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유리아 소개 계획
뉴질랜드에 나타난 C급 게이트를 처리한 우린 연구실로 돌아왔다.
새벽에 출몰한 마물이었기에 세화가 피곤하다며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그녀가 연구실 구석방에 들어가고, 나는 박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박사는 새 디바이스 개발 일로 매일매일 피곤에 찌들어 살았다.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온 게 눈에 보일 정도.
“박사님, 저 돈 많은 거 아시죠? 회사를 여러 개 굴리고 있는 것도.”
박사가 눈살을 찌푸린다.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아,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요. 제 회사 한 곳이랑 부동산 사업 연계를 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대전에 사시는 분인데...”
“그래서?”
“그분과 사업차 할 이야기가 있어 같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릴 하시더라고요.”
“이상한 소리? 어떤?”
“그분이 잘 아는 지인이 있는데, 그 지인이라는 사람이 게이트를 여는 외계인을 잘 안대요.”
그 말에 박사의 눈이 커졌다.
피곤이 절어있던 눈빛이 사라지면서 날카롭게 변했다.
“정말이야?”
“술에 취해서 친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 들은 대로 말씀드리는 거에요.”
“너와 연계하는 그 사업가의 이름이 뭐야?”
“김태곤, 나이는 50대 초반이고... 대전 유성구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박사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연구실에 소속된 나와 김태곤이 만나 게이트 얘기를 할 확률이라도 계산하나보지?
그냥 좋게좋게 가자. 너 피곤하잖아.
“그 김태곤이란 사람의 지인... 그 사람의 이름은 모르고?”
“예. 모릅니다.”
“넌 어떤 것 같아?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아니면 진실인 것 같아?”
“솔직히 답하자면 전자 쪽이긴 해요. 그냥 사업가일 뿐인 사람에게 그런 지인이 있을 리 없잖아요. 근데...”
“알아볼 만은 하다고 보는구나?”
“네. 그럴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이 바쁘시면 제가 알아보고요.”
캐시 박사가 흐뭇하게 웃더니 내 등을 두드렸다.
“그래. 부탁할게. 네가 아는 사람인 만큼 나보다 더 빨리 알아내겠지.”
“그럴게요. 새 디바이스는 어때요?”
그 말에 박사가 긴 한숨을 내쉰다.
“하아... 반 정도 완성됐어. 남편이 워낙 머리가 좋아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 슈트도 따로 만들어야 돼서 힘들어.”
“슈트? 제가 도와드릴까요?”
“눈알 똥그랗게 뜬 거 봐라? 너한테 맡겼다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법소녀처럼 될 것 같으니까... 내가 할 거야. 꿈도 꾸지 마.”
그래, 네가 다 해. 그냥 해본 말이었어.
나는 마르셀라가 얻어낸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거든.
아니 근데 씨팔, 슈트는 지금도 충분히 마법소녀다운데 뭔 개소리람?
“알겠어요...”
시무룩한 모습을 연기하는 나.
박사가 킥킥 웃는다.
“농담이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같이 만들어보던지 하자. 지금은 네 인생을 살아. 그간 고생 많았잖아.”
고생? 그런 건 한 적이 없는데... 흐흐...
“예. 그나저나 세화가 새 디바이스를 기대하고 있나 봐요. 친구가 생긴다고 엄청 좋아하던데...”
“알아. 슬슬 적합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 중이야.”
“적합자라면...”
“정의감 있는 사람. 근데 찾기가 쉽지 않네. 후보군이 있는데 다 마음에 안 들어.”
후보는 무슨... 뒤질라고.
두 번째는 무조건 유리아여야 한다.
연두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활을 쏘는 유리아여야 해.
“박사님과 세화는 우연히 만난 거잖아요. 마치 운명처럼.”
“그래. 진짜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지.”
“두 번째도 그렇게 되겠죠. 인연은 닿는다고들 하잖아요. 너무 심란해하지 마세요.”
그 인연은 내가 만들어주고 있다.
