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번민하는 세화
“왔어? 오른쪽 어깨는 왜 그래? 불편해 보이는데?”
박사의 의아한 물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부딪쳤어요. 의료기기 좀 쓸게요. 멍이 든 것 같아서.”
“알았어.”
“유리아 씨는요?”
“지금 패닉에 빠져선 호텔에 있어. 아이테르의 특성을 듣고 나서... 말이 되냐고 날 다그치려 하더라.”
세화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직접 설명해줄 거라는 표정.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 호텔로 달려갈 것 같았다.
“다녀와.”
“응. 내가 잘 해결하고 올게.”
“그 전에 의료기기에 들어갔다 오고.”
그녀는 핸드스팽 때문에 엉덩이에 멍이 든 상태다.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약해서 일어난 일.
또 손목과 발목에 생긴 찰과상도 치료해야 했다.
쑥쓰러운 듯 고개를 숙인 세화는, 의료기기에서 치료를 받고 연구실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사가 피식 웃는다.
“그래도 세화가 유리아와 친해서 다행이네. 근데 세화 어디 다쳤니? 의료기기엔 왜 들어갔다 와?”
“매일 하는 건강검진이죠 뭐. 근데 오늘은 안경을 쓰셨네요? 장비 개발이라도 하고 계셨어요?”
“아니. 그냥 껴보고 있었어. 새로 하나 맞췄거든.”
확실히 안경의 디자인이 달라져 있었다.
무테안경에서, 알이 좁은 검은색 뿔테안경으로.
미모를 가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것도 뭐, 적당히 어울리네.
“예쁘세요.”
그 말에 박사가 질색한다.
구역질 시늉을 한 그녀가 날 나무랐다.
“사탕발림은 그만해줄래? 요즘 너 왜이래? 드디어 미쳐버린 거야?”
“아니, 솔직하게 말했는데 왜 그래요? 못생겼다고 하면 때릴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 모르겠다. 유리아가 쓸 무기나 같이 디자인하자.”
고개를 주억거린 난 박사가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모니터엔 이미 기초를 다져놓은 활과 화살통이 있었다.
그렇지, 유리아는 활을 써야해.
“활이네요?”
“자신 있는 분야가 궁술이래서... 너 없을 때 한 번 봤는데 대단하더라. 그래서 익숙한 무기로 만들어주려고.”
“화살은 어떡하시게요?”
“그게 문제야. 폴리머스를 화살로 쓰기엔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다른 물질을 쓰자니 약한 것 같고... 유리아가 마법의 화살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고민이네.”
도와줄게. 딱 알맞은 물질이 있거든.
“나노튜브로 하죠? 배열만 잘 고르면 단단한데다 날카롭기까지 할 텐데. 무게도 얼마 안 나가잖아요.”
박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거 좋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네 말대로 배열만 잘 선택하면 화살로서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겠어. 가격이 문제이긴 한데... 네가 후원해주는 금액이라면 많이 만들고도 남겠어.”
나중에 네가 생각하게 되는 건데, 공로를 빼앗으니 기분이 짜릿하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뿜어내는 기운도 담아낼 수 있을 테고요.”
“그건 너무 억측 아니니?”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레오나의 검도 기운이 담기면 두 배 이상 불어나는데.”
“그렇기는 해. 우리 쏭... 똑똑하네?”
박사의 칭찬에 낄낄거린 내가 물었다.
“유리아 씨의 활동명을 정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그냥 유리아로 하겠대.”
그래야지. 암, 그래야하고 말고.
“아쉽다...”
“아쉽기는... 또 레오나처럼 이상한 닉네임이 나오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지.”
“레오나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거 참... 빡빡하시네.”
“어쨌든 실명을 쓰는 만큼, 레오나처럼 유명해지면 유리아의 일상이 방해받을 수도 있겠어.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막아야 해.”
“예. 같이 힘내봅시다. 뺨은... 어때요?”
내가 박사를 바라보니, 그녀가 은근슬쩍 시선을 내리깐다.
