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고비 사막의 아이테르 #2
딸깍! 우우웅!!
어허, 가만히 있어.
내 넘실거리는 야욕을 막으려 하지 말고 순응하란 말이야.
요즘 내가 디바이스를 건드리면, 세화에게 귀속된 아이테르가 예전보다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점점 침식되어가면서 위기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타락한 레오나가 목에 차게 될 초크를 넣어놓고 있었다.
끈은 검은색의 라텍스 재질, 그 가운데에 속이 빈 보라색 하트가 있는 초크였다.
딱 봐도 요염해 보이는, 내 물건이라는 뜻의 증표.
다음엔 복부가 훤히 드러나는 레오타드를 만들 예정이었다.
모든 과정을 마친 난, 디바이스의 용량을 더 증축해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세화가 날 향해 헤실헤실 웃고 있다.
뭘 가지고 오긴 왔는데... 왜 숨기고 있지?
일단 모른 척해주자.
“영화 볼 건데, 같이 볼래?”
그 말에 세화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도 하지 않다니. 요새 예의가 좀 없어졌네.
자기 전에 버릇을 고쳐놔야겠어.
소파에 앉은 내가 새로이 구매한 홈시어터를 만지작거렸다.
위이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실을 가득 메우는 스크린이 내려왔다.
오늘 영화는 약간 폭력적이고 고어한 걸로 봐볼까?
이런 장르를 전혀 보지 못했던 세화인데, 많이 변한 지금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영화를 고르고 있던 난, 세화가 하얀 돌핀팬츠에 박시한 티셔츠를 입고 나오자 멈칫했다.
그녀가 속옷을 입지 않아서였다.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과, 티셔츠 상단 양쪽이 툭 튀어나온 모습, 팬츠 사이에 대음순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대단히 야릇하다.
세화는 손을 엉덩이 뒤로 옮겨둔 상태였다.
나한테 주는 선물인가보다.
“숨기고 있는 건 뭐야?”
세화는 총총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건 반지박스였다.
유승현이 세화에게 줬던 것보다 더욱 세련되어 보이는 박스.
‘설마...’
내가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자, 쑥쓰러워하던 그녀가 박스를 열었다.
그 가운데엔 반지가 한 쌍 있었다.
안쪽에 아주 작은 한글로 [지혁♡세화]라고 레터링 된.
질리지 않는 심플한 반지였다.
“나랑 이거 끼자.”
지금 얘가 커플링을 산 건가? 진짜로?
백금으로 보였는데, 내 휴대폰엔 카드내역이 찍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돈으로 샀다는 건데... 돈도 별로 없을 텐데 주머니를 탈탈 턴 모양이다.
솔직히 세화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난, 얼떨결에 반지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세화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 쌍의 반지 중에서 큰 반지를 뽑아 내 약지에 끼워준다.
내게 딱 맞는 반지였다. 세화의 섬세함이 절로 드러나는 대목.
“절대 빼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유승현이 세화에게 했던 말을, 세화가 나에게 하고 있다.
입이 절로 쫘악 찢어진다.
그런 나를 붉어진 얼굴로 올려다본 세화가 말한다.
“나도 껴줘.”
그럼, 껴줘야지.
박스에서 반지를 꺼낸 난, 세화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유승현이 줬던 반지가 있던 자리, 정복하게 되니 희열감이 넘실거린다.
세화는 온 얼굴에 함박미소를 짓더니 내 얼굴 전체에 걸쳐 키스를 해댔다.
난 그런 세화를 떼어낸 뒤, 그녀의 입술을 애정 어린 손으로 툭툭 때렸다.
“흐응...”
아쉬운 듯 콧소리를 내뱉는 세화.
내가 물었다.
“너 이거 괜찮아?”
“뭐가?”
“주점에서 유승현한테 커플링 받았다며. 공개된 장소라 사람들이 다 봤을 거 아니야. 동기들이 물어보면 어쩌려고?”
“그런 상황에서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이틀 전에 애들이 내 손이 깨끗한 걸 보고 물어봤었어. 무슨 일 있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사이즈가 꽉 껴서 조정하러 보냈다고 했어.”
나쁘지 않은 핑계다.
확실히 세화의 말마따나 고백을 하는 상황이라면 당사자들을 보지, 반지를 자세히 보지는 않을 터.
