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43화 (43/471)

EP.43 배덕감 증폭

큼지막한 공터.

나는 밖에 서서 세화의 운전을 봐주며 마르셀라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운전석 창문을 열고 내게 손을 흔드는 세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난, 환한 웃음까지 보내주며 마르셀라에게 물었다.

“유리아는 지금 뭘 하고 있지?”

-김태곤... 아니, 마왕님께서 지원해주신 돈으로 백수생활을 누리고 있어요. 제게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는데... 미칠 것 같아요... 환생과 관련된 꿈을 더 꾸는지 계속 물어보더라구요.

마르셀라는 현재 나 대신 김태곤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세화의 곁에 있으면 유리아와 대화를 잘 나눌 수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알고 있다. 네가 보낸 문자는 나 또한 보고 있으니까. 친절한 상태를 유지하며 길들이도록 해라.”

-알겠어요.

“박사의 디바이스는?”

-실패의 실패를 거듭하며 제작 중입니다. 아직 다 만들려면 한참 남았어요.

“세계연합의 움직임은 어떻지?”

-각국 대부분이 방어체계를 제대로 구축했습니다. 약소국을 제외하면 E, F등급은 무리 없이 막아낼 거에요.

“강대국 위주로 F등급 마물들을 대량 내보내라. 가끔 E등급도 섞어주고.”

새로운 디바이스가 만들어지는 동안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박사가 큰 의심을 가질 것이다.

허접한 마물을 희생시키는 일 정도는 필요했다.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마물들이었으니, 많이 잃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알겠습니다.

“유승현은 빚을 다 갚았느냐?”

-어제부로 청산했다고 방방 날뛰더군요. 호텔 방을 빌려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어요.

역시 근성이 있는 놈이다.

그래야 내 라이벌... 아니, 장난감답지.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집을 알아보고 있어요. 가불을 해달라고 하던데... 어떡하죠?

“이제 놈은 우리 가게 매출을 올려줄 매니저가 되잖느냐. 네가 신임을 줘야 놈도 평생 가게에 충성을 바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무이자로 빌려주면 되겠네요.

“근무시간도 널널하게 조정해주어라.”

-네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화가 운전하는 차가 내 쪽으로 접근했다.

“이만 끊겠다.”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니, 자동차가 급정거를 한다.

끼이익!

깜짝 놀랐네. 날 치려고 하는 줄 알았다.

아니, 이런 브레이크 실력으로 어떻게 면허를 딴 거야?

잘 하다가 마지막에 초를 치는구만.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으니 세화가 운전석에서 내려 내게 성큼 다가온다.

“왜 나한테 집중 안 해?”

아, 이래서 삐쳐가지고 급정거를 했구나.

“집중하고 있었어. 마지막 급정거는 일부러 한 거니까 넘어가고, 전체적으로 운전 잘하던데? 커브도 잘 돌고. 근데 첫 번째 커브는 조금 급했어.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데, 손에 힘이 들어갔지? 앞으론 부드럽게 핸들 돌려.”

내 상세한 감상평에 세화의 얼굴이 곧바로 풀렸다.

“업무전화였어?”

“맞아, 잘 끝났어. 한 번 더 해볼래? 이번엔 나도 조수석에 타야겠다.”

“응.”

치마를 휘날리며 총총 걸어간 세화가 다시 운전석에 탄다.

속바지가 다 보이는데... 저렇게 무방비해서야 원...

킥킥거린 나는 조수석에 탔고, 오랜 시간동안 세화의 운전을 봐주었다.

우린 며칠 간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관광을 했다.

여러 맛집에 들르고, 유명한 관광지에서 자연경관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와 신나게 관계를 맺고,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트윙클에 올리고.

세화의 새로운 휴대폰엔 유승현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바꿀 때 사진들을 옮기긴 했으나, 세화가 용량을 확보한다며 유승현과의 추억들을 죄다 지워버리고 나와 그녀의 사진으로 다 채웠다.

용량이 썩어 넘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였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캐시 박사에게 전화도 왔다.

