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비스트 슬레이어 유리아
유리아의 변신 장면은 내가 봤던 변신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슈트의 디자인은 세화와 거의 흡사.
하늘색이 연두색으로 바뀐 것만 빼면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점은 얼굴과 머리카락.
땋은 연두색 머리카락을 오른쪽 어깨 아래로 내린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변신 전 유리아의 벽안도 연두색으로 바뀌었지만 특유의 고고한 눈매는 그대로.
레오나의 모습이 순한 맛을 한 스푼 넣었다고 한다면, 유리아의 모습은 강단이 넘치는 여기사처럼 보였다.
쇄골 가운데에 위치한 연두색 크리스탈이 무척 어울리는구나. 빨리 내 악의로 물들이고 싶다.
-이... 이건...
통신기를 통해 당황해하는 유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주체할 수가 없지? 지금 당장 인간들에게 피해를 준 아스타로트를 처단하고 싶잖아.
그래도 세화보다는 적응을 잘한 듯하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레오타드를 입어 조금 창피해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키가 커서 그런지 모델 느낌이 확 산다.
아아... 군침이 돈다.
저 가랑이 사이에...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레오나를 도와줘요!”
-아... 그렇지, 네!
유리아는 마치 비행마법을 쓰듯 자연스럽게 내려가 아스타로트와 싸우고 있는 레오나를 도와주었다.
아직 무기가 없어서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게 조금 아쉽구나.
쩌엉!
유리아의 정권지르기를 막은 아스타로트가 뒤로 주우욱 밀려났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스타로트는 유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문을 열었다.
-망국의 공주인가...! 네년이 마왕님의 수하를...-
퍼어엉!
아스타로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나 말실수를 할까 우려한 내가 전투기의 레이저포를 쏴서 놈의 아가리에 맞췄기 때문.
방금도 ‘네년이 마왕님의 수하를 변절시켰구나!’ 라고 하려 했지?
앞으로 강한 마물들을 내보낼 땐 아가리를 봉인하고 내야겠다.
‘존나게 쫄깃하네, 씨팔.’
아스타로트는 내가 탄 전투기에 손을 뻗었다.
방해꾼을 치우려는 모양인데, 일단 정의의 용사들부터 막는 게 좋지 않겠냐?
-이야앗!
-합!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것 같은, 아스타로트의 머리와 허리를 노리는 완벽한 합동공격.
결국 아스타로트는 전투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카앙! 쩌어엉!
-크으윽!-
충격이 상당한 듯 신음을 흘리는 놈.
이때를 틈탄 내가 레오나와 유리아에게 오더를 내렸다.
“유리아 씨의 변신시간은 짧아. 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을 시간 같은 건 없어. 레오나에 의해 조금 부서진 팔을 중점적으로 노려. 알아들었지?”
-알았어.
-알겠어요.
두 사람은 좋은 연계공격으로 아스타로트를 밀어붙였다.
하늘이 울려대는 굉음과 함께 놈의 팔이 점점 괴상하게 변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스타로트가 반격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화르륵!
입에서 내뿜은 검은 불길이 레오나의 오른쪽 다리에 닿았다.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물질인 폴리머스가 타버리면서, 레오나의 허벅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거뭇하게 변했다.
그 밑은 부츠가 방패막이가 되어줘서 다행이었지만... 특별한 보호장구가 없던 허벅지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3도짜리 화상을 입어버린 레오나가 비명을 내지른다.
-꺄악...!
통신기 너머로 레오나의 신음이 들려왔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상처를 입은 건 처음이지?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파.
“레오나!”
다급한 내 말에 레오나가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낸다.
-난... 괜찮아...
이를 악문 그녀는 온갖 입식타격으로 아스타로트의 혼을 빼놓고 있는 유리아를 지원했다.
전투기에서 지원사격을 해주던 나는, 내 옆으로 박사가 다가와 앉자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죄송해요, 박사님.”
