 자신이 입은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흰색 오프숄더 러플 탑, 검은색 브라끈을 보여주면서 섹시함을 어필했고, 하늘색 서클 스커트 귀여움까지 포인트를...
‘에휴...’
이러한 생각을 하던 세화가 한숨을 내쉬며 픽 웃었다.
제대로, 진짜 데이트를 하듯 만나라는 지혁의 명령에 그렇게 했는데, 이건 승현에게 있어 너무 큰 포상 아닌가?
지금까지 이렇게 잘 차려입고 승현을 만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흰색 스니커즈 앞부분으로 땅을 툭툭 건드리며 승현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두 옅은 화장을 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지나쳤다.
대부분은 남자였지만, 여자도 더러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예쁜 건 잘 알고 있었다.
승현과 있을 땐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혁과 있을 때부터 신경을 쓰게 됐다.
지금 입은 옷들도 다 지혁이 좋아하는 코디였다.
물론 승현도 좋아하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일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세화는, 멀찍이서 승현이 가볍게 뛰어오고 있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승현아! 여기야!”
그러다가 표정을 조금 구겼다.
승현의 코디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박시한 검은 티셔츠는 뱃살을 가리기 위한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바지는 5년 전부터 진득하게 입어왔던 데님 팬츠.
너무 많이 빨아서 색이 연해져 원래 그 색처럼 보이는 건 다행이었다.
저 옷들을 지혁이 입었다면 어울렸겠지.
속으로 꿍얼거린 세화는 잠자코 승현을 기다렸다.
“세화야! 어... 오늘 웬일이야? 옷이 엄청 과감하네...?”
가까이 다가온 승현이 세화 자신의 코디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투블럭. 약속시간에 맞춰 자르고 왔는지 귓볼 근처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다.
헛웃음을 켠 세화가 왼손으로 승현의 어깨를 털어주자, 그가 무척 기뻐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여자친구가 챙겨주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모양.
“그냥... 잘 보이려고 입어봤어. 어때?”
“엄청 예쁘다. 진짜로...”
“오늘 뭐할 거야?”
“그... 이번에 잠실에 놀이공원 하나 더 생겼잖아. 거기 갈래?”
“뭐야... 놀이공원 갈 거면 어제 미리 말하던가. 그럼 치마 안 입었지.”
승현이 아차 하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아... 내 생각이 짧았네.”
“티켓은 미리 사놓은 거 아니지?”
“안 샀어. 그냥 얘기만 해본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는 게 보인다.
미리 사놨구나.
예전이었다면 저런 모습마저도 귀엽게 생각했을 텐데... 지혁과 만난 이후 승현이 뭘 하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세화였다.
‘아냐... 재미있게 놀면 되지 뭐.’
머리를 털어 상념을 날려버린 세화는 승현에게 손바닥을 폈다.
“미리 사놓은 거 다 알아. 줘봐.”
그러자 승현이 힘없이 웃더니 뒷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 세화의 손에 올려놓았다.
“역시 잘 아네.”
“잘 알 수밖에 없지... 멍청아.”
진심 반, 장난 반이 섞인 타박을 하고 티켓을 바라보니, 풀타임 자유이용권이었다.
그러고 보니 승현과 놀이공원을 안 간지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처음이었던가? 성인도 됐겠다... 야간 공연도 보고 하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제 지혁이 했던 말처럼.
“환불도 안 되네. 돈 아까우니까 그냥 여기 가자.”
“저, 정말 괜찮겠어? 치마는 어떡하려고?”
세화는 손가락으로 근처의 아울렛을 가리켰다.
“저기서 바지 하나 사서 입고 가지 뭐. 치마 때문에 놀이기구 몇 개 못 타면 좀 그렇잖아.”
“미안해. 진짜 미안. 앞으로는 어디 갈지 미리 말할게.”
“응.”
아울렛으로 움직인 두 사람.
세화는 대충 치마와 똑같은 색의 7부 바지를 하나 사고 탈의실에서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지혁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승현이랑 만났어. 놀이공원 간다?]
옷을 다 입는 동안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세화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탈의실에서 나와 승현에게 말했다.
“플라잉 택시타고 가자. 주말이라 지하철에 사람들 많을 거야. 내가 낼게.”
“너무 비싼데... 아니, 아니야. 그냥 플라잉 택시타자.”
반대할 거면 반대하던가, 아니면 잠자코 가던가.
저렇게 사족을 붙이는 모습이 조금 짜증났다.
욱한 세화가 따지려고 했으나, 오늘은 즐거운 데이트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재미있게... 최대한 커플처럼 놀아야겠다.
그 뒤 지혁이 질투가 날 정도로 즐거운 듯 보고해야지.
‘히히...’
지혁의 반응을 예상해보고 속으로 웃은 세화가 승현에게 스리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승현이 냅다 손을 맞잡고 깍지를 껴왔다.
축축한 느낌이 싫었지만 뭐... 옛 생각을 하니 버틸 만했다.
그렇게 아울렛을 떠나 플라잉 택시 정거장으로 가고 있는데, 승현이 세화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손톱은 계속 칠하는 거야?”
“응. 왜?”
“아냐. 다른 색으로 칠할 마음은 없나 해서.”
“없어. 난 빨간색이 좋아.”
“나도 좋아. 잘 어울려. 근데...”
승현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세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아... 그... 잠깐 손 줘볼래?”
“손은 왜?”
“잠깐만...”
승현은 세화의 손을 잡고 손목 부근을 유심히 보았다.
심지어는 만져보면서 무언가 이상이 없나 확인해보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승현의 행동을 보던 세화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저건 분명 구속 플레이를 했던 ‘아침이’의 손목에 상처가 있나 없나 보는 행동.
