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세화는 유승현이 창피하다 #2
유승현은 간만에 세화를 본 게 너무나도 기쁜 듯, 멍청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세화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깍지를 끼지는 않았다.
세화가 손가락에 힘을 뺐기 때문.
-음... 기운이 안 나네.
유승현이 조금 서운해 하자, 세화가 황급히 변명했다.
-오늘은 기분이 그래서... 미안해.
-아, 혹시 멕시코랑 중국에서 나타났던 괴물들 때문에...
그걸 이 즐거운 축제날에 언급하면 어째.
넌 내가 아니야. 세화의 옆에 없었던 3자였으면서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세화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유승현을 나무란다.
-그 얘길 지금 왜 해? 축제잖아. 난 즐기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사람들도 많은데 목소리는 왜 이렇게 커?
저거 봐라, 세화의 말투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유승현이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하아... 괜찮아.
멍청한 놈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고 입을 열던가 하지.
-들어가자. 오늘 찾아보니까 골든 시스터즈...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세화가 유승현의 손에서 손을 확 빼고, 길을 걷던 미래과학과 남자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유승현이 빠르게 배꼽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인사에 남선배가 당황해하다가 빠르게 유승현을 훑는다.
살짝 깔보는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그를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화는 그런 남선배의 표정을 봤다.
하지만 딱히 욱해하진 않았다.
오히려 유승현에게 검지를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할 뿐.
그래, 경비견이 까불면 혼을 내야지.
-안녕, 세화야. 남자친구신가?
-네, 유승현이라고...
-예의가 참 바른 분이네. 재미있게 놀아. 가수들 공연 보고 주점 한 번 들러.
-안 그래도 다영 선배님께서 오라고 하셨어요. 계란말이 서비스 주신대요.
-그래? 나도 소주 한 병 정도는 줄 수 있어.
-진짜요? 감사합니다.
남선배는 세화와 잠깐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유승현에겐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학교로 들어갔다.
그가 떠나자 여태 가만히 있던 유승현이 세화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네 덕분에 공짜로 술 먹게 생겼네? 대학 주점은 비싸다던데. 돈 굳었다. 그치?
-알면 앞으로 잘해.
-내가 너한테 못한 적 있었어?
힘든 세화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건 기억에서 쏙 빼버린 모양이다.
물론 빠르게 빚을 갚으려고 그랬다 쳐도, 거절하지 못할 일자리를 얻었다 해도 말이다.
무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하던 세화가 대답했다.
-물론 없지. 더 잘하라는 뜻이야.
-알았어. 아... 그리고 세화야.
-응?
-아니다, 나중에 말해줄게.
난 유승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는 것을 보았다.
세화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이거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구나.
학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
세화는 미래과학과의 동기들이나 선배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받았다.
베일에 싸여있던 유승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턱이 두 겹이 보일 정도로 통통해진 유승현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세화가 아깝다.
-그냥 아까운 게 아니라 훨씬 아까운데.
-유... 뭐시기랬나? 쟤 존나 부럽다. 집에 돈이 많은 건가?
-세화는 그런 애가 아니잖아. 성격이 좋나보지. 야, 근데 세화 있잖아... 레오나랑 닮지 않았냐?
-넌 예쁘면 다 레오나랑 연관 짓잖아. 저번엔 다영이 누나한테도 그러더니.
-인정.
세화와 유승현은 듣지 못했겠지만, 난 마물을 통해 저들의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대화가 참 흥미롭다.
세화가 진짜 레오나인 것을 알게 됐을 때, 저놈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인간들에게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이라면... 이거 꼴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로 밴이 들어오더니,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아이돌이 밝은 낯으로 내렸다.
그 순간, 학교 내의 모든 남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골든 시스터즈라고 했던가?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공연은 곧 시작되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미녀들이 귀엽고 섹시한 안무를 추니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그리고 유승현은... 멍하니 무대만 보고 있군.
이런 멍청한 새끼. 세화가 옆에 있는데 저런 애들한테 시선을 빼앗긴단 말이야?
