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세화야, 오늘은 내가 졌다
눈을 뜬 내가 처음 본 건, 하얀색 전등의 조명이었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더라?
맞다, 아몬에게 조종당한 파락스의 일격을 맞고 뒈지기 직전까지 갔지.
천천히 손을 올려 배를 만져보니 멀쩡하다.
역시 박사의 의료기기는 한 성능 한다니까.
하지만 마르셀라의 것보다는 구리니까 돌아가면 몸 내부를 좀 살펴봐야겠다.
“크윽...!”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탓인지 몸이 굳어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니, 구석에서 자고 있던 세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지... 지혁아!”
세화가 나를 꽉 안고는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저 모습을 보니 떡치고 싶은 욕구가 솔솔 솟아난다.
엉엉 우는 세화의 속살을 탐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중에 한 번 울려봐야겠다.
“괴물... 그 괴물은...?”
“흐어어엉...! 죽였어... 내가...”
“잘했네... 수고했어.”
세화의 등을 두드려주며 달력을 살피니 이틀이 지나있었다.
뭐야, 고작 이틀밖에 안 잤어? 난 또 일주일 정도는 잔 줄 알았네.
얼마 지나지 않아 캐시 박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쏭, 일어났네. 몸은 어때?”
“그냥... 조금 찌뿌둥한데요...”
“이틀간 누워만 있어서 그래. 금방 적응할 거야. 장기는 전부 복원해뒀는데, 혹시 불편하면 집에서 푹 쉬어. 천운이 따라줬어. 난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거든. 괴물의 공격이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그게 약이 됐나봐.”
“괴물이 절 죽였다가 살린 건가요 그럼?”
내 장난기 어린 말투에 박사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 셈이지. 그리고 네가 정신을 잃은 뒤에도 게이트가 두 번이나 더 나타났어. 대전에서 괴물이 나온 그날 저녁에 멕시코에서, 그리고 그 다음날 중국에서.”
알아. 내가 시켜놓은 거야.
“피해는요?”
“멕시코는 괜찮은데 중국은 커. 디바이스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라 세화는 나가지도 못했지. 하지만 내가 그쪽 군대와 협력해서 전부 진압했어.”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는 네가 했지. 이거 받아.”
박사가 세화의 머리 너머로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본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블리언 게이지량에 따른 등급표가 세계연합의 표준 가이드라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박사가 일을 처리한 모양.
대략적인 표는 이렇다.
0~20% : F등급, 일반화기로 상대 가능
21~35% : E등급, 기갑전력으로 상대 가능
36~50% : D등급, 대함 미사일 등의 미래병기로 상대 가능
51~65% : C등급, 여기서부터 비스트 슬레이어만 상대 가능
66% 이상 : B등급 이상
대전과 멕시코, 중국에서의 표본을 통해 만든 것 같았고, 내가 전에 만들어두었던 것보다 정확했다.
뭐, 그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오차를 설정한 거니까 넘어가고...
아직 A, S등급은 없지만, 더 강대한 적을 내보내면서 차차 책정해주마.
“멕시코에 나타난 괴물들은 등급이 F였어. 기존에 나타났던 녀석들보다 약했고, 덕분에 순식간에 진압됐지. 중국에 나타난 괴물들은 D, 수가 너무 많아서 사천 지역이 초토화되는 것으로 겨우 끝났어. 이블리언 게이지가 일정량에 도달했을 때 게이트가 열리더라. 이틀 전 대전에서처럼.”
“그럼 제 생각이 맞았네요.”
“그래. 괴물들의 리더가 체계를 잡은 게 분명해. 하지만 우리도 탐색기를 맞춰서 개량해뒀으니까 더욱 체계적으로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넌... 여길 그만둘 생각은 절대 하지 마.”
그럴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예? 무슨 소리에요?”
“네가 없으면 안 돼. 너무 유능해서 나와 세화에게 큰 도움이 되거든. 넌 이제 괴물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 코가 꿰였다는 거네요. 어차피 그만둘 생각 따윈 전혀 없었어요.”
내 말에 박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저렇게 웃으니까 예쁘다. 정복욕이 솟구치네.