주점 조명이 조금 어두웠기에 색깔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유승현이 준 것도 이 반지처럼 디자인이 심플했으니까 괜찮다.
“유승현은? 걔랑 만날 땐 어쩌려고?”
“당분간 안 만날 건데?”
“그 뒤엔?”
“몰라. 그냥 대충 걔가 준 거 끼고 나가지 뭐.”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구겨져있었다.
아직까지 이가 갈리는 모양이다.
내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따로 유승현이 줬던 반지랑 똑같은 걸로 하나 더 맞출게. 가끔 걔 만나러 나갈 때는 그거 끼고 나가.”
“똑같은 거?”
“겉만 똑같은 거. 안은 당연히 다르지.”
레터링을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세화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매가 호선을 그린 것을 보니 흥분하고 있구나.
“응. 근데 어디서 샀는지 모르잖아. 어떻게 똑같은 걸로 맞춰?”
“맡겨놓고 주문제작하면 돼. 지금 그거 어디 있어?”
“안방 탁상 서랍에.”
“내일 가져갈게.”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다시금 영화를 고르려 하는데, 세화가 내 팔을 잡더니 트윙클 계정에 들어간다.
“우리 한동안 이거 안 올렸잖아. 팔로워가 5만에서 더 이상 안 늘어.”
트윙클은 유승현을 골려주려고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놈은 세화에게 뺨을 쳐맞고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아 슬퍼하고 있다.
일까지 해야 하니 트윙클을 살필 여유는 없을 터.
더 이상 포스트를 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슬슬 계정도 삭제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세화의 노출증을 키우려면 남았고, 그녀도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니까... 그때까지만 더 해볼까 싶다.
“그게 재미있어?”
“내가 알아보니까 이걸로 돈도 번대. 광고 같은 거 협찬 받으면...”
“지금 돈 걱정을 하는 거야?”
“아니... 사실 계속 하고 싶어. 재미있어. 흥분돼.”
이제야 솔직하게 말하는구만.
조만간 야외노출이라도 시켜서 올려봐야지.
“오늘은 영화에 집중하고, 다음에 하자.”
“지금 하면 안 돼?”
난 아무 말 않고, 다소 엄한 눈으로 세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세화가 축 늘어지더니 내 무릎에 앉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영화를 고른다.
삐친 게 눈에 보이니 참 귀엽다.
**
며칠 간 세계는 난리가 났다.
사흘간 하루에 두 번씩 게이트가 튀어나오니 그럴 수밖에.
다행히도 D등급 이하 마물들만 쏟아져 나왔기에, 각국은 군사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막아내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무척 컸다.
비스트 슬레이어를 더 만들어야 되지 않냐고 우려를 표할 정도.
하지만 다섯 명밖에는 없는 고귀한 존재들이 비스트 슬레이어다.
공장에서 뚝딱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게이트 등급이 낮았기에 우린 출동하지 않았다.
C등급 이상의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비스트 슬레이어를 보내지 않겠다고 성명서를 냈기 때문.
물론 약소국은 예외, 군사력이 모자란 그들에겐 우리가 필요했다.
어쨌건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게이트를 가려 받는 너희들이 정녕 인류의 수호자가 맞냐며 말이다.
심지어 어떠한 국가와 뒷거래를 했고, 그 때문에 일부러 오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놈도 있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나와 세화, 박사는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인류를 구원해주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이블리언 탐색기는 물론 등급표를 만들어주고 체계적인 방어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우리들에게, 상식이 박혀있다면 아가리를 열어선 안 된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기적인 동물 그 자체.
자신들이 피해를 입으니 꼭지가 돌았고, 꼬투리를 잡아 못할 말을 쏟아냈다.
이는 세화의 정의를 크게 흔들기 위해 내가 의도한 일.
게이트를 연 것도 이런 비난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세화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분개했다.
캐시 박사는 그런 세화를 위로했고 말이다.
“소수의 선동일 뿐이야. 흔들려선 안 돼.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그렇다고 해도...”
“세계연합에서도 비난을 지껄이는 놈들을 입단속해주겠다고 약속했어.”
“해주겠다고요? 왜 세계연합이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해요?”