유리아를 보면 적합자라는 생각이 단박에 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격려 고맙다.”
“예. 세화 데리고 가볼게요.”
“알았어. 디바이스 용량은 꾸준히 늘리고 있지?”
“매일 쉬지 않고 늘려가는 중입니다. 방금은 제 인생을 살라더니... 말이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것 아녜요?”
“시끄러. 그냥 그런가보다 해.”
“미쳐 돌아가시겠구만...”
투덜거린 내가 방으로 들어가 세화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세화가 눈을 부스스 뜬다.
“지혁아...”
“잠보네 잠보. 목에 팔 감아.”
“응... 이제 집에 갈 거야?”
“그래야지. 돌아가서 편하게 쉬자.”
“나 떡볶이 먹는 꿈 꿨는데...”
떢볶이를 먹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 세화.
피식한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24시간 오픈하는 분식집이 있었나?”
“한대거리에 있는데...”
“그래, 사갖고 들어가자.”
“히...”
헤프게 웃지 말라니까.
나 말고 딴 놈한테 그런 미소를 보여주기만 해봐라.
**
입을 우물거리던 나는, 맞은편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화를 타박했다.
“너도 좀 먹어라. 떡볶이 먹고 싶다던 애가 왜 나한테 이걸 다 주냐? 그리고 내가 애야? 그만 먹여.”
“네가 너무 좋아서 그렇지... 아 맞다, 승현이 빚 다 갚았대.”
이제야 들었어? 거 참 느리네.
“그래? 그거 좋은 소식이네.”
“이제 근무시간도 바뀌어서 귀찮아질 것 같아. 자주 만나자는데?”
“대충 만나고 오면 되지. 그 자위기구는 샀어?”
“응. 주문했어.”
허... 진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추진력이 대단한 거 아니냐 세화야?
즐겁게 감상해줄게.
“불쌍해서 어떡하냐. 안쓰럽다.”
“아니지, 승현이가 좋아하면 불쌍한 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긴 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우린 식탁을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 무릎위에 머리를 댄 세화.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세화의 눈이 지그시 감기고,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난다.
요즘 들어 내 손길을 많이 원하네.
“유승현은 아직도 호텔방에서 산대?”
“응. 집을 알아보고 있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나봐. 근데...”
“응?”
“여기서 살려고 하는 것 같아. 나한테 넌지시 물어보더라.”
그건 나도 알아.
월세 가격을 알아보더라고.
근데 걔는 그런 큰돈을 못 써. 걱정하지 마.
“그래? 난 유승현을 여기 들일 생각이 없는데. 보안이 좋아서 경비견이 필요가 없어.”
“네가 들이려고 했어도 내가 반대했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아, 우리도 집을 알아봐야겠는데...”
“왜?”
“연구실 물품이 쌓여가고 있잖아. 안 답답해?”
“답답한 건 내가 예전에 살던 원룸이고, 난 여기가 좋아. 큰 곳으로 옮기면 허전할 것 같아.”
“그래? 흠...”
제 2의 연구실 느낌을 내려면 옮기긴 해야 하는데...
하긴, 이곳은 지금도 충분히 크고, 두 명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살면 관리하기가 빡세니 일단 보류해야겠다.
세화는 생각에 잠긴 내 눈치를 봤다.
“네가 원하면 옮겨도 돼. 난 너만 따라갈래.”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오늘은 산책이나 가야겠다. 말 안 들은 벌로다가 야외노출을 좀 시켜야겠어. 우리 트윙클을 팔로우하고 있는 유승현한테 선물도 줄 겸.”
그 말에 세화의 얼굴이 홍시처럼 벌겋게 변했다.
“새벽인데... 나 자야 되는데...?”
“잠 다 깼잖아. 변명은 그만.”
“응...”
쑥쓰러운 듯 대답한 세화가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지가 더 밝히네.
**
요즘 마르셀라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디바이스 카피가 착착 진행되어가면서 슬슬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왕좌에 앉은 내가 턱에 팔을 괴고 물었다.