절로 침이 삼켜지면서 식은땀이 흘렸다.
긴장해서 그런 게 아니라, 흥분해서 그런 것이다.
승현은 ‘아침이’인 자신과 ‘저녁이’인 지혁의 SM 플레이를 봤다.
그리고...
‘날 의심하고 있어...’
세화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영상의 대화를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남자친구에게 대딸 한 번을 쳐줬다는 대화.
또 손톱 색깔도 빨간색으로 같아서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아니, 의심과 불안이었다.
혹시나 ‘아침이’가 세화 자신이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
하지만 승현은 그런 의심과 불안을 접을 것이다.
세화 자신은 그의 앞에선 조신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으니까,
오나홀로 대딸을 쳐줬을 때도 무석 서툰 듯 행동했었으니까.
“왜 그래? 왜 손목을 빤히 바라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승현은 이내 안도의 한숨인지 뭔지 모를 숨을 내뱉고는 다시 손을 잡아왔다.
세화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아침이’인 것을 은근슬쩍 티내고 싶다고.
그러자 방금의 그 흥분이 더 강해졌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마침 플라잉 택시가 도착한 상황.
목적지를 입력한 세화는 공중으로 붕 뜨기 시작하는 택시 안에서 밖을 바라보다가 승현을 불렀다.
“승현아.”
“응?”
“너는... 무슨 플레이를 좋아해?”
“프, 플레이라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응... 나중에... 우리 같이 그... 거 할 때...”
부끄럼 가득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니, 승현의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세화야, 네 마음은 정말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그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우리가... 그... 결혼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일단... 말이라도 해봐. 어떤 게 좋은지.”
“난...”
승현이 시선을 택시 천장으로 올렸다.
세화는 그런 승현을 보고, 그가 ‘아침이와 저녁이’의 플레이를 생각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난 그냥 부드럽게...”
“부드럽게...? 막... 거칠게 하는 건 안 좋아해?”
이에 승현이 눈썹을 꿈틀했다.
‘아침이와 저녁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좋아하는데... 처음엔 평범한 플레이가 좋다고 생각해.”
평범한 플레이...? 오늘 돌아가면 지혁에게 사랑스런 섹스를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세화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 알았어... 접수...”
“접수? 하하하!”
빵 터진 승현이 한참 대소를 터뜨리다 세화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때, 세화가 버럭 성을 냈다.
“아! 뭐해!”
손과 포옹만 허용해줬는데도 갑작스럽게 뽀뽀를 받으니 당황스럽기도 했고, 지혁 외의 다른 남자에게 그런 애정표현을 당하니 무척 짜증났다.
승현이 움찔한다.
“아... 미안... 근데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앞머리 망가지잖아! 이거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래...? 예전엔 스타일 같은 거 신경 안 쓰더니...”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데 싫어? 싫으면 옛날처럼 구질구질하게 입고 나올게! 됐냐!?”
“아니... 절대 구질구질하지 않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아... 진짜... 됐어. 앞으론 그런 거 하려면 허락 받고 해.”
그 말에 승현이 방긋 웃는다.
그 모습이 더없이 한심해 보이는 세화였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아니, 승현만 재미있었지 세화는 지혁 걱정을 하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쁘다고는 해도 이때쯤이면 답장을 해야 할 텐데...
‘설마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세화는 틈틈이 화장실에 가서 지혁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거나 했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왜 이래 진짜!”
묵묵부답인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온갖 짜증을 내니, 화장실 안에 있던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엄마야...! 조용히 해요!”
젊은 여자의 타박.
세화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신경 꺼요.”
“하... 어이없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가다듬은 세화가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승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묻는다.
“속이 많이 안 좋아? 화장실을 자주 가네?”
“아니... 놀이기구 타느라 긴장해서...”
“방금 롤러코스터가 무섭긴 했지. 그런데... 세화야.”
“응?”
“고맙다.”
“뭐가?”
“여기 사람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네 덕분이잖아.”
세화가 눈썹을 구겼다.
“조용히 해. 사람들 많은데서 언급하지 말라니까...”
“작게 말했어. 게다가 언급하지도 않았고. 그냥 고맙다고 했을 뿐이야. 꼭 말해주고 싶었어.”
“하아... 그래... 스티커 사진이나 찍으러 가자. 머리 더 망가지기 전에 기념으로...”
“응.”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진 채 스티커 사진을 찍었다.
효과까지 빵빵하게 넣은 사진을 신중하게 고른 뒤 카운터에 가서 오리고, 서로의 지갑에 넣을 때쯤... 세화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캐시 박사였다.
세화가 승현에게 말했다.
“잠깐만... 나 그 업무전화.”
“아, 그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후다닥 달려간 세화가 전화를 받았다.
“네, 박사님.”
-세화야! 너 지금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 게이트라도 열렸나 싶다.
세화가 곧바로 대답했다.
“저 지금 잠실 놀이공원인데... 왜요? 설마 마물...”
-아니, 게이트는 안 열렸어. 근데 쏭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세화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지, 지혁이가 왜요? 회사 간다고 했는데...?”
-회사...? 아... 네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혼자 움직인 거네. 이 멍청한 자식...!
“무슨 소리에요? 제발 알아듣게 설명해줘요.”
-지금 당장 잠실로 갈 테니까 밖으로 나와 있어. 당장!
“아, 네!”
전화를 끊은 세화는 지혁의 걱정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참아내며 승현에게 다가갔다.
“승현아, 나 지금 나가봐야 돼.”
“왜? 설마 그 괴...”
“몰라. 박사님이 당장 나오래. 나 이만 갈게.”
말을 마친 세화가 입구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하는 세화를 멍하니 바라보던 승현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가,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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