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소녀물 야겜 속 최종보스가 되었다-37화 (37/471)

EP.37 고비 사막의 아이테르

일련의 사건이 지나가고 며칠 후, 난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오늘오후 시리아의 테러단체 본거지로 예상되는 곳에서 C등급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은 나타난 즉시 비스트 슬레이어 레오나에게 참살됐습니다만, 한 테러리스트 용의자의 인터뷰에 인터넷 커뮤니티가 시끌벅적합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겠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 화면에 병원이 나왔다.

그곳 병상에 누워있는, 전신의 절반이 불탄 시리아인이 분개했다.

침을 튀겨가며 온갖 말을 지껄이고 있는 그의 밑에 자막이 나타난다.

-괴물의 지척에 있던 날 봤는데도 그냥 무시하더라니까? 심지어는 괴물을 내 쪽으로 밀어붙이면서 날 죽이려 했다고! 그런 년이 인류의 수호신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한 네티즌은 테러리스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며, 살아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냐며 조롱했고……]

잠자코 TV를 보던 내가 사악하게 웃어재꼈다.

레오나의 정의는 괴물에게서 ‘사람들을 지킨다’ 다.

사람을 골라가며 구하는 전사가 절대 아니다.

그녀는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게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든, 테러리스트든 마찬가지.

일단 죄다 구해주고 죄가 있다면 각국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든다.

‘지금은 다르다.’

이번 일이 그 증거.

테러리스트의 말은 일부 사실이다.

괴물을 테러리스트 쪽으로 밀어붙였다는 건 그냥 오해지만, 레오나는 극단주의 테러단체의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는 테러리스트를 구해주지 않는 건 어찌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나, 원래의 레오나는 그런 이들에게마저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나로 인해 아이테르가 침식되면서 정의가 서서히 고쳐져 가고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람들을 지켜야한다는 정의가 희석되고 바뀔 것이다.

완전히 떨어질 때쯤이면 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전사가 탄생하겠지.

그때까지 레오나를 마음속 깊이 찬양해라, 인간들아.

어쨌든 지금 세화는, 날 먼저 보낸 캐시 박사에게 큰 꾸중을 듣고 있는 상태였다.

테러단체 소속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라며, 정의에 대해 한 소리 듣고 있을 테지.

그렇게 약 30분 뒤,

띵!

[25층입니다.]

청각을 집중하고 있는 내게 엘리베이터의 안내 기계음이 들려왔다.

세화가 돌아왔구나.

난 예능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렸고, 현관문에 카드가 찍히는 소리가 들리자 태연한 얼굴을 장전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세화가 씩씩대며 들어왔다.

화난 얼굴이었지만, 날 보더니 금세 헤실헤실하게 변한다.

우다다 달려와 내 품에 안긴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툭툭 건드린다.

뽀뽀를 해달라는 뜻.

헛웃음을 켠 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진하게 가져다 댔다.

그런 내 입술에 혀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세화를 간신히 떼어낸 내가 물었다.

“많이 혼났어?”

그러자 세화가 인상을 쓴다.

“몰라. 요즘 오지랖이 너무 심하셔. 그냥 대충 알겠다고, 죄송하다고 했어.”

공격적인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다.

“제대로 들었어야지. 박사님은 네가 가장 믿는 분 아니야? 물론 날 빼놓고.”

“그렇기는 해. 내가 너무 민감한 걸까? 요새는 스트레스도 덜 받는데...”

“하나 분명한 건, 난 네 편이라는 거야. 알지?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세화가 내 다리에 자신의 종아리를 올려놓고 배시시 웃는다.

그래, 그렇게 날 의존하고, 내 말이 곧 법이라고 생각해라.

다리를 교차하며 한참 아양을 떨던 세화가 말한다.

“지혁아. 나 오늘 변신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저번에도 그랬긴 했지만 그땐 그냥 아무것도 아니겠지... 하고 말았거든? 근데 오늘 변신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어.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숨겨진 아이테르를 말함이로군.