여태까지의 스킨십이 생각났나보지? 왜? 허벅지라도 다시 만져주랴?
“치료했으니까 괜찮아... 근데 너 의료기기 쓴다며? 안 써?”
말 돌리는 거 봐라? 지금은 넘어가주도록 하마.
“아, 그렇죠.”
얼빵하게 허허 웃은 나는 의료실로 들어가 세화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했다.
밖으로 나오니 박사가 화이트보드에 여러 공식을 쓰고 있었다.
나노튜브 배열에 관한 공식이었다.
고생해라. 난 푹 쉴 테니까.
“전 이만 나가볼게요.”
“그래, 쉬어.”
**
유리아가 묵고 있는 호텔 앞.
“푸흡...!”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나와 세화의 트윙클을 확인한 유승현이 대낮부터 오나홀을 들었기 때문.
하긴, 어제 찍은 영상이 개꼴리긴 하지.
그런데 세화가 호텔방에 버리고 간 것을 자취방까지 들고 와 재사용하다니.
너 이제 월급 많이 받잖아? 새로 하나 사라.
후줄근한 옷들도 버리고 패션에 관심 좀 쏟아.
그래서야 유리아가 네게 접근하겠냐?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셔츠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고 있는데, 세화가 정문에서 후다닥 달려와 내게 앵긴다.
“지혁아! 나 다 끝났... 뭐야? 커피 쏟았네?”
“응.”
“왜?”
“뭘 왜야. 먹다 실수했으니까 쏟은 거지. 유리아 씨는 뭐래?”
세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대충 보니 아이테르 이야기를 하며 나와의 성생활도 말한 모양이다.
유리아는 가장 신뢰한다고 할 수 있는 세화가 말한 거라 믿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이야기는 잘 끝났어... 좋아하는 사람 이상이면 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그랬더니?”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 말해.”
“.... 왜 유리아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데?”
표정을 보니 질투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상태다.
내가 태연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젠 우리 동료니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잖아.”
“.....”
“내 말이 맞지?”
“응... 언니가 알아서 해보겠대. 근데 어떻게 알아서 하려는지 모르겠어.”
알아서라? 유리아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단 두 명뿐이다.
한 명은 김태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세화.
아이테르는 좋아하는 ‘이성’과의 성적행위가 아니라, ‘사람’과의 성적행위면 된다.
레즈 플레이로도 충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김태곤은 아비라고 생각하는 중일 테니 곤란해 할 테고, 그럼 남은 사람은 세화인데... 가위치기라도 해보시게?
잠깐... 이거 괜찮네? 김태곤으로 공략하다가, 세화와의 행위로도 디바이스가 충전된다면 송지혁의 모습으로 2:1 플레이를 즐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유승현을 가학적이게 다루면서 김태곤에게 박히고, 그리고 또 송지혁에게도 마음을 주는 유리아.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망국의 왕녀... 아, 지금은 이럴 게 아니지.
일단 수습부터 하고 세화를 먼저 공략해야 하니까 넘어가자.
‘세화부터...’
유리아 공략은 이 이후부터다.
내가 생각한 수습은 유리아와의 연락을 얼마간 완전히 끊어버리는 일이었다.
김태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위장해 유리아를 걱정하도록 만들 거고, 간을 잡을 대로 잡은 이후 그녀에게 연락해 여러 꿈을 꿨다고 조작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세화의 아이테르 침식을 대부분 진행시켜놓을 것이고.
“알아서 하겠다...? 답이 아직 안 나왔네. 그래도 아이테르에 대해서 믿긴 했지?”
“응. 뭐 그런 황당한 힘이 있냐고 하더라.”
“그럴 만도 해. 나도 엄청 놀랐었으니까. 그럼... 순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당분간 방해하지 말자.”
“알았어. 근데 지혁아, 나 배고파...”
“뭐 먹을래?”
“음... 이 근처에 오므라이스 맛집 있대. 아니면 오랜만에 너 좋아하는 돈까스 먹을까? 저기 바로 앞에 일식집 보여.”
