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배덕감 증폭 #2
@@
한대거리를 걷던 세화가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어 번 지나고, 남자친구가 전화를 받는다.
-세화야. 안녕?
예전이었다면 마음이 절로 안정될 만한, 그런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화는 저 재미없는 목소리가 싫었다.
“일하는 중이야?”
-응.
“나와. 호텔에 거의 다 왔으니까.”
-어...? 지금? 제주도에서 돌아온 거야?
“맞아. 곤란해?”
-아니, 금방 나갈게.
“호텔 입구 쪽 벤치에 앉아있을 테니까 그쪽으로 와.”
거의 통보를 하듯 말한 세화는, 승현이 알겠다고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벤치에 앉아 그를 기다리길 약 3분.
세화는 승현이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의 온몸을 훑었다.
제대로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과 언제 세탁했는지 모를 꾀죄죄한 홀복.
넥타이가 그나마 깔끔하게 메어져있지만, 디자인이 홀복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구두엔 음료수인지 술인지 모르겠는 액체가 떨어져 말라버린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항상 댄디한 지혁과는 완전히 딴판.
절로 한숨만 나왔다.
예전의 승현은 깔끔했는데 왜 이렇게 변한 건지... 갑작스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녀였다.
매일매일 깨끗한 지혁의 집에서 살고 있었기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머리를 털어 상념을 날려버린 세화는, 승현이 다가오자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러자 승현이 함박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는다.
“안녕. 제주도는 재미있었어?”
“그럭저럭. 시간 돼?”
“많아. 카페라도 갈까?”
그러자고 대답하려던 세화가 멈칫했다.
후덕해진데다 저런 옷차림을 한 승현과 같이 있기가 조금 창피했기 때문.
그녀가 말했다.
“그냥 네 방에서 얘기하자. 호텔방 그대로 쓰지?”
“응. 그럼 들어갈까?”
세화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현과 함께 꼭대기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유승현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었다.
방에 들어간 세화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부에서 퀴퀴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
이불은 깨끗하지만 방 자체의 냄새가 좀 그랬다.
현재 승현이 입은 홀복에 찌든 손님과 아가씨의 담배냄새, 그것과 어우러져 악취를 내뿜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세화가 침대에 걸터앉으려고 갔다가, 마음을 바꿔 작은 커피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승현이 묻는다.
“커피라도 타줄까?”
“됐어. 너도 앉아.”
냉랭한 말투에 승현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세화의 맞은편에 앉았다.
세화가 다짜고짜 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솔직하게 말할게. 전혀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 네가 평생 하지도 않던 손찌검을 했다면, 난 분명 어마어마한 추태를 부렸을 거야. 뭔지 말해주면 깊이 반성할게.”
세화는 승현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잠시 예전의 솔직하고 떳떳한 남자친구의 모습이 보였기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 네가 그날 뭐라고 했냐면... 술에 취했을 때, 레오나로 변신해달라고 큰 소리로 말했어. 그 모습이 보고 싶다면서.”
유승현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인다.
실언 중에서도 엄청난 실언, 그것을 자신이 말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은 모양.
한참을 벙 쪄있던 유승현이 자신의 이마를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진짜 한심했구나...”
“그래. 한심했지.”
“네가 그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따위 말을 지껄여버렸어. 네가 그렇게 화난 것도 당연해. 정말 미안해.”
“.....”
“앞으로 난 술을 끊을 거야. 약속할게.”
“진심이야...?”
“이건 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너한테 뺨을 맞고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은 직후 느꼈어. 내가 여태까지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걸 말야. 난 널 슬퍼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기가 죽기보다 싫어.”
세화의 표정이 조금 더 풀렸다.
그 모습을 본 승현이 말을 이었다.
“몇 번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는 자리에서 내 말만 해댄 것도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세화가 수긍했다.
“맞아. 네 잘못이야. 하지만...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사과 받아줄게.”
“정말 고마워.”
대낯의 태양처럼 밝아지는 승현의 얼굴.
세화가 말했다.
“약속은 꼭 지켜.”
“맹세할게. 다시는 술 같은 건 입에 대지 않을 거야.”
“하아... 이만 일어나볼게.”