남편의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따먹혀도 쪼갤 수 있나 보자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어느새 울음을 멈춘 세화가 박사를 쏘아보았다.
“아직 지혁이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 얘기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세화야, 나도 쏭을 걱정했어. 하지만 우리 일은 널 도우며 세상을 지키는 거야. 쏭도 빨리 이 정보를 알아둬야 하잖아. 게이트가 언제 또 열릴지 누가 알아?”
“그건 그렇지만... 조금만 쉬었다가 말해도 되잖아요...”
박사가 세화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화는 그런 박사의 눈을 슬쩍 피했고 말이다.
“하... 세화야, 쏭이 그렇게 좋니? 쏭과 관련된 일에만 끼면 사명감이 쏙 사라지네.”
“.....”
“좀만 있다가 너희 집으로 데려다줄게. 디바이스는 최대한 빨리 충전해놓고.”
“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조용하라고? 이젠 쏭도 아이테르에 대해 아는데 뭔 상관이야? 그렇지?”
박사가 날 바라본다.
디바이스를 충전해놓으라고 협박을 하는 것 같은 눈빛.
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콰악!
“켁...!”
기지 안에 울려 퍼지는 짧은 비명.
내게 목을 잡힌 마르셀라가 버둥거렸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죄... 죄송해여어...”
마르셀라가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어댄다.
눈빛엔 억울함이 가득 담겨있는 상태.
내가 말했다.
“배때지에 구멍 다섯 개라... 꽤 고통스럽더구나. 날 죽이려고 작당이라도 모의했느냐?”
“마... 왕니임... 그건... 아몬이...”
난 마르셀라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콜록거리면서 기침을 해대는 그녀.
일말의 정조차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몬이 날 죽이기 위해 판을 짰다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그, 그건 아니에요...”
“허면 네 짓이라는 소리로구나.”
“아니... 아니에요... 마왕님, 이건 그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일어난 실수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봐준다.
네가 쫄려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야.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 마르셀라를 내려다보던 나는, 그녀의 고간이 살짝 젖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년 봐라... 저번에 꼬리를 물었을 때도 가버리더니 약간 M 성향인가?
초창기에 들었던 마르셀라에 대한 거부감도 사라졌는데, 간식 정도로 치부하고 한 번 맛봐볼까?
“가까이 와라.”
내 명령에 마르셀라가 후다닥 기어와 머리를 숙인다.
난 바닥과 그녀의 얼굴 사이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마르셀라가 흠칫하더니, 내 발바닥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치고는 발등에 키스를 했다.
음... 욕정이 솟아나지는 않는데. 그냥 나중을 기약해야겠다.
“마르셀라.”
“네엣...!”
“한국대 축제날에 맞춰 유승현에게 휴가를 주어라. 그가 빚을 상당량 탕감할 수 있도록 수를 쓰고. 그 방법은 네게 맡기겠다.”
“알... 겠습니다아...”
“그리고 유리아가 에란델에 있었을 당시,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내게 보내놓아라. 친하던 친하지 않던 상관없이 모조리. 알았나?”
“네에...”
예전이었다면 의문을 표했을 텐데, 최근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게 마음에 든다.
역시 마왕은 근엄해야 해.
“아... 그리고 마왕님. 레오나가 마왕님을 구출하고 안전한 장소에 놓아준 이후, 그녀의 시선이 북서쪽에 가있었습니다... 시선을 돌린 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전 보았어요. 확실히 북서쪽이었습니다.”
“북서쪽이라...”
북서쪽이라면 몽골이 있는 부근.
개조된 디바이스가 잠들어있는 아이테르의 위치를 알려줬구나.
좋다. 아주 좋다.
이제 세화가 그 일을 언급하면, 그쪽으로 가서 아이테르를 찾은 뒤 유리아를 살살 꼬셔보자.
**
그날 새벽,
우웅! 우웅!
세화의 휴대폰이 계속 울려댔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있던 세화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깨어났다.
휴대폰을 확인해본 그녀가 돌연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아... 진짜 짜증나...”