드디어 언급을 하는구나.

“뭔데 그래?”

“그... 뭔가가 날 불러.”

“부른다고?”

“응. 마치 날 이끌려고 하는 느낌이야. 한국에서 서쪽 하고도 조금 위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라고 확신해.”

“그럼 중국, 몽골, 러시아 쪽인 것 같은데... 그런 기분이 들었으면 박사님께 말씀드리지 그랬어.”

세화가 표정을 굳히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네가 말해줘. 아니면 그냥 내가 변신해서 알아봐도 되니까...”

“변신은 함부로 하지 마. 언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르잖아. 내가 박사님에게 말씀드릴게.”

“고마워. 그나저나 오늘 교양수업 교수님은 출석에 엄청 민감한데... 괴물 때문에 결석해버렸어. 어떡해?”

“그건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데...”

곤란한 내 얼굴을 보던 세화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냥 투정 한 번 부려본 거야.”

“투정도 귀엽게 부리네. 기말고사까지 얼마 안 남았지?”

“응. 시험 끝나고 종강하면 놀러가자. 여행가고 싶어.”

여행이라... 최근 학교, 집, 연구실만 왔다 갔다 해서 심심한 모양이다.

해외를 나가긴 했지만 마물들을 처리하러 갔었던 거니까 여행 느낌도 안 났겠지.

“제주도라도 가볼까?”

“둘이서 어디든 가자. 아 맞다, 나 잠깐 나갔다 와야 돼.”

“어디 가려고?”

“주문한 물건을 좀 가지고 와야 돼서...”

음... 말을 슬쩍 돌린다? 야한 속옷이라도 샀나보다.

좋아, 속아주지. 이참에 유리아에게 연락해야겠다.

약속은 이틀 남았지만 뭐, 연락하면 당장 만나려고 할 테니 괜찮다.

“그렇게 해. 그럼 나 회사 들렀다가 온다?”

“응.”

**

“태곤 아저씨! 여기에요!”

반갑게 손을 흔드는 유리아가 보인다.

이제부터 저 예쁘장한 얼굴에 눈물 몇 방울을 좀 흘리게 만들어야겠다.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잔뜩 집어넣은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잘 지내셨지요? 복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구를 지나쳐왔는데, 사람들이란 참 대단해요. 오뚜기처럼 다시 잘 일어나네요. 눈빛에 희망도 보이고.”

“사람이란 존재가 다 그렇죠. 근데 할 말이 있으시다고, 꿈을 꾸셨다고 하셨잖아요. 대체 뭐죠? 궁금해서 잠을 못 잤어요.”

“길거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진지하게 변한 내 표정.

유리아의 표정도 덩달아 바뀐다.

“네. 조용한 카페를 알아요. 같이 걸을까요?”

“카페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제 차로 가시죠. 거기라면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아... 네.”

난 말없이 유리아를 대전에 두고 있었던 차로 안내했다.

크기가 굉장히 큰 대형 세단.

가격대도 엄청난 고급 외제차였다.

우린 앞좌석이 아닌 뒷좌석에 탔다.

그녀에게로 몸을 돌린 내가 말했다.

“꿈을 꿨습니다.”

“네. 그랬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보통 꿈이라 함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몽롱하고, 깨어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죠. 하지만 이번에 제가 꾼 꿈은 다릅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명하더군요.”

유리아가 엉덩이를 들어 자세를 바꾼다.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모양새.

잠깐 침을 삼키면서 그녀를 안날이 나도록 만든 내가 말문을 열었다.

“주변이 모두 초록색인... 생전 보지도 못했던 잔디로 뒤덮인 어느 동산 가운데에 큼지막한 아름드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요.”

“그...!”

유리아는 입을 떼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자, 작은 기침을 한 차례 하더니 입을 다시 다문다.

표정은 놀라 자빠지기 직전.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 것을 보니 제대로 깜짝 놀랐나보다.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열 살 가량 어려 보였고, 유리아 씨와 닮았더군요.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고... 분위기에 맞는 새하얀, 실루엣이 무척 긴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

“꿈속의 전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 또한 저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보고 있었죠. 제가 추측해보건대...”

