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56화 (56/471)

EP.56 전초전

“와... 여기가 연구실이야?”

유리아의 감탄.

그녀의 옆에 딱 달라붙어있던 세화가 배시시 웃으며 시설을 설명해주었다.

“네. 저건 상황판이고, 저긴 의료실, 그리고 그 옆엔 휴게실, 옆엔 박사님 전용 방이고... 저어기는 비행기 격납고…….”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보니 유리아가 여기 오게 된 것이 무척 신나는 모양이다.

부동산 중개인이 된 마냥 유리아에게 연구실 곳곳을 알려주던 세화는, 캐시 박사가 방에서 나오자 꾸벅 인사했다.

“박사님! 안녕하세요!”

“그래. 오늘따라 활기차네?”

“네. 아, 여긴...”

“알아. 유리아 엘레나르 씨죠?”

박사가 앞으로 나와 손을 내밀자, 유리아가 손을 맞잡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니퍼 캐시 박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곧 상황실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기엔 나와 세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화는 긴 시간 끝에 끝이 났다.

박사는 유리아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디바이스 적합자가 되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세화가 디바이스를 장착해 변신하게 된 건, 그녀가 위기상황에서도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지금까지 범죄조직만 일망타진했지, 세화처럼 인간들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를 오롯이 신뢰할 수도 없었으니 아직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박사에게 아이테르 디바이스에 대해 듣게 된 유리아는 그런 아이템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지 입을 떡 벌렸다.

저 벌린 입 안에 내 물건을 쑤셔 넣고 싶군.

얼른 타락시키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아... 그래서 세화가 그렇게 변신을...”

“맞아. 신기하지?”

어느 샌가부터 말을 편하게 하는 박사였다.

유리아가 대답했다.

“네... 아이테르... 정말 신기한 에너지네요.”

나중에 디바이스 충전방식을 들으면 더 놀라겠지.

“우리가 네게 왜 이런 비밀까지 알려주는 줄 알아?”

“잘 모르겠어요.”

“세화가 널 믿어서야. 변신한 레오나가 네게 경계심 없이 다가온 것도 이유 중 하나지. 하지만... 나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에 세화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유리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건 당연해요. 저 같아도 그럴 거에요.”

“당분간 연구실에 함께 있을 수 있어?”

“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을까?”

“제겐 아버지가 계세요. 환생한 아버지가... 아직 기억을 전부 되찾지는 못한 상태셔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분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요.”

김태곤을 말함이로군.

여전히 환생을 했다고 굳게 믿고 있어.

“하아... 그래, 은하와 은하를 넘나드는 초월적인 일까지 가능했는데... 환생이라는 초자연적인 일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분 성함은?”

“김태곤이에요.”

박사는 당황해했지만, 그렇게까지 놀란 티는 내지 않았다.

“그 쏭의 사업 파트너?”

“맞아요. 그분이 꿈을 꾸셨는데...”

이젠 유리아의 푸념 시간이로군.

너무나 지루하다. 점점 짜증이 날 정도야.

**

양측의 모든 이야기가 끝냈을 땐,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세화는 유리아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간 상태.

나와 박사는 연구실에 단둘이 남아 유리아의 이야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환생이라니... 믿어지니?”

“과학자로서 이런 말을 하기엔 뭣하지만... 전 믿고 싶네요. 박사님과 세화가 운명처럼 만났듯, 김태곤 씨와 유리아 씨가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설명도 꽤나 상세했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아무리 레오나의 안목을 믿으신다고는 하지만 우리 쪽 카드를 너무 많이 오픈했어요.”

박사가 동의하며 얕은 한숨을 내쉰다.

“내 실수야.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봐.”

피곤했기에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 의지할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 한다.

박사가 유리아에게 아이테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도 그 일환.

유리아에게 냅다 디바이스를 넘기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자기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철석같이 신뢰하고 있다.

나에게는 세화보다 더더욱 의지하고 있고.

나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이왕 벌어진 일이니 해결책을 찾아보죠.”

그 말에 박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꼭 우리 남편처럼 이야기하네?”

아, 그래서 저런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했군.

의외의 소득을 얻었어.

“추진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잘 하잖아요.”

“은근히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까지 섞는 걸 보면 닮아도 똑 닮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널 조수... 아니, 파트너로 둔 걸지도 모르겠다.”

연구실 의자에서 일어난 박사는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 제법 아름답다.

쌩얼로 저런 미모가 나오기엔 쉽지 않은데.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돈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 말에 캐시 박사가 잔뜩 긴장했다.

이런 반응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고꾸라뜨리고 싶어 미치겠군.

내 맞은편에 앉은 박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시답잖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다.

“방금 파트너라고 띄워줬는데... 점수를 얻었을까 싶네.”

“상당히요.”

“다행이다. 얼마나... 지원해줄 수 있어...?”

말투가 너무 조심스럽다.

그래, 돈 얘기는 조심스러워 해야 하긴 하지.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원하시는 만큼 맞춰드릴게요.”

“그... 한 번에 다 받기보다는 달마다 후원 형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그러니까 그 금액이 얼마냐 이 말입니다.”

“너도 대충 알잖아... 우리 연구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기에 맞춰서 지원해줬으면 좋겠어.”

저자세로 나오네. 좋은 징조다.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척한 내가 잠시 후 액수을 말했다.

그러자 박사의 눈이 무척 커졌다.

“그, 그렇게 많이는 필요가 없는데...?”