“아, 혹시 괜찮으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한 5분 정도만... 네게 주고 싶은 게 있어.”
“....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승현은 문을 거의 발로 차다시피 하며 방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본 세화의 입가에 실소가 깃든다.
그녀는 상체를 앞뒤로 흔들면서 방을 구경하다가, 침대에 놓인 승현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손기름이 잔뜩 묻어있는 휴대폰.
그걸 보니 괜히 또 눈살이 찌푸려지는 세화였다.
창문이라도 열어서 환기를 시킬까 고민하던 그녀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봤다.
‘한 번 봐볼까...?’
승현과 붙어있으면서, 그의 휴대폰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 하긴 했다.
여태까지 사생활을 지켜주느라고 절대 서로의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승현과 예쁜 사랑을 했다.
지금은 그게 순진해빠졌다고 느껴지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승현의 휴대폰엔 뭐가 있을까?
여자의 번호는 있나? 초중고 시절엔 그래도 인기가 꽤 있었으니 연락하는 여자애가 있지 않을까?
세화의 그런 호기심은 그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도록 했다.
티가 나면 안 되니 기름을 제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잡자니 불쾌하다.
세화는 손톱을 세워 휴대폰의 홈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켜지는 휴대폰. 세화가 화들짝 놀랐다.
‘잠금이 안 걸려있네?’
세화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호텔방임을 알면서도 괜히 찔리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그녀는 본격적으로 승현의 휴대폰을 탐색했다.
배경화면에 있는 자신과 승현의 사진, 너무 별로다.
예전의 자신은 무척 수수했구나 싶었다.
통화내역을 보니 여자의 이름이 우수수 나온다.
하지만 앞에 [퍼퓸]이라는 단어가 붙어있어 유흥주점에서 일을 하는 아가씨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문자도 볼 건 없구나. 너무 밋밋하다.
그리 생각한 세화가 휴대폰의 전원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메뉴에 트윙클 어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트윙클 시작했나?’
원래 승현은 트윙클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이상한 사랑의 시라도 썼나 싶은 세화가 어플을 터치했다.
어플을 완전히 종료시키지 않아서인지, 승현이 보고 있던 트윙클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어?”
눈을 부릅떴다.
[아침이와 저녁이]
[20대 초반, 165cm, 184cm]
[초보 트윙커/일탈/커플/심심할 때 올려요/DM, 리트윙 차단 중/오프 안 해요.]
[0 팔로워 중, 137291 팔로워] [현재 팔로우 중]
승현의 트윙클엔 자신과 지혁의 계정이 떠있었다.
심지어는 팔로우까지 되어 있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킨 세화가 떨리는 손으로 홈 버튼을 눌러 어플을 내렸고, 전원부를 눌러 화면을 껐다.
놀란 와중에도 휴대폰의 위치를 꼼꼼히 확인해보는 섬세함을 발휘했다.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 의자에 앉은 세화가 머리를 여러 번 흔들었다.
설마... 설마 동영상을 봤나?
트윙클이 팔로우되어 있었으니 분명 봤다.
심지어 최근에도. 어플이 완전히 종료되지 않은 걸 보면 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면서, 전신으로 불쾌한 기운이 싸악 퍼진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면서 애꿎은 옷매무새만 가다듬길 5분, 승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안, 늦었지?”
“어? 응? 아냐...”
“왜 그래? 얼굴이 시뻘건데...”
“아... 여기가 좀 답답해서...”
“하긴, 방이 좁긴 하지. 얼른 돌아가서 쉬어. 이거 받고.”
승현이 제법 큰 박스를 내민다.
안에 온갖 초콜릿, 사탕 등이 들어있는 박스.
세화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자, 승현이 말을 이었다.
“손님들 입가심 용도로 나가는 건데, 남은 거 모아뒀다가 맛있는 종류로만 골라서 가져왔어. 입 심심하면 먹어.”
“어... 고마워. 잘 먹을게. 나... 나 이만 간다? 일 열심히 해.”
“응. 조심히 돌아가. 편할 때 연락 줘. 마지막으로 반지... 빼지 않고 있어줘서 고마워.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친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
세화가 흠칫한다.