나는 세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돈까스 괜찮네. 그걸로 가자.”
“응.”
**
딸칵! 우우웅!
희미한 보랏빛을 내뿜는 디바이스.
눈을 비빈 나는 환희에 가득 차 기지개를 폈다.
완성했다. 타락한 레오나가 입을 슈트를.
이젠 무기만 남은 상태인데... 폴리머스를 모아 낫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냥 낫이 아니라 원초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마어마하게 큰 데스 사이드.
냉랭한 얼굴로 인간들의 목을 따버리는 사신 레오나를 생각하니 절로 불끈거린다.
똑똑!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세화였다.
디바이스 화면을 끈 내가 말했다.
“열어도 돼.”
문을 연 세화가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으며 날 빤히 바라본다.
입술을 연신 핥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 다가와 내 온몸을 만지고 싶은데, 일을 하는 도중이라 간신히 참아내는 모양이다.
“왜?”
“그냥... 심심해서... 아직 안 끝났어?”
“끝났어. 이리와.”
명령이 떨어지자 세화가 후다닥 달려와 살짝 점프하며 내 무릎에 자신의 엉덩이를 올린다.
무릎에 앉던 도중 책상을 건드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영락없는 어린아이. 나는 그녀의 볼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느끼던 세화가 묻는다.
“일하느라 힘들지...?”
“또 그 얘기한다. 안 힘들어. 하루하루가 바빠서 좋아.”
“히히...”
고개를 숙여 세화의 입술을 날름 핥으니,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서렸다.
세화를 번쩍 안아들고 소파로 간 나는, 그녀를 내려놓고 나 또한 누워 불을 껐다.
그러자 세화가 내 품 안으로 쏙 들어온다.
“오늘은 여기서 자려고?”
“시원하고 좋잖아. 에어컨 바람이 아니라 자연의 이런... 그 뭐시냐... 기운도 받아봐야지.”
말을 더듬으니 세화가 까르르 웃는다.
애정 어린 눈으로 내 얼굴만 빤히 주시하는 그녀.
불이 다 꺼져서 어두컴컴한데도 시선이 느껴진다.
사랑이 완전히 무르익었구나. 여태까지의 노력에 제대로 보답을 받은 것 같아 뿌듯하다.
이제 큰 사건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 전에 유승현으로 사전작업을 쳐놔야겠다.
세화의 눈 좀 돌려줘라, 승현아.
“세화야.”
“응?”
“내일 나 회사 일 때문에 늦을 거니까, 유승현 좀 만나고 와.”
“왜? 또 그... 대딸 쳐줘?”
“아니.”
“그럼?”
“그냥 평범한 커플처럼 놀아.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스티커사진도 찍고... 경치 좋은 데 있으면 구경도 하고.”
세화가 의아해했다.
갑작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니 혼란스러운 것 같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유승현과 화해하고 거의 만나질 못했잖아. 만난다고 해도 잠깐일 뿐이고... 대딸도 금방 끝났고. 한 번 재미있게 놀아봐. 손이나 포옹까진 허락해줄 테니까.”
“싫어. 또 짜증날 거 같아.”
“만나보기나 해봐. 유승현은 제대로 반성한 상태잖아. 설마 또 멍청한 짓을 하겠어?”
“음... 그런가?”
“그런 거지. 그러다가 분위기 좋아지면 뭐... 네가 원하는 대로 한발 빼줘도 되고.”
세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흥분한 그녀를 바라보며 킥킥 웃은 내가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꿉친구라고 생각하고 만나봐. 알았지?”
“.... 알았어. 몇 시간?”
“최대한 오래. 늦게 돌아와도 상관없어.”
“최대한 오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러는데?”
“남자친구를 만나라고 하는데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말하네?”
“그래도...”
“가끔 리프레쉬도 필요하잖아. 지금은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해도 막상 만나면 다를 걸?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서 즐길 수 있을 거야.”
내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세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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