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구밀복검 #2
“차, 창피하니까 불은 좀 끄고...”
“불을 끄면 어떻게 봐? 대낮에 커튼 치기도 귀찮고... 그러니까 잔말 말고 가까이 와.”
속옷차림의 세화가 수줍은 듯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팬티를 슬쩍 당겨 속을 보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털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끈한 음부가 너무나도 예뻤기 때문.
“빤히 보지 마...”
“제대로 했네. 예쁘다.”
“.... 내가 원하는 거 전부 해준다고 약속했지?”
“물론이지. 난 약속을 경시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세화가 발끈했다.
“지금 내 얘기하는 거야?”
“왜? 찔리시나?”
“그날 이후로 승현이도 안 만나고 있잖아!”
“바빠서 만나지 못하는 거겠지.”
“휴무도 낸다고 했는데, 내가 내지 말라고 말했거든?”
“그랬어? 잘했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는 나에게, 세화가 씩씩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은 죄가 있는 모양인지 금세 표정을 푼 세화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말했다.
“면허학원 등록했어. 월요일부터 다닐 거야.”
“알아. 문자로 카드 내역 찍히더라.”
“근데 따놓기만 하고 너랑 같이 움직일래.”
“말했잖아. 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안 아프게 내가 잘 챙겨줄게. 그리고 내가 있는데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그래? 나 엄청 세. 알잖아.”
알다마다. 내가 왜 몰라?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뒈졌는데.
“글쎄...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세화의 눈에 순식간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녀가 왜 울먹이는지 전혀 이유를 몰랐던 내가 의아해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왜 곧 떠날 사람처럼 말해?”
아...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구나. 난 널 정실로 삼고 평생 곁에 있도록 할 건데.
좀 불안하게 말하긴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난 세화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를 앞으로 안아들었다.
목과 허리에 자연스레 감기는 세화의 팔과 다리.
그만큼 날 의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라 기분이 좋았다.
세화의 엉덩이를 받치고 거실로 나온 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가 널 왜 떠나냐? 네가 날 떠났으면 떠났지.”
“.... 나 소원 있어.”
올 것이 왔구나.
어디 얼마나 야한 부탁을 하는지 들어보자.
“말해.”
“저번에 나한테 했던 말... 그거 해줘.”
“저번에 너한테 했던 말이라니? 언제?”
“내 안에... 했던 날...”
아하. 고작 그런 소원을 비는 거야?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는데?
말을 좀 아껴놓고 있었던 게 주효했구나.
“그거면 돼?”
“응... 그거면 돼.”
“사랑해.”
“.....”
세화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화답하고 싶지만 저번에 내가 입을 막은 행동을 상기하고는, 어떻게든 참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엽다.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내가 생각했다.
‘슬슬 유승현에게 딸감이라도 줘야겠군.’
나 때문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비련한 주인공이여.
미안하니까 선물을 좀 주마.
삐빅! 삐빅!
세화의 개조된 디바이스에서 캐시 박사의 호출소리가 들려온다.
이블리언 에너지를 탐색했구나.
이번 마물은 데스 나이트. 그냥저냥 허접한 마물이었다.
특징이라면 언데드 군단을 이끈다는 점.
물량이 매우 많아서 게이트도 여러 개를 열 예정이었다.
데스 나이트여, 레오나와 몇 합 싸우다가 뒈져라.
언데드 군단은 나와 캐시 박사, 그리고 지구인들이 처리해주마.
네 군단 덕에 마물 등급의 표준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게 될 테니 미리 고맙다고 말해주지.
**
“쏭, 뭐하고 있어? 일도 마무리 됐잖아.”
피곤에 절어버린 캐시 박사의 물음.
그녀와 비슷하게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온 내가 대답했다.
“표를 만들고 있었어요.”
“표...?”
“이번 괴물들의 습격은 기존과 달랐어요. 그쵸?”
“그래. 체계적으로 왔지.”
“네, 마치 누군가가 직접 명령을 내리듯 체계적이었어요.”
데스 나이트를 위시한 군단은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수는 1만이 훌쩍 넘는 숫자.
게이트가 수십 개 열려 그 안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레오나가 강하다지만 물량공세엔 어쩔 수 없는 노릇.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러시아군이 언데드 군단을 상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레오나가 데스 나이트를 비롯한 군단장을 처리하고, 나머지는 러시아군과 나, 그리고 캐시 박사가 마무리했다.
물론 이는 내가 의도한 것이다.
데스 나이트는 이블리언 게이지가 95%가 되었을 때 출몰했다.
군단장은 50%, 그리고 나머지 떨거지들은 20% 미만일 때 게이트가 열렸다.
90% 이상이 되면 게이트가 열렸던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캐시 박사가 고생해서 만든 탐색기를 그저 탐색만 가능한 고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박사여, 너무 실망하지 마라.
체계적인 지구방위를 위해 도움을 주는데, 나한테 감사해야지.
“저는 게이트가 그냥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고지능 생명체가 지구를 정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 괴물들을 보내는 거라고 예상 중이죠. 앞서 출몰한 게이트는 그저 시범용이고, 이제부터 슬슬 조직적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은데...”
“그 고지능 생명체가?”
“네. 우리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준비를 했듯, 저쪽도 체계를 잡아가는 거죠.”
“계속해봐.”
“일단 이 표부터 보세요.”
박사가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거기엔 이번에 게이트가 열렸던 에너지량에 따른 표가 있었다.
또 러시아군의 전과를 정리한 표까지.