마르셀라가 보낸 F등급 마물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다고 전해주었다.

세화는 그 마물들의 출몰을 무척 걱정했지만, 세계적으로 방어체계가 잘 구축된 지금은 인간들의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박사가 편하게 쉬라고만 했다.

덕분에 세화는 마음 편하게 나와의 여행을 즐겼다.

예전이었다면 그 작은 희생도 마음아파 했을 텐데, 변한 지금은 그 정도 따위야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좋은 재질의 목욕가운을 입은 채, 룸서비스로 온 아이스크림을 흡입하면서 영화를 보던 세화가 배를 통통 두드린다.

“며칠 사이에 살이 2키로는 찐 것 같아.”

베개에 손을 올리고 그 위에 뒤통수를 얹은 내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하나도 안 쪘어. 까불지 말고 먹기나 해.”

“너는 왜 안 먹어? 이거 엄청 맛있는데.”

“너 다 먹으라고 놔두는 거야.”

“그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세화가 자리를 고쳐 앉으려다 내 가운에 아이스크림을 흘린다.

정확히 고간이 자리한 위치.

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켜고 말았다.

저 요망한 미소나 감추고 연기하던가, 아니면 대놓고 아이스크림을 묻히던가 하지 이게 뭐람.

“어떡해? 흘렸네?”

연기 한 번 더럽게 못하네.

유승현과 통화할 땐 제법 잘하더니.

“그러네. 닦아야겠다.”

“뭘로? 입으로? 그럼 동영상 찍을 준비할까?”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요망한 것.

하지만 안 받아준다.

“아니. 내가 닦을 테니까 넌 영화나 마저 봐.”

그리 말한 내가 휴지를 뽑으려 하자, 세화가 심통이 났는지 숟가락으로 내 몸을 마구 때린다.

하나도 안 아픈데 어쩌냐.

그나저나 세화가 사랑고백을 한 이후 날 때리는 빈도가 무척 많아져서 걱정이다.

물론 저번처럼 진심이 담긴 펀치는 아니었지만, 이 폭력성을 인간들에게 드러내야 하는데...

내가 샌드백이 되어버리면 안 되지.

난 철저한 무관심으로 그녀의 숟가락 공격을 무시했다.

그러자 세화가 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더니 내 위에 올라타 온 얼굴에 키스를 한다.

이마, 눈썹, 눈밑, 뺨, 코, 인중, 입술, 그리고 턱.

온갖 부위에 쪽쪽거리는 소리를 낸 그녀는, 내 반응이 시원찮으니 시무룩해져선 목을 깨물었다.

그래도 내 표정에 변화가 없자 가슴을 깨물고, 그것도 통하질 않자 내 성기를 물으려...

잠깐만, 여긴 안 되지.

“올라와.”

“히...”

금세 올라와선 내 입술을 약하게 깨물고 당기는 그녀.

지금의 세화는 사회화과정을 거치는 고양이 같았다.

고양이가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의 손가락을 물듯, 세화도 이런 행동으로 내 마음을 확인하려 했다.

숟가락으로 날 때려보는 것이나, 이렇게 스킨십을 하는 것이나 그 애정 확인의 일환이었다.

난 세화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아!”

비명을 내지르곤 이마를 문지른 세화가 씩씩대며 날 바라본다.

“이 씨...”

“씨? 수영장에서도 그러더니, 너 요즘 입이 험해졌다? 다음엔 발까지 나오겠네?”

“왜 때리는데!?”

“네가 하도 애처럼 구니까 교육을 좀 시키려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웬 엄살이야?”

“서러우니까...”

그리 말하는 세화의 눈엔 습기가 가득 차려 하고 있었다.

질질 짜면 다 되는 줄 아냐?

지금은 봐준다.

세화를 확 끌어안은 내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제야 진정한 세화가 헤실헤실 웃는다.

왠지 휘둘린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그렇지만... 일단 넘어가자.

**

9박이나 되는 휴가를 마친 우리들은, 토요일 저녁에 서울로 돌아왔다.

쿠르릉!