“제 모든 회사가 무난하게 돌아갈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연구실로 돌리는 거에요.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다다익선, 알죠?”

“그렇긴 하지만...”

“유리아 씨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아직 제대로 된 마물들은 나오지도 않은 게 돼요. 타이라트가 지구를 갖고 노는 것 같은데... 가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 장비 개발도 하고, 남아있을지 모를 아이테르도 찾아봅시다.”

“쏭, 그래도 괜찮아...?”

“회사를 몇 개 판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돈 많아서 뭐합니까? 이대로 있다간 지구가 끝장나서 노예로 살판인데. 앞으로 연구실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마련해볼 테니까.”

박사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상체를 숙이고 앉아있는 날 꼭 안았다.

그리고 나는... 박사의 허벅지 뒷부분을 슬며시 만졌다.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세화와 포옹할 때 했던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야... 쏭... 너 지금 뭐하냐?”

내 귀에 들려오는 박사의 속삭임.

입에서 나오는 바람이 꽤나 간지럽고 야릇하다.

정신을 차린 내가 손을 뗐다.

“아, 이건 그냥... 버릇 같은 거에요.”

그러자 박사가 포옹을 풀더니 황당한 듯 물었다.

“포옹할 때 허벅지를 만져?”

“세화는 앉아있는 절 안아줄 때 다리가 빳빳하게 서거든요? 그 느낌이 좋아서...”

내 상세한 패티쉬 설명에 박사가 피식 웃는다.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넘어갈 생각인 듯하다.

“세화도 어지간히 힘들겠다.”

“오히려 좋아해요.”

박사는 내 머리를 슬쩍 때렸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정이 담긴 손길이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놀라서 뺨 날릴 뻔했잖아.”

“느낌 좋던데... 한 번만 더 만져 봐도 돼요?”

“이게 죽을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농담입니다. 다음에 봐요.”

“그래.”

어깨를 으쓱인 난 박사에게 방긋 웃어주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아직은 이 정도 스킨십까진 무리군.

난 비스트 슬레이어들의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박사는 모른다. 그렇기에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재미있다.

일단 깜짝 놀라 날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고, 한 번 더 만져 봐도 되냐는 농담에도 크게 화내지는 않았으니까 전보다는 훨씬 내게 믿음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믿음이 아니라 호감이겠지.

오늘 박사의 뒈진 남편의 모습이 우연히 내게서 튀어나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이 상태에서 천천히 껍질을 벗겨나가 보자.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세화와 유리아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피식했다.

아예 친자매가 따로 없는 수준이구나.

“지혁아, 왔어? 커피 타줄까?”

내가 돌아올 때마다 항상 우다다 달려와 키스를 하며 앵기던 세화였는데, 다소곳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좀 서운하다.

“괜찮아. 유리아 씨는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려고요?”

그 말에 유리아가 일어나 어색하게 웃었다.

“떠보지 않아도 돼요. 전 결정을 내렸으니까. 당분간 서울에 있을게요.”

“옆집을 내어드릴 테니 거기서 묵으세요.”

“전 괜찮아요.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호텔에서 묵으면 돼요.”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리아 씨 신분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대로 다 처리해놨으니까 의심을 살 염려는 없을 거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체를 45도 각도로 숙이는 유리아.

너 그런 년 아니잖아? 지금은 잘 보이고 싶어서, 디바이스를 얻고 싶어서 예의바른 척하는 거지?

시간이 지나면 박사도 마음을 열고 네게 디바이스를 주겠지만... 내가 도와주지.

난 네가 빨리 변신했으면 좋겠거든.

“제 방으로 와보실래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 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따라오려는 세화를 말리고는 유리아와 함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유리아 씨가 보통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은 마물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그저 일반인보다 강할 뿐이죠. 그렇기에 디바이스를 가지고 싶잖아요? 세화처럼 변신해서 마물들과 싸우려고, 타이라트를 찾으려고.”

유리아의 눈이 파리하게 떨렸다.

그녀가 솔직히 답했다.

“맞아요.”

“하나 물어보죠. 당신은 타이라트가 당신에게 당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고, 그 옆엔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면 누굴 선택할 겁니까? 타이라트를 쫓아 죽일 건가요? 아니면 인간을 구할 건가요?”

“네...? 그게 무슨...”

“대답해보세요.”

“전...”

깊은 고민에 빠진 유리아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인간을 구하겠어요.”

“왜요? 복수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제 복수를 위해 눈앞의 죽어가는 인간을 내버려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에요. 제 부모님은 절 그렇게 키우시지 않았어요. 근데 왜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박사님이 디바이스 적합자를 정하는 기준엔 딱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들을 얼마나 위하느냐에요. 세화는 자기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챙겼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디바이스를 가질 수 없어요.”

유리아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웃는 낯으로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박사님께 잘 말해보겠습니다. 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유리아 씨가 이 정도로 인간들을 생각하고 있다... 라고 말이죠.”

“저, 정말요...? 갑자기 왜 그렇게...”

“연구실 소속 입장으로는 유리아 씨를 함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세화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그게 가장 크죠.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마세요. 전 말주변이 별로 없으니까.”

유리아의 낯빛이 무척 밝아졌다.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음에 이야기하죠.”

“네... 네! 감사해요!”

연신 감사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유리아.

세화는 어느 순간부터 문을 빼꼼 열고 나와 유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표정이 아주 밝은 것이 내 대답에 만족했음이 틀림없다.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밀어낸 내가 유리아에게 말했다.

“조만간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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