“.... 뜸들이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유리아 씨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흑...!”

순식간에 눈물을 터뜨리는 유리아.

굵은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검은색 치마를 적셨다.

그녀가 돌연 내게 안겨왔다. 옛 생각이 좀 나나보다.

나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쓸어주면서 눈을 빛냈다.

난 마르셀라의 도움으로 유리아의 왕국에 대한 정보를 모두 집어넣은 상태다.

초록색 잔디 위의 능선, 그 가운데에 자리한 아름드리나무.

거긴 유리아의 아비인 글렌 엘레나르와 어미인 마가렛 엘레나르가 사랑을 약속한 장소다.

마가렛이 임신 사실을 알려왔던 장소이기도 했다.

난 이 이야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유리아의 가슴 감촉이 제법 부드럽다.

세화보다는 작아서 별로라고 생각했건만, 이 정도면 만지작거릴 만하다.

곧게 뻗은 척추의 촉감도 제법 괜찮구나. 훤칠한 유리아와 더없이 어울린다.

한참동안 유리아와 포옹한 내가 그녀를 천천히 떼어냈다.

소리 없이 운 유리아의 눈 부분은 새빨갰고,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참 아름답군. 세화보다는 아니지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내가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저는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

손수건을 소중한 선물을 받듯 집어 눈가를 닦아내던 유리아가 날 바라본다.

“저는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하늘에 있었습니다. 아래를 보니 거대한... 중세에서나 볼 법한 성이 불타오르고 있더군요.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죠.”

“아...”

“저번에 봤던 당신과 닮은 여인이 어둠으로 칠해진 거대한 사내, 그가 휘두른 불길에 온몸이 타는...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지요.”

내 눈에서도 유리아처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담담히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든 악어의 눈물.

그것에 홀라당 넘어간 유리아가 고개를 몇 번이나 가로젓는다.

“울지 마... 울지 마세요...”

그녀는 내가 환생했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당연하지, 그러려고 마르셀라한테 온갖 정보를 달라고 했는데.

손등으로 눈가를 닦은 내가 말했다.

“유리아 씨, 저는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이런 꿈을 꾼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번에 말씀해주셨던 그 이야기가 진실일지도 몰라요.”

“.....”

“꼭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어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말에 유리아가 다시금 내게 안겨왔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저씨... 아니, 아버지의 이름은 글렌이에요. 아버지의 아내이자 제 어머니는 마가렛이고요.”

“그런 말을 하셔봤자 전 김태곤일 뿐입니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지요.”

“시간... 시간이 지나면 절 기억하실 거에요. 그때까진 태곤 아저씨로 있어주면 족해요... 그리고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지 마세요. 적어도 지금만큼은요...”

나는 이번엔 유리아의 찰랑거리는 금발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유리아를 위한 아이테르를 찾아내고, 새로운 디바이스를 만든 뒤에 다시 시작하자.

그때까진 천천히 간만 보는 거다.

유리아가 안달에 안달이 날 때까지.

그때 미끼를 하나 더 투척하자.

왕국이 멸망하던 날 나에게 뒈진, 너와 혼인을 약속했던 기사단장.

그놈이 유승현으로 환생했다고 알려줄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놈에게 성벽을 풀 수 있도록 열심히 꼬셔봐라.

유승현의 성정 상, 놈의 눈길을 돌리려면 진득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나도 네 마음 안에 깊숙이 자리할 거다.

그 과정을 원래는 김태곤으로 하려고 했으나... 송지혁으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이건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돌아가야겠습니다. 이 혼란스런 마음을 잠재울 필요가 있어 보여요. 댁까지 태워다드릴 테니 푹 쉬십시오.”

내 인자한 말투에 유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뺨에 사르르 스치는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마저 향긋하다.

네 부드러운 머리채를 꽉 잡고 처녀를 빼앗아갈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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