“난 괜찮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야. 그나저나 이 손 좀 떼 줄래?”
“아... 죄송... 정신이 없어서...”
“이해해. 무기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넌 저 마물의 약점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전투기의 지원사격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아스타로트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지만, 시야를 방해하거나 공격의 호흡을 끊는 데에는 충분했다.
몸집이 거대했다면, 그리고 아스타로트가 무기력감을 충분히 흡수해 S급 마물이 됐다면 아예 통하지 않았을 텐데, 놈에게 있어선 참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크아아아!!-
비스트 슬레이어 두 명의 공격에 의해 점점 상처가 늘어가는 아스타로트.
놈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웅크리고 검은 기운을 넘실넘실 뿜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운이 모이고 있어! 유리아 씨! 뒤로 돌아가서 놈이 몸을 웅크리지 못하게 만들어요!”
-네!!
유리아는 재빨리 아스타로트의 뒤로 돌아가 놈의 팔다리를 강제로 펴버렸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다시 수그러들더니, 아스타로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원래라면 어떠한 자세에서든 기운을 모아 터뜨릴 수 있었을 텐데 당황스럽지?
마르셀라가 조작해둔 거란다. 이제 곱게 죽어라.
화아악!
레오나의 검이 집 채 만하게 커졌다.
필살기를 사용하는구나.
“목을 잘라!”
-응!
슈와아아악!
공기를 가르며 횡으로 휘둘러지는 레오나의 검.
그것이 아스타로트의 목에 닿는 순간, 유리아가 잽싸게 놈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서걱!
아스타로트의 머리는 동강이 난 채로 몸과 함께 바다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그란 머리가 떨어지며 입을 뻐끔거리는 게 징그럽다.
아스타로트는 ‘마왕님... 부디 옥체를...’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 최후의 유언, 잘 들었다.
날 향한 충성심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넌 너무 말이 많았어. 그래도 강력한 모습을 보여준 데다 유리아의 각성을 성공시켰으니... 이만 지옥에서 편히 쉬어라.
특별히 기도해주마.
**
“지혁아... 나 끝났어. 얼른 치료해.”
의료기기에서 나온 세화의 말이었다.
화상을 입었던 그녀의 허벅지는 씻은 듯이 나은 상태.
아직 색소를 넣어놓은 것처럼 벌겋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허벅지에 감은 붕대를 풀던 내가 물었다.
“많이 아팠지?”
“응... 너무 아팠어...”
아스타로트의 동강난 몸을 완전히 박살내버린 레오나는, 유리아와 함께 전투기로 돌아와 변신을 풀었다.
그리고 세화는 연구실로 돌아가는 전투기 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통을 참아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대견스러웠는지... 절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나였다.
“지금은 어때?”
“하나도 안 아파... 얼른 들어가. 상처 덧나기 전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의료기기에 들어가 볼펜으로 찔렀던 허벅지의 상처를 치료했다.
의료실에서 밖으로 나온 우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의자에 앉았고, 몸을 추욱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
그러자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리아가 푸훗 하며 웃었다.
기분이 좋나보군. 하긴,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한 축을 담당했던 아스타로트를 잡아냈으니 좋을 만도 하지.
박사 또한 피식했으나 곧 얼굴을 굳혔다.
“녀석은 지금까지 나타났던 마물들 중에서 가장 강했어. 아스타로트... 라고 했지?”
유리아가 대답했다.
“네. 하지만... 이 디바이스 덕분에 없애는데 성공했어요. 예전엔 마탑 마법사들의 희생으로 겨우 쫓아내는데 그쳤는데... 아이테르라는 이 에너지... 정말 엄청나네요.”
“그래, 엄청나지. 아이테르는 이미 네게 귀속됐어. 앞으로 넌 우리와 함께 일해야 돼.”
나왔군. 저 강압적인 말투.
유리아가 냅다 대답한다.