“최아람은?”
“아, 네! 그...”
깜짝 놀라면서 뜸을 들이는 마르셀라.
딱 보니 나랑 신나게 박아대는 생각을 했구나.
이런 요망한 계집.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약을 먹여 머리를 백지화시키는 데엔 긴 시간이...”
“내가 원하는 건 내린 명령만 따르는 수동적인 꼭두각시가 아니다. 최면을 거는 것도, 이지를 조종하는 것도 아닌 완벽한 지배... 그 사람 그대로의 인격을 가지고 있되, 내게 충성을 바치는 그런 모습을 원한다.”
정상적으로 가족들과 애인, 그리고 남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다가 내 명이 떨어지면 그들의 등 뒤에도 칼을 꽂을 수 있는 수하.
이 얼마나 꼴리는가.
“그러려면 마왕님의 인자가 필요한데요오...”
“내 인자는 그런 천박한 계집에게 사용하기 싫다. 오로지 신성한 비스트 슬레이어들에게만 넣을 것이지.”
“.....”
마르셀라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년 봐라? 또 다시 기어오르려고?
“불만이라도 있느냐?”
“아, 아닙니다...”
“허면 군말 말고 일해라.”
“알겠습니다아... 그런데 저... 마왕님, 디바이스도 카피가 거의 다 됐는데... 그...”
“아직 끝난 게 아니잖느냐. 쓸데없는 소리 마라. 완벽한 카피 성공이 약속이었다. 너 또한 알고 있을 텐데?”
“네에...”
시무룩해진 마르셀라.
난 그녀에게 손가락을 까딱하며 이리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마르셀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구두소리를 내며 내게 천천히 다가온 그녀는 몸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를 씨익 웃은 채로 바라만 보기만 할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한참, 아주 한참의 시간동안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던 마르셀라가 다리를 오므렸다.
“.... 마왕님...”
“.....”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열심히 일할게요...”
“.....”
“제발...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주셔요...”
얘도 가만 보면 무척 귀엽단 말이지.
나한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다.
충성심이 아주 높은 강아지.
“왜지? 나는 내 충실한 수하를 예뻐하면 아니 되나?”
“꺄흥... 그건 아니지마안...♡”
“가만 보니 무척 아름답구나, 마르셀라. 널 안는 날이 기다려지는군.”
“후아아아...”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가 무릎을 붙이고 양쪽 다리를 밖으로 빼면서 철푸덕 쓰러진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내가 가만히 기다려주자, 마르셀라가 애액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척 힘겹게 일어난다.
“저도... 기대되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범죄조직에 대해 설명해보아라.”
그녀가 말을 더듬는다.
“대... 구에서... 활동하는... 아아... 대구에서... 흐응...”
마르셀라는 말을 더듬는 자신이 싫은 듯, 아랫입술을 악 물었다.
그러자 튀어나온 송곳니가 입술을 찌르더니 거기서 새빨간 피가 새어나왔다.
아프겠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조직... 입니다... 전 세계에서 밀수한 미래무기를 사용합니다...”
“장악해두었나?”
“그건 아닙니다만...”
“허면 아몬에게 시켜라. 레오나가 그들을 소탕하도록 만들어야겠다.”
“그런 조직들은 순식간에 진압될 텐데요...? 레오나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군인들에게...”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면 되겠지.”
“.... 무슨 생각이신지... 제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레오나도 피 맛을 봐야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마르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레오나에게 살인을...”
“아직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내일 바로 올려 보내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마르셀라의 대답을 듣고 왕좌에서 내려온 난,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슬쩍 닦았다.
그리고는 피가 묻은 그 손가락을 빨아먹으면서 마르셀라를 지나쳤다.
“흐아아앗...!”
교태가 섞인 소리와 함께 철퍼덕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쏟아내면서 쓰러졌구만.
놀려먹는 맛도 일품이군. 당분간 이렇게 교육시켜야겠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