그래도 뭐... 확실히 예쁘긴 하네. 이참에 연예 기획사나 한 번 인수해볼까 싶다.
우웅!
내게 문자가 왔다.
세화가 열심히 휴대폰을 따닥거리고 있던데, 나에게 보내는 거였구나.
[저녁이♡]라는 이름을 걸리는 게 무섭지도 않나보다.
[지혁아, 아직 회의 중이야? 벌써 보고 싶어.]
답장해줘야겠다.
급하게 쓴 티를 팍팍 내주자.
[지ㄱ금 회의 중. 축제는 재미ㅇ있어?]
[그냥저냥... 걸그룹 왔는데 애들이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야. 근데 몰래 문자하는 건가보네? 눈치 보여서 어떡해?]
이 상태로 조금 기다리니, 세화가 초조한지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는 게 보였다.
조금 더 기다린 내가 답장을 보냈다.
[세화야ㅑ. 지금 엄청 바빠서 그ㄱ러는데 1시간만 이따가 해줄래ㅐ?]
[알았어, 미안해. 일 봐.]
시무룩해진 세화의 모습 좀 봐라.
너무 귀엽잖아.
두세 곡을 부른 골든 시스터즈는 밴을 타고 빠르게 사라졌다.
축제시즌이라 바쁜 것 같네. 돈 많이 벌어라.
멀어지는 밴을 바라보던 유승현이 세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대박이다... 이런 무대를 공짜로 보다니... 센터에 있는 애, 춤 엄청 잘 추더라.
-왁왁거리면서 소리치던데... 그렇게 좋았어?
-난 네가 제일 좋아.
그 말을 한 유승현이 돌연 세화의 어깨를 잡고 확 끌어안았다.
의외로 상남자 끼가 있구나.
세화는 다급하게 유승현을 밀어내고는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아...! 사람 많으니까 더워. 나중에 해.
-미안... 야상 벗을래?
-됐어. 술이나 먹다가 들어가자.
-응.
머리를 긁적인 유승현이 다시금 세화의 손을 잡는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톱을 빤히 바라보았다.
놈의 고간이 살짝 불룩해진다.
‘아침이’의 손톱 색이라도 생각난 모양이지?
미래과학과가 설치한 주점으로 움직인 두 사람은, 구석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음식의 가격대를 살핀 유승현이 입을 떡 벌렸다.
-뭐... 가 이렇게 비싸?
-대학 주점이 원래 그렇지 뭐. 내가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냐. 저번에 파전 먹었을 땐 네가 계산했잖아. 이번엔 내가 할게.
유승현은 자신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마르셀라 덕분에 빚이 조금 탕감됐는데도 궁색하게 사는구나.
그래, 그게 너지. 구질구질하지만 정의로운.
학생회의 선배와 인사를 나눈 세화는 여러 음식과 소주를 주문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유승현은, 학생회 선배가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세화에게 고개를 슬쩍 들이밀었다.
-세화야.
-응?
-사장님이 날 좋게 보셨는지 보너스를 주더라.
-뭐? 진짜?
-응. 또 조만간 지점을 하나 낼 건데, 나더러 매니저를 했으면 좋겠대. 일반 회사원들과 근무시간이 똑같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아가씨들 요청사항이라든지, 출근부라든지만 체크하고 돌아오면 돼. 급여도 좋아서 승낙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인복이 많나봐. 좋은 일만 일어나네.
세화가 기뻐하며 물개박수를 친다.
-엄청 잘됐네? 네가 일을 잘하나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조금 그런데... 내가 일을 잘하긴 해.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빚도 거의 다 갚았겠다, 네게 줄 선물을 샀는데...
유승현은 자신의 낡은 재킷 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 만한 박스를 꺼냈다.
박스 가운데엔 수려한 금색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세화의 동공이 커졌다.
박스의 안에 있는 물건이 뭔지 알아차렸음이 틀림없다.
세화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거... 커플링이야?
-응... 우리도 슬슬 다른 커플들처럼 커플링 좀 해야지. 큰맘 먹고 샀어. 네게 항상 고마워.
아아... 저 순수함 가득한 사랑을 보라.