그 순간, 나는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이 울린 건 유승현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
그런데도 짜증을 낸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미치겠다, 지금 당장 세화의 안을 마구 헤집어놓고 싶다.
하지만 참자. 일단 모른 척을 하는 거다.
“왜...? 누군데...?”
잠에서 막 깬 연기를 한 내 질문에, 세화가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더니 말한다.
“승현이.”
정나미 하나 없는 세화의 말투.
더 이상 참지 못한 난, 세화의 위에 올라타 그녀를 깔아뭉개다시피 했다.
내 허벅지에 의해 허리가 조여진 세화가 당황해하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
한참동안 날 주시하던 세화의 말문이 열린다.
“네가 자고 있던 이틀 동안 승현이 문자를 무시했어.”
“일부러?”
“아니, 네 걱정하느라.”
“지금은 답장 보내도 되잖아.”
“새벽 두 신데?”
“넌 지금 일어나 있잖아.”
“답장 안 할래. 귀찮고 짜증나. 자는 척할 거야.”
망설임 없는 대답 3연타.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구나.
그녀는 뒤이어 내 팬티 속으로 가느다란 손을 들여보내기까지 했다.
내 아래에서 잔뜩 성난 남성기를 주물럭거리던 세화가 몸을 뒤튼다.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낮게 웃어재낀 난, 세화의 몸에서 떨어져 정자세로 누웠다.
그러자 세화가 몸을 밀착시켜온다.
“지혁아... 나 하고 싶어.”
“별로 간절해 보이지 않는데.”
“나 빨리 디바이스 충전해야 돼... 또 괴물들이 나타나면 어떡해?”
“핑계 한 번 좋네. 음...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내 휴대폰을 들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이후 팬티를 벗고 세화에게 내 자지를 가리켰다.
“잡아봐.”
세화는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묵묵히 말에 따랐다.
한손으로 자지기둥을 감싼 그녀가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귀두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니, 어루만지는 포즈를 취했다.
어서 빨리 사진을 찍으라는 듯 말이다.
그 장면을 찍은 난, 노트북으로 사진을 보냈다.
이후 트윙클을 켰다.
[0 팔로우 중, 18343 팔로워.]
그새 두 배 가까이 늘어난 팔로워 수.
세 장의 사진뿐인데 이 정도라... 이번 사진을 올리면 아예 뒤집어지겠구나.
세화에게 노트북을 넘긴 내가 씨익 웃었다.
“직접 써봐. 내 마음에 들면 네가 만족할 때까지 해줄게.”
이 사진으로 포스트를 직접 작성해보라는 얘기.
세화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한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듯 한 그녀가 타이핑을 했다.
[저녁이 거에요. 크죠? 지금부터 할 거에요.]
그러더니 어떠냐는 듯 날 바라본다.
눈을 감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웃.”
“.....”
세화의 표정이 살짝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녀가 다소 강하게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녁이랑 하기 전에... 전 이미 젖었어요.]
“어때?”
“이것도 별로.”
빠드득! 하는 소리가 세화의 입에서 들리는 것 같다.
이를 갈고 있구만. 근데 이런 정도론 날 자극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난,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있던 세화가 새로이 타이핑한 제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박아주세요... 주인님♡]
세화는 떨려오는 내 몸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내가 만족에 겨워하는 중이라고 확신했는지, 사진을 올린 뒤 포스트를 등록했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덮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건 꽤... 아니, 무척 마음에 드는군.
내 입에서 패배선언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줄까?”
“며칠 전에 했을 때처럼...”
갑작스레 부끄러워지는 태도 좀 봐라.
이러니 내가 세화를 안 사랑하고 배기겠는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어느새 속옷을 벗어던진 세화는 내 곁에 다가와 다리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누군가가 봐주길 기대하는 것 같았다.
혹은 누군가가 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디바이스가 약하게 짖어대는 것을 보니, 둘 중 어느 쪽이든 흥분하는 게 틀림없다.
세화는 창문에 손을 짚지 않고 등을 기대며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대면입위라도 하고 싶은 모양.
오늘은 이 주인님께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
그렇게 우린 밤새도록 서로를 탐하며 사랑을 확인했고, 사이좋게 늦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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