[지혁의 노예, 세화] 라는 레터링이 쓰인 반지.
이건 트윙클을 엿본 일과 합쳐져 세화가 갖고 있는 배덕감을 훨씬 더 크게 키웠다.
“갈게.”
승현을 등진 상태에서 간결하게 대답한 세화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애써 태연한 척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 직원과 눈인사를 한 그녀는 밖으로 나와 참았던 한숨을 터뜨렸다.
“푸하...”
승현은 세화 자신이 격한 신음소리를 내며 지혁과 후배위를 하고, 정성을 다해 핸드잡을 해주는 동영상을 봤다.
충격 그 자체. 머리가 어지럽다.
‘혹시 나인 줄 아는 건...’
아니, 그건 아니다.
자신이 아는 승현은 그런 일이 있다면 곧바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니까.
어디서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냐며 물어볼 사람이다.
게다가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고 있는데 저리 순박하게 축제날의 일을 사과만 하고 있을 리 없다.
세화는 지혁을 생각했다.
언제나 멋진, 자신의 두 번째... 아니, 첫 번째 남자친구.
그녀의 심신이 절로 안정되면서, 아까의 수치심이 흥분으로 바뀌고 기분 좋은 떨림이 찾아왔다.
하체가 가려워지고, 몸이 배배 꼬인다.
오늘 일어났던 일을 어서 알려줘야겠다.
지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무척 좋아할 것이다.
세화는 자신의 상기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
‘이럴 줄은 몰랐는데.’
소파에서 느긋하게 유승현을 엿본 나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세화가 유승현의 휴대폰으로 트윙클을 열어볼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냥 화해만 할 줄 알았는데... 의도치 않은 수확.
유승현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빚을 다 갚았다고 자랑하고 싶을진대 꾹 참아내며 사과를 한 것도 베스트.
마지막에 용서해주는 거냐느니, 바래다주겠다느니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좋다.
연락하겠다가 아닌 편할 때 연락을 달라 한 것도 잘했다.
이 일로 그는 저울접시를 붙잡고 버티다가 다시 올라왔다.
무저갱으로 빠지지 않았다. 세화는 여전히 유승현을 좋아할 것이다.
악조건 속에서 이 정도의 결과를 얻어낸 건 무척 잘한 거다.
띵동! 25층입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뉴스를 틀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로운 모습을 연기했다.
삐빅! 덜컥!
카드를 대고 문을 연 세화가 날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왔어?”
“응. 나 화해했어.”
“잘했네.”
“샤워하고 올게. 승현이 방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이후로 이상한 냄새가 코에 밴 것 같아. 더럽고 찜찜해.”
“걔는 환기도 안 하고 사나?”
“내말이. 나 빨리 씻고 올게.”
난 밝게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세화는 유승현과 하던 잔잔한 연애에서 벗어나 크나큰 자극을 갈구하게 됐다.
나와 자극적인 일들을 하다 보니 유승현을 점점 재미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나를 재미있고 새로운 사람으로 인식하는 상태다.
날 진심으로,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기도 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세화에게 쾌감을 준다.
처음엔 나를 가끔 마시면 몸에 해가 안 되는 탄산 정도로 생각하던 세화가, 지금은 매일 많이 마시지 않으면 미쳐버릴 정도까지 왔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더해질 터.
마약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처음엔 작은 복용만으로도 쾌감을 얻을 수 있지만, 몸에 내성이 생긴 이후로부터는 복용량을 늘려야지만 예의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화가 복용자고, 내가 그 마약이다.
중독성이 아주 심한 마약.
상기했듯, 유승현은 잘했다.
그러나 그뿐.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유승현이 저자세로 사과의 사과를 거듭하면서부터, 트윙클을 본 순간부터 세화는 서열정리를 끝내고 그를 완전히 발밑의 존재로 각인시켰다.
이제 세화는 날 위해, 그리고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승현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용할 것이다.
승현아, 늦어도 이미 한참 늦어버렸구나.
조만간 유리아를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아, 넌 세화랑 예쁜 화해를 한 줄 알 테니, 유리아가 유혹하면 고민이 깊어지겠지.
널 장난감으로 아주 잘 써먹어줄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