시꺼먼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

그게 유승현의 앞길이 무너지는 소리 같아서 절로 미소가 나온다.

세화는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 언제부턴가 내 허리를 꽉 잡고 있었다.

허릿살에서 얼얼한 느낌이 일자, 내가 말했다.

“아파. 꼬집지 마.”

“아, 미안...”

“손을 잡으면 되지 왜 허리를 잡고 그래.”

그 말에 냉큼 내 손을 잡는 세화였다.

우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화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포탈이 있는 방부터 점검했다.

이상여부가 있는지 체크하려는 것이다.

세화가 얼마나 비스트 슬레이어라는 존재를 아끼는지 딱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포탈은 괜찮은 것 같아.”

그럼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나중엔 디바이스랑 연동도 시켜보자. 언제 어디서든 포탈을 탈 수 있게.”

“그게 가능해...?”

“폴리머스만 더 있으면 안 되는 건 없어.”

“아...”

세화의 눈이 아련해졌다.

폴리머스라는 단어에 나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 모양이다.

미래과학과 건물에서 우연을 가장한 채 만난 우리.

서로 같은 과임을 알고 나서, 그리고 세화를 향한 교수의 질문을 도와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3개월 만에 여기까지 왔다.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세화의 신중한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무척 빠른 속도였다.

자랑을 해도 될 만큼.

물론 마르셀라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긴 했다.

조만간 진짜, 제대로 만족시켜줘서 충성심을 더욱 키워놔야겠다.

유리아를 향한 암계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고, 로제... 지금은 스텔라 헤일리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

남은 비스트 슬레이어인 캐롤라인과 셀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들이라면 언제든 오게 되어 있다.

운명의 이끌림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무슨 생각해?”

유승현의 빚도 죄다 갚아나간 상태겠다, 그와 슬슬 정면승부를 벌여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세화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너랑 같은 생각일 걸?”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데?”

“나와 처음 만난 날.”

“응. 맞아.”

쑥쓰러워하며 날 올려다보는 세화.

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려주고는 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얼른 씻자. 피곤하다.”

“집에 오니까 뭔가 낯설어. 또 여행가면 안 돼? 방학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당분간 바빠질 거야. 회사 일 좀 처리하고, 디바이스 포탈도 만들어놓고 해외로 나가보던지 하자.”

“그럼 당분간 나 혼자 있어야 돼? 혼자서 뭐하라구?”

“유승현이라도 가지고 놀던지.”

그에 세화가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승현이를 깜박하고 있었네.”

남자친구도 잊어버리다니. 세화야, 넌 아직 그러면 안 돼.

유승현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네 발 밑을 기게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

근데 유승현도 어지간하다.

빚도 다 갚았고, 마르셀라가 가불까지 해준데다 근무시간마저 조절해줬는데 세화에게 전화하는 것을 꾹 참고 있다니.

아무리 세화가 먼저 연락한다고 말했더라도 근성이 꽤나 좋다.

이번 만남 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힘내봐라. 세화에게 음문이 생겨버려서 네가 뭘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저울에서 떨어지지 않기만 하면 칭찬감이야.

“잠깐만. 승현이한테 톡 보내볼게.”

“그냥 이참에 만나버려. 일하는 중이더라도 잠깐 짬을 낼 수는 있을 거 아니야.”

“그럴까?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온다?”

“그렇게 해.”

세화는 나와 입술을 맞추고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난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뭐 잊고 있는 거 없어?”

“응? 뭐가?”

“반지 갈아 껴야지.”

“아...”

세화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노예라고 쓰인 반지를 끼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핸드백을 뒤적거려 내가 준 반지박스를 꺼낸 세화가 반지를 갈아 꼈다.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세화가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에 들어가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까지 챙긴 그녀가 말한다.

“진짜 다녀올게. 좀 늦을지도 몰라.”

“늦는다고? 잠깐만 만나는 게 아니라?”

“승현이가 일할 시간인 건 알아. 근데 뭐... 나한테 30분, 1시간도 못 낼 정도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 아니야?”

“너무 앞서간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생각할래. 나 나간다?”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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