박사는 그 것을 대단히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한참 모니터를 주시하던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네?”
F등급 게이트가 열리면 그냥 화기로 잡을 수 있는 수준.
E등급은 기갑부대가 필요한 수준.
D등급은 미사일 같은 미래병기가 필요한 수준.
C등급 이상부터는 비스트 슬레이어가 필요한 수준.
박사의 깔끔한 정리에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정확해요.”
“이번 게이트는 그저 우연일 수도 있잖아. 저번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인간형 괴물들은 탐지되지도 않았어.”
“물론 그래요. 하지만 그건 이블리언 탐색기가 개량되기 전이잖아요. 지금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그래, 그 고지능 생명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고 했지.”
“맞아요. 앞으론 이런 식으로 게이트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예상이긴 하지만...”
“너무 앞서나갔어. 하지만 그럴싸해. 확실히 저 게이트와 괴물들이 그냥 나타날 리는 없지. 신빙성이 있어.”
팔짱을 낀 박사가 연구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구석에서 자던 세화는 구두가 또각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고 말이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더 자라고 말한 박사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네가 구상한 이 표... 이건 따로 저장해놓는 게 좋겠어. 다음 게이트가 어떤 식으로 열리는지 보고 결정하자.”
다음 게이트도, 다다음 게이트도, 그 다음 게이트도 이번 때처럼 열릴 거다.
약한 놈은 허접한 포탈을 타고, 강한 놈은 강한 포탈을 타고.
내가 그렇게 조절할 테니까.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넌, 그냥 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지속적으로 보내주면 돼.
“알겠어요.”
“이틀간 수고했고... 이제 세화 깨워. 집까지 데려다줄게.”
“플라잉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눈이나 좀 붙이셔요. 박사님이 제일 고생하셨잖습니까. 전 디바이스 용량 좀 늘리고 돌아갈게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럼 부탁한다. 내일은 나오지 말고 푹 쉬어.”
“예.”
박사는 연구실 구석에 대충 아무렇게나 눕고는 이내 얕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피곤하긴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
하긴, 이틀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은 상태로 열심히 뒤처리를 하고, 연구까지 해댔으니...
간단하게 디바이스 용량을 늘린 난, 가운을 벗고 세화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자 잠에서 깬 세화가 물었다.
“끝났어...?”
“끝났어. 집에 가자.”
“으응... 수고했어... 나 배고파...”
“돌아가면서 뭐라도 사가자.”
“히히...”
세화는 러시아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저번처럼 힘들어했다.
하지만 전보다는 아니었다.
의지력이 많이 올랐고, 요 이틀간 연구실에서 나와 쭉 함께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나도 오늘은 좀 피곤하구나.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
다음날, 간만에 꿀잠을 때리던 난 아침에 눈을 떴다.
옆을 더듬어보니 세화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찌뿌둥한 목을 이리저리 꺾어대며 거실로 나갔다.
“일어났어? 아침 다 됐으니까 먹어.”
세화는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저게 알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군.
“너 학교가야 되잖아. 지금 준비할 시간 아니야?”
“오늘은 안 가려고 해.”
“그래?”
세화의 표정을 슬쩍 보니 약간의 슬픔이 서려있었다.
이 상태로 혼자 남겨두면 또 힘들어하겠지.
“하루 짼다고 뭐 큰일이라도 생기겠어? 오늘은 나랑 쭉 같이 있자. 메뉴가 뭐야?”
“계란말이랑... 멸치볶음이랑... 콩나물무침, 햄 부침... 그리고 어묵국.”
이것저것 많이 했구나. 준비하느라 힘들었겠다.
내가 자리에 앉자, 세화가 갓 만든 따뜻한 밥을 내왔다.
나는 세화가 요리한 여러 음식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구나, 이런 평범한 생활도 나쁘지 않네.
세화도 내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말없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세화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나 여기서 계속 살아도 돼?”
“지금 살고 있잖아.”
“아니, 짐 다 여기로 옮겨도 되냐구.”
“흠... 유승현이 빚 다 갚으면 너더러 같이 살자고 하지 않을까?”
“원래도 따로 살았는데... 그리고 승현이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같이 안 살 거야.”
“그래? 그럼 천천히 같이 옮기지 뭐.”
반색한 세화가 햄 하나를 내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감사표시도 참 세화답게 한다.
아침을 다 먹고 씻은 우린, 침대에 누워 백수생활을 만끽했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디바이스를 충전한다는 명목으로 신나게 서로를 만지작거리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지면서 깔깔거리고.
세화의 휴대폰이 유승현의 전화와 문자로 울려댔지만, 그녀는 그냥 씹었다.
아예 나중에 연락한다고 문자를 보내놓고 휴대폰을 꺼놓기까지 했다.
그래, 괜히 유승현이랑 대화해봐야 네 마음만 더 심란해져.
그때 봤지? 널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나한테 굽신거리는 행동을.
믿음직하지 못한 놈이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을 떼 가면 돼.
‘아, 맞다.’
바빠서 잊고 있었던 생각을 기억해낸 내가 세화를 불렀다.
“세화야.”
“응?”
“트윙클 아이디 하나만 만들자.”
트윙클은 익명 기반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세계인 70퍼센트가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SNS였다.
“트윙클...? 그건 왜...?”
왜긴, 색다른 플레이를 통해 네 노출증을 좀 키우려고 하지.
유승현에게도 딸감을 좀 주고.
세화의 눈이 불안한 듯 데굴 굴러간다.
걱정하지 마. 얼굴은 보여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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