“제가 원하는 바에요.”
“그래서 말인데... 네게 아이테르에 관해 할 말이...”
“네...?”
맞아, 아직 아이테르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상태구나.
과연 어떤 반응이 튀어나올지 궁금하다.
“그게...”
박사가 말끝을 흐리더니 나와 세화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의미를 눈치챈 내가 벌떡 일어났다.
“전 집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씀 잘 나누시고... 연락 주세요.”
그리 말한 난 세화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갔다.
**
-정말 고생했어. 다친 곳은 없고?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승현의 걱정 어린 목소리.
세화가 냉랭한 말투로 말한다.
“없어. 나 지금 피곤하니까 나중에 통화해.”
-알았어. 푹 쉬어.
통화종료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소파에 휙 던진 세화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턱에 흐르는 물을 손으로 닦아낸 그녀가 방금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나긋한 목소리로 오늘 일어났던 일을 보고한다.
“지혁아.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
“뭔데?”
“그... 아스타로트라는 마물 있잖아. 내가 목동에 도착했을 때, 그놈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는 이상한... 말을 하더라. 너도 들었지?”
“나도 들었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언어를 하던데... 서해에서도 네게 화를 냈잖아.”
“맞아.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무릎을 꿇는 행동은 또 뭐고?”
뭐긴 뭐야, 네 내면에 잠재된 내 기운을 알아차린 놈이 경의를 표한 거지.
세화의 허리에 팔을 두른 나는 그녀를 바짝 당겨왔다.
“약간 폭력적이지만 예의는 바른... 그런 놈 아닐까? 싸우기 직전에 상대에게 인사를 하는... 그런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자.”
“그럼 서해에서 화를 냈던 건... 내가 마주 인사해주지 않아서 그런 건가?”
“이해하려고 하지 마. 지금까지 나타난 마물들은 모두 비정상이었잖아. 우리가 어떻게 그놈들의 생각을 이해하겠어?”
세화가 수긍했다.
아스타로트의 그 행동을 목격한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겠지만 그들은 마르셀라가 처리할 테고, 레오나의 허리춤에 장착된 교란기가 모든 전자기기를 무력화시켰을 테니... 비스트 슬레이어는 의심받지 않는다.
그거면 된 거다.
“그런데... 지혁아.”
“응?”
“나 있잖아... 아스타로트가 무릎을 꿇었을 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뭔데?”
“기분이... 조금 좋았던 것 같아. 내가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그래, 네 수하가 될 아랫것들이 널 떠받드는데 좋아야지.
시간이 지나 타락하면 네가 마물들을 이끌 입장이 될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적응해나가.
“그놈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서 잠깐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이미 죽은 마물이야. 이제 그만 잊어버려. 우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중요한 일? 아, 맞다... 슈트 복구해야 되지?”
“아니, 디바이스 충전.”
날아간 오른쪽 다리의 부츠를 복구하는 건 나중에,
지금은 이 핑계로 세화의 혼을 쏙 빼놓는 게 우선이다.
더 이상 아스타로트를 생각하지 못하게.
“아...”
세화의 얼굴에 홍조가 나타난다.
씨익 웃은 내가 물었다.
“지금 할까? 아니면 조금 쉬었다가?”
“.... 지금 할래.”
“오늘 고생했으니까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줄게.”
“진짜?”
“진짜. 뭘 원해?”
“그럼... 그... 트윙클에 올릴 영상 찍을래.”
“알았어. 어떻게 찍을 건데?”
“그...”
우물쭈물하는 세화.
아무래도 뭔가 파격적인 걸 원하나보다.
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있자, 세화가 눈 꼭 감더니 말한다.
“묶어서... 강제로...”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묶어서 강제로 해줘...”
아하, SM플레이를 원하시는군.
상황극까지 제대로 해드리지.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뒤적거렸다.
저번에 수갑을 사놓았던가? 없으면 노끈으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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