“아, 내가 말을 잘못한 거야. 입단속을 하겠다고 저자세로 나왔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흴 비난하는 나라의 탐색기를 회수해서 제대로 된 사과를...”
“이세화! 정신 차려!”
버럭 소리친 박사.
눈이 벌겋게 변해있던 세화가 화들짝 놀란다.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린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뺨을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그리고는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제가 무슨 말을...”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박사가 시원한 물을 건넸다.
“마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세화가 고개를 푹 숙인다.
“제가... 제가 어떻게 됐나 봐요... 요새 너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그에 박사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니 화를 누그러뜨린 것.
그 틈을 탄 내가 말했다.
“변신이라도 할래? 그러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은데.”
“변신? 하지만...”
“디바이스 용량도 크게 늘어났고, 이 연구실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이니까 잠깐만 했다가 바로 돌아오면 괜찮을 거야.”
박사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이에 세화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팔목에 찬 디바이스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새어나왔고, 나와 박사는 눈부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난 연구실 중앙에서 하늘색 후광을 내뿜고 있는 레오나를 보았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빛을 조절했는지, 나는 레오나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맑은 바다와도 같은, 빨려 들어갈 만한 동공.
여전히 아름답다. 고귀하다. 믿음직하다.
그런 지고지순한 존재가 날 사랑스런 눈으로 빤히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열린다.
“지혁아.”
떨려오던 목소리는 없어진 상태.
레오나의 강인함이 세화의 정신을 가득 메운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인간들에 대한 불신이 자리를 잡은 상태겠지.
지금은 잠깐 억지로 집어넣은 것일 뿐이다.
“응?”
내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채운 얼굴로 대답하자, 레오나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눈을 감는다.
잠깐 동안의 황홀한 키스.
레오나가 얼굴을 떼어내더니 변신을 푼다.
위이잉-!
하늘색 빛무리가 디바이스에 빨려 들어가면서, 레오나가 세화로 돌아왔다.
표정은 개운 그 자체.
박사가 날 바라보며 잘했다고 눈을 찡긋한다.
다시 세화에게로 고개를 돌린 박사가 묻는다.
“괜찮아졌어?”
“네. 아주 많이요.”
“다행이네.”
“에너지가 얼마나 떨어졌어요?”
“1퍼센트도 안 돼. 걱정하지 마.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땐 변신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쏭한테 해야지.”
그래, 혼란스런 감정을 일시에 해소시켜줄 방법을 알려줬는데, 나한테 감사해야지.
내가 웃는 낯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냥 머릿속에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뿐이에요.”
박사는 세화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겸손을 떤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세화와 비밀 이야기를 하던 방이다.
박사가 정색하더니 나에게 당부했다.
“쏭, 세화가 인터넷 기사나 뉴스를 보지 못하게 해.”
“이미 그러고 있어요.”
“그래... 처음엔 네가 세화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못마땅했는데, 지금은 달라. 꼭 잘 보살펴줘.”
암, 물론이지. 잘 보살피고말고.
타락하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정성을 다해 보살필 거다.
“그럴게요.”
“그... 세화 남자친구는 어때?”
“유승현 씨요? 딱 한 번 만나봐서 모르겠는데...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세화가 유승현과 내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그 배덕감을 불의로 치환할까봐 두려운 거잖아.
걱정 마라.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어. 지금 와서 네가 뭘 하려고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삐빅-! 삐빅!
연구실 밖에서 이블리언 에너지가 감지됐다는 경고음이 들렸다.
사흘간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에너지였다.
박사와 한 차례 눈을 마주친 난, 문을 벌컥 열고 튀어나갔다.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말했다.
“4... 40퍼센트까지 찼어요.”
방에서 나온 박사가 화들짝 놀라 모니터를 본다.
“벌써 D등급이라고? 이건...”
“제가 나가야겠죠?”
“그래. 위치는 다행히 고비사막이야. 소수의 원주민들만 살고, 사막인 만큼 피해는 없다고 봐도 되겠어. 지금 당장 출발할 테니까 세화 너는 여기 있다가 게이트가 열리는 즉시 포탈타고 와.”
“알겠어요.”
“쏭!”
난 이미 전투기가 계류되어있는 정거장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있었다.
박사는 말도 없이 달려가는 그런 나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후다닥 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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