빨리 세화를 빼앗으라고 장작을 더미 째로 집어넣어주는 수준이다.
불타올라 미칠 것 같구나.
세화는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 어딘가에는 조금 어색한 기색이 있었다.
나 외엔 눈치채지 못할, 그런 기색이.
억지웃음을 짓고 있구나.
비싼 반지가 아니라 실망한 건 아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화가 저런 표정을 하는 건, 날 생각하고 있어서기 때문이다.
분명하다. 그녀는 지금 내게 문자를 보내고 싶어 휴대폰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내게 허락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유승현이 의심하지 않도록 커플링을 껴도 되냐고.
유승현은 반지 박스를 열었다.
심플하고 얇은 금반지가 떡하니 가운데에 있다.
도금된 제품이군. 순금은 지금 네 사정으론 부담스럽겠지.
그가 반지를 하나 꺼내든 순간, 난 그것을 확대해보았다.
안쪽엔 이런 문구가 있었다.
[SH♡SH]
승현, 그리고 세화.
이름의 앞 스펠링이 똑같아서 보기가 좋다.
-지금 껴줄래?
-지... 금? 나중에 끼면 안 돼?
-꼭 지금 껴줬으면 좋겠어.
주점의 손님들 절반 이상 세화와 유승현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다.
세화가 네 여자친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겠지.
그 마음 이해한다. 내가 너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잠깐 머뭇거리던 세화가 결국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왼손 중지에 반지를 가져갔지만, 커플링이 중지에 끼는 물건이던가?
당연히 맞지 않았다.
약지에 끼우기엔 껄끄러웠나보다.
유승현이 피식한다.
-약지에 껴야지.
-알아. 그냥 한 번 중지에 껴본 거야.
약간 짜증나는 말투로 그리 말한 세화는, 결국 약지에 반지를 꼈다.
어여쁜 손가락에 쏙 들어가 고정되는, 딱 맞는 사이즈.
그것을 본 유승현은, 자신 또한 반지를 끼고는 환하게 웃었다.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그... 런 것 같아. 예쁘네.
세화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자, 주점에서 큰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 세화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유승현의 얼굴은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잠시 환호성과 박수갈채만 울려 퍼지던 미래과학과의 주점은 다시금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생긋 웃어재낀 유승현이 세화에게 당부한다.
-절대 빼면 안 된다?
그 말에 세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변신할 땐 빼야 돼. 어쩔 수 없어.
-아, 물론 알지. 그건 당연해.
얼마 지나지 않아 세화와 화장실에서 머리를 부딪쳤던 박다영이 계란말이를 내려놓았다.
-보기 좋네? 오래오래 잘 사귀었으면 좋겠다.
그러자 유승현이 큰 목소리로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세화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병신... 힘차게만 대답하면 세화가 좋아할 줄 아냐?
세화는 예전의 네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저거 봐라. 주점 손님들의 시선이 다시 주목되니까 창피해하잖아.
-어우... 목청 큰 것 봐. 세화는 워낙 착해서 우리 과 사람들이 다 좋아해. 어쨌든 맛있게 먹어. 필요한 거 있으면 유니폼 입은 애들 부르고.
-네! 아, 저희 오삼불고기도 하나만 주세요.
-아까 세화가 주문했는데?
-1인분 더 추가하는 거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
-알았어. 매출 팍팍 올려줘서 고마워.
주문을 받은 박다영이 멀어지자, 세화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승현아, 앞으로는 그렇게 소리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날 잘 부탁한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말해달라고 했어? 왜 혼자 나서는 건데?
-난 그냥 널 생각해서... 기분이 나빴다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아니다. 내가 미안해. 술이나 마시자.
-따라줄까?
-응.
세화의 말투엔 경멸과 짜증이 조금 섞여있었다.
경비견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니 기분이 상한 것 같다.
이젠 뭐... 더 볼 필요도 없겠네.
태블릿의 화면을 끄고 가방에 집어넣은 난, 기지개를 펴고는 사장실에서 나갔다.
집에 천천히 돌아간 다음 세화를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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